170. 프린세스, 아니 프로메테우스를
탁.
박정식은 딱딱한 회색 시멘트 바닥에 꽁초를 던져 밟았다.
“이건 뭐, 진짜 괴물이네.”
광익에게 필멸의 요리사라는 괴상한 팀을 보낸 게 박정식이었다.
“명함도 못 내밀고 당했는데요, 형님.”
“사는 곳은 1급 보안 그 이상이고?”
정식이 말하며 소파에 앉았다.
텅 빈 창고였다. 소파와 테이블 외에는 나무 박스나 컨테이너 박스만 가득한 그런 창고.
텅 빈 창고 한가운데 덩그러니 소파와 테이블만이 있었다.
부하 셋이 테이블 앞에 섰다.
이번 사업을 위해 데려온 핵심 인사였다.
“본부에서는 뭐래?”
정식이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그 계집이 보통내기가 아니라고는 하던데.”
“건들지 말라고도 했지.”
머리 큰 부하의 말을 다른 부하가 받았다.
“흥.”
정식은 그 말에 콧방귀를 꼈다.
특수대 요원, 싸움 좀 하는 불멸자.
정식이 보는 광익이 그랬다.
불멸자 잡는 사냥꾼 팀의 실패가 뼈 아프긴 해도, 예상 안쪽이긴 했다.
실패로 인해 더 욕심이 나기도 했고.
“어쩔까?”
“하던 대로 하시죠.”
정식의 물음에 귓불이 크고 인중이 긴 독특한 외모의 부하가 말했다.
본부에서는 사업에 집중하라고 했다.
사업은 잘 돌아간다.
애초에 그가 프로메테우스 안에서 이름을 날린 이유가 뭔가.
사업 수완이 좋아서다.
다만, 사업만으로는 간부가 되기는 어려웠다.
프로메테우스의 간부가 되려면 무력을 증명해야 했다.
정식은 입술을 핥았다.
이번이 기회가 아닐까?
한국에서 번번이 앞길을 막은 특수대 요원.
유광익이란 놈이 계속 요원이었다면 손대기 까다로웠을 터다.
그런데 그놈이 제 발로 요원 명찰을 버렸다.
‘노필두를 죽였고.’
물론 혼자 한 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크로커다일에게 버텼고.’
물론 다른 변신족이 개입했다. 팬텀도 손을 썼고.
유광익이란 천둥벌거숭이 혼자 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그놈이 낀 일은 다 엉망진창이 됐다.
작정하고 시작한 작전이 전부 망했다.
협회의 아더사이드부터 시작해서 머니 & 세이브 타격, 화림 습격 사건까지.
오랫동안 요원 틈에 끼어 있던 간부가 정체를 밝히는 일도 있었다.
전부 유광익 때문이라고 할 순 없다.
그렇게 보는 건 아니다.
그건 너무 나갔다.
하지만 이런 일이 겹침으로 운 좋게 이름 날린 애송이의 가치가 올랐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이 애송이 하나 잡으면 곧바로 간부 승격의 길이 열린다.
“노는 애들 좀 있지?”
정식이 물었다.
“요새 일이 잘 풀려서, 여유 좀 있습니다.”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말끔하게 가르마를 탄 부하가 말했다.
“경찰 애들 냄새 맡던 거는?”
“끄나풀 하나 잡았는데 어떻게 할까 생각 중입니다.”
“작업 시작해 보자.”
“좋아. 형님, 우리도 이제 위로 가는 겁니까?”
귓불 큰 부하가 말했다.
“운 좋은 애송입니다.”
머리 큰 부하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최소 인간벌목꾼 급으로 본다.”
방심은 없다. 박정식은 결심했다.
유광익이란 놈, 그래 잘 치겠지.
어지간한 특수종은 다 씹어 삼킬 것이다.
박정식은 머릿속으로 유광익을 노필두와 동급으로 뒀다.
무력으로 상대하는 건 하책.
그는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사냥한다고 대뜸 눈앞에 나서는 거?
그건 하수다.
그래서 필멸의 요리사라는 놈들은 하수였다.
실력보다 중요한 것,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거다.
몰아넣고 정신을 못 차리게 한 뒤, 친다.
“애들, 준비시켜.”
박정식의 말에 부하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해도 명령에 충실한 부하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최소 수십이 더 있었고.
* * *
쉐프 지망생 팀을 때려잡고 그 팀을 특수대 쪽에 인계했다.
중간에서 PWAT 팀이 끼어서 우리가 데려가네, 자기가 데려가느니 말이 많았지만, 결국 불특대에서 챙겼다.
“잘 지내나 보다?”
외부 보안 2팀의 앞자리 대리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화림 본사 습격 사건 이후, 마음고생 좀 했다고 하던데, 이제는 털어 낸 것처럼 보였다.
이쪽도 최미남 대리한테 홀렸었나?
모르지만, 뭐 이제 괜찮으면 다 된 거다.
“네, 그럭저럭.”
“데뷔전이 화려해. 연예계부터 시작해서 이것들도 때려잡고.”
“운이 좋았죠.”
운이라기보다는 함정을 판 거지만.
뭐, 이 정도 레벨의 사냥꾼이 올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또 보자.”
대리가 줄줄이 애들을 묶고 떠났다.
묶인 놈들은 모든 걸 포기했는지, 반항조차 없었다.
반항했으면 두들겨 맞고 끌려가야 했으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얘들 참 의리도 없네.
대장 끝장났다고 곧바로 포기다.
터벅터벅 함정 겸 산책을 끝마치고 집에 오니, 분명 내 뒤를 밟았던 사람들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집에 있었다.
“잘 다녀왔니?”
어머니가 물었고.
“배 안 고프고?”
아버지가 물었다.
“오라버니, 씻으셔야죠.”
이건 마리.
“여, 조카.”
삼촌은 왜 집에 안 가고 여기 있나.
“삼촌은 왜?”
“차나 한잔 마시고 가려고.”
“밤 열한 시에?”
“차 얻어 마시는 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냐?”
삼촌이 가슴을 폈다.
이게 바로 재벌의 뻔뻔함일까?
당당하니까 내가 할 말이 없네.
“광익아, 가족이다. 예의 바르게 대해야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우리 부모님이야, 어릴 때부터 동방예의지국의 아들로서 날 키웠다.
예의를 잊으면 어머니한테 주먹으로 맞고 아버지한테는 말로 맞았다.
그리고 손님은 언제나 잘 대접하라 했고.
난 그렇게 했다.
“네, 삼촌 환영합니다. 녹차 드려요? 커피?”
“밤에 카페인 마시면 잠 안 와. 차는 됐다.”
차 마시러 왔다며.
뭐, 차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삼촌도 알고 아버지 어머니도 안다.
마리는 모를지도 모른다.
얘는 언제나처럼 아버지 옆에 붙어서 ‘마리가 따라 드릴게요’ 하면서 본능에 가까운 애교를 부리고 있다.
아버지는 물 한 잔 마시면서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고 곧 표정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걸까?
아버지의 눈길이 나에게 닿았다.
아버지뿐 아니라 다들 날 바라봤다.
부모님 포함 전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다.
걱정이 눈에 보인다. 날 염려한다. 그게 느껴졌다.
가족은 쭉 날 걱정할 거다. 하지 말래도 그렇게 할 거란 걸 안다.
“이게 시작일 거다.”
전화를 끊기 전 팬더 형이 말했었다.
명성에 흠집이 갔으니, 나와 가족, 내 주변 모든 사람을 노릴 거라 했다.
그래도 안 된다면 나랑 말 한번 나눠 본 사람까지도 찾아 죽일 거라 했다.
얼마 전에 통화한 사수도 그런 염려를 보였다.
“프로메테우스는 끝까지 널 노릴 거다. 보호가 필요하면 말해.”
사수야, 내 보호뿐 아니라 프로메테우스 궁둥이를 걷어차고 놈들의 명치에 총알을 꽂는 게 목적인 듯하긴 하지만, 나한테 하는 말이 걱정이란 영역임은 변함이 없다.
프로메테우스 새끼들은 여전히 나와 가족을 노린다는 말이다.
그걸 가만히 기다려야 할까?
그래야 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고 난 곧 결론을 내렸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할 말이 있는데요.”
모두를 두고 입을 열었다.
“그래. 얘기 좀 해 보자.”
아버지가 말하며 식탁에 앉았다.
6인용 식탁에 옹기종기 넷이 모여 앉았고 난 그 앞에 섰다.
“경호팀 붙여 줄게. 그게 맞아. 걔들 이게 끝이 아니다.”
삼촌이 먼저 말했다. 확신에 찬 말투였다.
“필요하다면 특임대 쪽에서 보호해 줄 수도 있다.”
아버지는 권력자다. 이럴 때 보면 그걸 새삼 깨닫는다.
그런데 어머니 앞에서는 어떻게 항상 그렇게 작아지시나요.
“경호는 우리 쪽이 나을 겁니다. 매형.”
“처남,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지. 특임대 쪽에서는 요인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불멸자가 가득하거든.”
“이쪽은 숫자가 달라요. 규모가 다르거든요.”
“특임대의 규모도 작지 않지.”
“아, 누님, 혹시 말씀 안 드렸어요? 단군 그룹이에요.”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
“허허허. 알지, 단군, 단군. 엑스큐라시 산하 그룹. 하지만 이쪽은 정부니까.”
“그 정부가 광익이랑 그 주변 지킨다고 본격적으로 힘을 써 주진 않을 거 아닙니까?”
“해 줄 건데.”
“네?”
“해 준다고.”
“에이, 정부가 뭐가 남는다고.”
“반대겠지. 기업이 돈 안 되는 일에 뭐 그렇게 힘을 쓸까.”
“아, 괜찮아요. 돈은 제가 쓸 거라서요.”
재벌 2세 포스다.
“쓸데없는 지출이지, 처남. 이쪽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조카를 잃고 싶진 않습니다.”
파직.
둘 다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식탁을 두고 눈빛으로 스파크를 튀길 뿐.
“그만.”
어머니의 목소리가 둘의 기세를 꺾었다.
“긍낙아, 죽고 싶니?”
“……왜 나한테만.”
한마디에 기가 팍 죽은 삼촌을 보며 새삼 어머니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왜 말 한마디에 수그리는데.
“연호 씨도 그만해요.”
“흠흠, 뭘 할 생각도 없었어.”
헛기침과 함께 아버지의 눈썹 앞이 위로 솟았다.
난감할 때 나오는 태도와 표정이다. 저건 반복 학습의 효과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부를 때 이름이 나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언제나 그랬다.
술 취해서 네 발로 기어들어 오거나, 비자금이 걸렸다거나, 귀찮다고 안 깐 마늘 대신 다진 마늘을 사 왔다거나 할 때마다 그리 불렀다.
공포는 뼈에 새겨지는 법이니까.
“유광익, 다른 생각 했지?”
이번에는 날 풀네임으로 불렀다.
이상하게 어머니가 저렇게 부르면 이유도 없이 심장이 쿵쿵 뛴다니까.
난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답했다.
“네.”
“말해 봐.”
올드포스냐, 엑스큐라시냐.
말 대신 눈으로 묻는 아버지와 삼촌이다.
“굳이 그래야 할까요?”
“뭘?”
삼촌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프로메테우스인지, 프린세스 메이커인지, 하는 애들이 하는 걸 두고 볼 필요가 있냐는 거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내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이 똑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의미를 이해 못 해서가 아닐 것이다.
순진무구한 마리가 물었다.
“안 두고 보면요?”
난 생각한 바를 말해야 했다.
프로메테우스가 나와 가족을 노린다고 한다.
그들이 날 노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생각은 그렇다.
만만하니까 그런다고.
단적인 예로 불멸특수대 전체를 노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잖아?
하물며 어머니를 노리고 나와 주변을 위협하는 놈들이라면.
그냥 두는 것도 웃긴다.
부모님의 두 눈에 여전히 걱정이 어렸다.
결론, 부모님 걱정, 프메, 내가 지운다.
“가서 말해야지. 나한테 그러지 말라고.”
우리 순수한 청학동 에이스는 아직 이런 어두컴컴한 일에 물들 때가 아니다.
돌려 말하니.
“아뇨, 오라버니, 마리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응?
“마리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마리도 돕겠어요.”
“아이고, 마리야.”
아버지가 먼저 기겁했다.
……얘도 다 컸지, 하물며 어머니가 전담으로 키웠다.
우리 어머니 입담과 평소 행동 패턴을 봤을 때, 얌전한 고양이 키우듯 키우진 않았을 거다.
“지울 겁니다. 프린세스 메이커 놈들.”
“프로메테우스요.”
마리가 오류를 정정해 줬다.
아, 실수.
“응, 프로메테우스.”
다들 놀랐다. 나만 보고 말을 잇지 못한다. 물 마시던 삼촌은 물 잔을 입가에 댄 채로 멈췄다.
“실숩니다. 프로메테우스 알아요. 저 안 멍청해요.”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지.
이렇게 놀라면 내가 좀 무안하지.
차 대신 물을 한 모금 머금고 있던 삼촌이 주르륵하고 입가로 물을 흘렸다.
“삼촌?”
“아.”
입가를 닦은 삼촌이 물었다.
“……뭘 지워?”
“불인지 돌인지 가져오는 또라이 애들이요.”
“누가?”
“제가요.”
“어떻게?”
“열심히요.”
숨도 안 쉬고 답해 줬다.
“우리 애 머리를 다친 건가?”
“아까 싸울 땐 괜찮지 않았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둘이 속삭였다.
“제 몸에는 불멸자의 피도 흐릅니다.”
다 들린다는 말이다.
“아, 맞다. 우리 아들 내 피도 이었지.”
아버지가 말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광익아, 다시 한번 말해 볼래?”
어려울 게 없었다.
“지울 겁니다. 프린세스, 아니, 프로메테우스를.”
폭탄선언이었나 보다. 다시금 놀람에서 비롯된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