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우리 일합시다.
웅.
구름 위, 허공에 가늘고 긴 틈이 생겼다.
틈은 생기자마자 검은 아지랑이를 피우며 늘어났고, 원을 그리며 구멍으로 변했다.
이 상태에서 에너지를 터트리며 팽창된 후, 홀은 인베이더를 토해 낸다.
다만, 하늘 위에서 열리는 홀은 날지 못하는 인베이더의 추락사를 장려할 뿐이었다.
블랙홀을 열리자마자 팽창했다.
본래라면 팽창 후 인베이더가 쏟아내기 전에, 탐지기에 먼저 걸릴 터였다.
그럼 비행 관련 특수종 및 전투기가 총출동해서 화력으로 단숨에 쓸어 버릴 것이고.
땅 위와는 상황이 달랐다.
건물도 사람도 없다.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거기에 레일건 또는 광학병기로 무장한 전투기까지 24시간 대기 중이다.
갖가지 에너지원과 새로운 금속, 자원을 갖게 된 인간은 하늘을 지배했다.
하늘 위의 구멍은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이번에 열리는 홀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라면, 고작 몇 분 이내에 제압당할 터였다.
팽창한 검은 구멍은 부풀어 오르다 가라앉았다.
하늘 위에서 열린 구멍은 작은 벌레 한 마리만을 내뱉고 사라졌다.
일정 이상의 에너지가 투사되지 않고 구멍이 사라졌기에 탐지기가 발동하지 않았다.
고작 벌레 한 마리만 하늘에서 지상으로 낙하하듯 비행했다.
홀이 토해 낸 인베이더는 넘버링 7, 디자이어 버그, 욕망충이라 불리는 놈이었고, 특수종 세상에서는 뇌절모기라고도 불리는 놈이었다.
태어난 뒤 고작 6시간만 살 수 있는 인베이더였기에 큰 위협이 되는 종류는 아니었다.
모든 인베이더가 인류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건 아니었고.
이놈은 일반인도 잡을 수 있었다.
다만, 인간의 피에 알을 까고 그 알에서 기생충이 태어나 뇌까지 도달하면 그때부터는 얘기가 달랐다.
인간을 조종해 미친 짓을 종용하는, 마인드 컨트롤 능력을 가진 벌레이기 때문이다.
다만, 특수종의 피에는 알을 깔 수 없었기에, 특수종 세계에서는 실패작이라 불리는 인베이더이기도 했다.
그 한 마리가 서울 상공에서 내려왔다.
살 수 있는 시간은 이제 겨우 4시간 남짓이었고, 벌레는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놈은 제 흔적을 남길 유일한 방법을 찾아 헤맨 끝에 곧 목표물을 발견했다.
푹.
작고 긴 주둥이를 피부에 박아 넣고 제 알을 까 넣는다.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찰싹.
목표물이 제 몸을 손바닥으로 짓이겼다.
인베이더는 죽었다.
다만, 그 흔적은 남겼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인베이더 벌레는 제 알을 남겼다.
* * *
“후, 시발 새끼들, 진짜.”
장필호는 양주로 나발을 불었다. 가슴이 불에 덴 듯 화끈해졌다.
입가로 술이 줄줄 흘렀다.
그는 그대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장필호, 한때는 잘나가는 배우였다.
안방극장을 책임지기도 했고 영화 시나리오도 곧잘 들어왔다.
화려한 삶이었다.
일반인임에도 타고난 외모로, 불멸자 연예인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열여덟에 데뷔해서 스물하나까지, 딱 좋았던 시기였다.
아이돌 여자친구도 만나 봤고 혼혈 불멸자와도 만나 봤다.
여성 편력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어도 워낙에 잘나갔으니, 다들 쉬쉬했다.
그런 장필호였지만, 인생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두 번의 음주운전 사고, 이후 개인 방송에 출연해서 입을 잘못 놀렸다.
그리고 오늘 소속사 대표에게 쓴소리를 들었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너 마스크 좋고, 연기력도 그 정도면 평타는 쳐. 근데 새끼야, 내가 인성은 어떻게 못 해 주지.”
‘개새끼가.’
삼류 건달 새끼였던 놈이, 이제는 대표라고 떵떵거린다.
단물이 다 빠지니, 나 몰라라 한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물론 그럴 용기가 나진 않았다.
장필호는 술만 마셨다.
띵.
[줄리아] 선배님, 어제는 죄송합니다.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니, 엊그제 오가며 지나친 후배다.
당당하고 순수한 이미지의 연기자 후배, 어제 말다툼이 오간 상대다.
‘어깨에 손 좀 올렸다고 난리는.’
콧대가 하늘로 솟은 년이다.
뺨을 후려쳐 주고 싶었다.
그보다, 침대에 눕히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긴 했다.
문제라면 이제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거다.
돈도 없고 인기도 없다.
술집 여자도 쉬이 만나지 못할 형편이었다.
“시발, 내가 다 씹어 먹어 준다.”
괜한 말을 뱉은 필호는 싸구려 양주를 세 병째 비우고 곯아떨어졌다.
한 번 이렇게 마시면 이틀은 뻗었다.
안 좋은 술버릇이었다.
매니저도 반쯤은 포기했다.
지는 해였다.
그런 그의 팔뚝 위로 벌레가 날아와 주둥이를 꽂았다.
필호는 잠결에 손바닥으로 벌레를 잡았다.
찰싹- 소리와 함께 벌레는 죽었고.
필호는 그대로 이틀을 잤다.
물린 부위가 팅팅 부었지만, 필호는 곯아떨어져 볼 수 없었다.
만 하루가 지났고 그가 깨어났을 때, 물린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숙취에 시달리며 깨야 할 필호는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말짱했다.
“오늘 왜 이렇게 몸이…….”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컨디션이 좋았다. 최근에 이렇게 개운하게 일어난 적이 있었던가?
달라진 건 또 있었다.
‘이게 뭘까.’
제 눈앞에 이틀 전에 먹다 만 큐브 치즈가 보였다.
반쯤 잘린, 제 치아 모양이 남은 치즈.
손을 뻗었다. 마음만 먹으면 손도 안 대고 움직이게 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우, 술이 덜 깼나.”
혼자 있는데도 민망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초능력은 무슨.”
그의 감은 생각보다 정확했다.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었다.
욕망충은 특수종의 뇌를 지배하지 못한다.
장필호는 그 욕망충에 물렸고, 놈은 필호의 뇌에 침투했다.
침투한 다음이다. 장필호는 초능력자로 깨어났다.
늦은 나이에 각성하는 초능 특수종이 흔치는 않다지만, 그래도 없지는 않았다.
장필호가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욕망충에 뇌를 뺏겼다.
* * *
“놀먹싸자야.”
“누가 여자친구 이름을 그렇게 불러? 진짜 매너하고는.”
“누가 내 여자친구인데?”
혜민이가 당당히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병원은 다니고 있지?”
얘가 자꾸 약을 까먹고 안 먹는다.
“산전검사는 꼬박꼬박 받고 있지, 오빠가 언제 짐승으로 돌변할지 모르니까.”
내가 변신족 혼혈이라는 걸 알기에 던지는 이중 비유였다.
한낮의 카페였다.
맞은 편에 앉은 혜민이를 보며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음을 깨달았다.
“졌다.”
“에헴.”
혜민이의 콧대가 위로 솟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놀 거냐?”
그렇게 묻고 그린티 스무디를 쭉 빨아서 삼켰다.
달달한 생크림에 녹차 향과 스무디의 차가운 맛이 섞였다.
훌륭했다.
동네 맛집으로 유명한 카페였다.
이사 간 덕분에 여길 자주 못 와서 아쉬울 지경이었다.
뭐, 그래 봤자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지만.
“난 언제나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 알잖아. 내 꿈.”
“너 아직도 현모양처가 무슨 뜻인지 검색 안 해 봤구나?”
혜민이 팔뚝에 새긴 타투가 돋보였다.
악마와 천사가 서로 칼을 맞댄 그림이었다.
누가 새겼는지는 몰라도 보통 실력은 아닌 듯했다.
악마가 막 튀어나올 것 같다.
“왜 난 오빠의 신부가 될 수 없는 거야?”
혜민의 한쪽 눈에 눈물이 고였다.
꽤 고단수가 되긴 했다만.
청출어람은 아직 멀었다.
“오빠는 이미 결혼을 했거든.”
“뭐?”
방금 눈물이 고였던 눈에서 살벌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일이랑 결혼했지.”
“흥, 나보고 백조라고 하지만 오빠도 아직 백수잖아.”
“프리랜서다.”
“일을 해야 프리랜서지. 매일 먹고 싸고 놀면서 무슨.”
“자식아, 내 몸값이 있지. 아무 일이나 해야겠냐.”
그래도 내가 응? 동대문의 구원자, 아더 사이드 진흙 사막의 영웅, 불멸특수대 에이스에 인간벌목꾼 살해자, 크로커다일의 대적자로 불리는 몸인데 말이다.
난 아직 어떤 일도 알아보지 않았다.
준비만 끝났을 뿐이다.
“아, 네네, 그러시구나.”
“비아냥거리는 게 일품이구나.”
“오빠한테 배운 거라.”
“잘났다. 그래서 어쩔 건데?”
괜히 지하철 두 정거장을 몸소 와서 혜민이를 만나러 온 게 아니다.
강혜민, 발차기 잘하는 마법사.
그 이면에는 십 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라는 말이 있다.
본인 말로는 그렇다.
어쨌든 마법사고,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게 분명해서 내 팀으로 들어오길 제안했다.
혜민이는 이걸 기회로 삼아 나흘에 한 번씩 날 보기로 작정한 것 같았고, 오늘은 그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
“조건은 데이트 세 번이었고, 오늘이 세 번째인데?”
“허.”
내 말에 혜민이 혀를 차며 날 흘겨봤다. 원한이 느껴지는 눈빛이다.
“영화 보러 가서 2시간 내내 자고, 나와서 밥은 십 분 만에 먹고, 카페에 앉아서 재촉하는 게 데이트? 호텔 예약은? 유람선은?”
“야, 어제 내가 변신 훈련을 했단 말이다. 피곤한 걸 어쩌냐? 넌 그런 배려도 없니. 애초에 말도 없이 조조 영화를 예약하는 건 뭐냐고.”
“아침 일찍부터 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호텔은 무슨 호텔, 지금 오후 2시다. 이 가시내야.”
“대실 하면 되지. 돈도 많으면서.”
“이게 그런 의미로 들리는 거면 넌 음란 마귀에 씐 거다. 물럿거라, 이놈.”
“쳇.”
혜민이 혀를 찼다.
“알았다고, 대신 내 조건 알지?”
“데이트 빼고는 다 오케이.”
“쳇.”
또 혀를 찬다.
얘는 언제 철이 들려나.
“하여간 그렇게 알고 간다.”
“어딜 가.”
“약속 있다.”
“딴 여자 만나러 가지?”
“아니, 중년 남자.”
“……난, 그게 더 싫어.”
“닥쳐.”
혜민이가 쫄레쫄레 따라 나오길래 어여 가라고 손짓해 줬다.
“안 데려다줘?”
“너희 집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아파트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이지?”
이미 코앞인데 뭘 데려다준단 말이냐.
“1분 1초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
저런 말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는 걸 보면 애가 참 독특하긴 해.
“가, 가 버려, 너 만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가까스로 보냈다.
거, 마법사 스카우트 한번 하기도 더럽게 힘드네.
내가 두문불출한 지도 4개월이다.
그동안 마법사는 세상에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각 마법 연맹 단체가 양지로 나왔다는 말이다.
인베이더를 죽이고 테러단체와 싸우며 밝은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한 거다.
이미지 만드는 게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니니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을 테지만, 일단은 그렇다.
그런 변화에 맞춰 각 집단에서 마법사를 고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그게 어디 쉽나.
일단 연맹 소속의 마법사는 스카우트 따위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의 결속력은 단단했다.
남은 건 연맹 외 마법사.
마녀 계열과 개별 학파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다만, 이쪽은 찾기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다.
난 아직 일도 시작하지 않고 마법사를 팀에 합류시킨 셈이었다.
주차해 둔 차 앞에 서서 손잡이를 쥐자, 딸깍하고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지문 인식으로 열리는 문이다. 세상 참 좋아졌다.
역시 돈은 써야 하는 법이다.
이런 거 즐기려고 돈 버는 거 아니겠나.
최근에 가장 핫한, 신소재로 만든 최신형 스포츠카였다.
주문 방어는 기본이고 어지간한 충격에는 찌그러지지도 않는 소재.
물론 연비는 쓰레기다. 차가 워낙 무거워서.
그래도 하차감은 죽여 주니까.
차에서 내릴 때 사람들의 시선이 콕콕 꽂힌다.
가격은 대략 18억.
더럽게 비싼데, 삼촌이 엄마 몰래 선물로 사 줬다.
훈련 졸업 기념이었다.
삼촌은 좋은 사람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엑셀에 발을 올렸다.
부르르릉.
엔진이 배기음을 토했다.
차가 예열되길 기다리며 오늘 나오기 전, 팬더 대리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동훈이 형, 우리 일합시다.”
“해야지. 프리랜서로 뛸 거라며.”
“자, 그럼 무슨 일부터 할까요?”
꿈뻑꿈뻑.
다크서클이 진한 팬더가 눈을 멀뚱히 깜빡였었다.
“나한테 일을 찾아보라는 거라면 잘못 짚은 것 같은데.”
“네?”
“평생 회사에서 받은 일만 했는데, 일을 물어오는 건 다른 문제지. 차라리 아버지 또는 어머니, 아니면 삼촌한테 일을 달라고 해. 그게 빠르잖아.”
“아니요. 그건 싫고요.”
벌써 부모님 찬스를 쓸 순 없지 않나.
시작부터 그럴 순 없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했다.
요즘에도 툭하면 차라리 삼촌 밑에서 일하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어머니다.
아버지가 묵묵히 아들을 믿자고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투였다.
“그럼 정아한테 물어보든지.”
그래서 오랜만에 사수한테 연락했고, 사수는 자신보다 더 적임자를 알려 줬다.
그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사람 연락처는 받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오랜만이네요.”
김중고, 이전에 머니 & 세이브 금고를 털 때 함께했던, 뒷골목 세계에 빠삭한 아는 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