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형으로
아버지와 발렌타인 30년 산을 마시던 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놀라지 말고 들어라.”
“네?”
“넌 사실 그냥 불멸자가 아니다.”
“……마트에서 처음 얘기하시던 날이 떠오르네요.”
불멸자란 고백을 하셨던 날로부터 무려 2년 가까이 지났다.
“그때 좀 뜬금없었지?”
“많이요.”
“고민 많이 하다가 얘기했거든.”
“그랬어요?”
티도 안 났다.
“이제는 엄마도 알고 너도 아니까 이렇게 속이 편할 수가 없다.”
“비자금 다 털리셨죠?”
술잔을 든 아버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보고 내가 말했다.
“조금 남기셨구나.”
“남자의 의리, 잊지 마라.”
그동안 곧이곧대로 받은 봉급을 가져올 수 없으니, 당연히 다른 계좌로 월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걸 이번에 다 깠다.
그런데도 비자금을 만들다니.
“역시 피닉스팀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군요.”
“이건 대한민국 가장의 패시브 스킬이지.”
그래, 이건 비밀 축에도 못 끼는 거다.
진짜로 어머니가 신경 쓰실 만큼 돈을 꿍쳐 두시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 아버지다. 내가 잘 안다.
아마 어머니 몰래 선물, 꽃, 기념일을 준비하려고 꿍쳐 둔 돈이겠지.
“그냥 불멸자가 아니면 뭔데요?”
아버지가 꺼냈던 말을 다시 화제로 올렸다.
“순혈 가문은 알지?”
안다. 전 세계에 두 개의 줄기로 나눠진 가문이다.
한국에서는 순혈 정가와 순혈 명가가 있다.
한쪽은 성씨를 고집하고, 다른 쪽은 성씨를 버리는 대신 혈통이 좀 옅어지더라도 양을, 그러니까 가문의 소속된 인원을 늘리는 것에 중점을 뒀다.
순혈 정가는 예민함.
순혈 명가는 초고속 재생이 장기다.
설마 아버지가 명가의 가주라는 건가?
“나는 두 가문과 연관이 없다.”
김샜다.
“그럼요?”
아버지가 스트레이트 잔을 들어 입술에 붙이고 천천히 잔을 기울였다.
곧 입안에 술을 머금고 음미하듯 삼켰다.
그걸 보며 난 키위 한 조각을 콕 집어서 건넸다.
“달다. 아들도 먹어 봐.”
“네.”
나도 한 잔 마시고 키위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키위는 숙성이 잘 돼서 살살 녹았다.
술은 썼다.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게 느껴졌고, 위장이 화끈할 정도로 독했다.
“이걸 왜 백오십이나 주고 먹는 거죠?”
“넌 아직 술맛을 모르니까 그러지.”
네, 그렇다고 치고.
“순혈 정가는 예민함, 명가는 초고속 재생, 마지막 가문은 감각 컨트롤 능력이 뛰어났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거다.”
아버지는 말과 동시에 술잔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난 그 손을 보면서, 저 손 뒤에 술잔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 눈으로 봤으면서도 그랬다.
즉, 아버지가 내 감각을 속였다는 거다.
“기척 속이기?”
“굳이 이름 붙이자면 기척 흘리기라고 해야 할까나.”
아버지가 손을 들어 다시 술잔을 쥐었다.
술잔은 그 자리에 있었다.
난 한순간에 방금 쓴 기술의 구조를 파악했다.
그러니까 손의 움직임에 주목하게 한 거다.
손가락, 근육, 힘줄, 모든 걸 이용해서 하는 속임수다.
기척 돌리기의 원리를 반만 쪼개서 쓰면 될 것 같았다.
잔을 입술에 붙이며 아버지가 말했다.
“감각을 컨트롤하는 기술이지.”
예민함은 곧 살아 있는 레이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초고속 재생은 전투에 있어서 불사신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줄 거고.
그리고 이 감각 통제 능력은…….
“불멸자의 비기를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냐?”
생각의 끝에서 아버지의 말이 끼어들었다.
맞다. 통제하고 조정하는 능력이다.
모든 비기는 곧 이 세 번째 순혈 가문의 피에서 나왔다.
“그런 가문이 지금은 왜 아버지랑 저뿐이죠?”
“우리 둘만 있겠니? 불멸교 따위에 몸을 의탁한 놈도 있고, 숨어서 사는 사람도 있을 테지.”
“아니, 왜 망했냐고요.”
순혈 정가도 떵떵거리고 명가 또한 잘 나간다.
“이유야 단순하지. 욕심 많은 늙은이가 왕을 자처했고, 그중 일부는 반항했다. 불멸교 이전에 불멸 왕국이 생길 뻔했지. 이건 아는 사람도 몇 없는 비밀이다.”
그걸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까.
하긴, 마트에서 말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여기는 그래도 불멸자 전용 술집이라 방음벽은 있다.
“가문 부흥시킨다고 이 여자, 저 여자 임신시키지 마라. 그런 의무 없다.”
“저 아직 총각입니다.”
“생긴 건 멀쩡한데.”
그렇게 말을 끊으시니, 참 욕 같이 들리네요.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아들.”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시는데, 엄청난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난 다른 순혈처럼 가문의 피를 이었다는 거다.
혼혈이지만 그 혈통이 이어졌다는 거고.
이건 이미 부모님 두 분께 다 확인한 사실이다.
“그래서 아들.”
“네.”
“이제 뭐 하려고?”
아버지가 물으셨다.
생각해 둔 바가 있기에 입을 열었다.
이상론이라는 말이 있다.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난 그런 걸 꿈꿨다.
그걸 위한 회사 생활이었다.
하지만 화림에 입사해서 느꼈던 건, 내가 바라던 곳이 아니었다는 거다.
내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은 프리랜서로 일을 맡아 보려고요.”
“굳이?”
불멸특수대만이 답이 아니다.
나도 안다.
“좀 멋대로 살아 보려고요. 제가 그래도 되는지, 그걸 알고 싶어요.”
회사에서는 그래서는 안 됐다.
그래도 꽤 멋대로 굴었지만, 그때마다 상벌이 뒤따랐다.
평가가 따랐고, 잘못된 일이라는 질책도 함께했다.
그런데 그 판단은 누가 할까.
특수종의 세상은 미친 자들의 세상, 곧 외법(外法)의 세계다.
판단은 곧 자신이 해야 한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홀로 서 보려 한다.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 건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덕분에 할 일이 많았다.
매일매일 머릿속에 새로운 일이 떠오르는 중이고.
“흠, 좋아. 난 아들 응원한다.”
아버지는 언제나 같았다.
내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법이 없는 분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오늘 계산은 아들이 하는 거로.”
“네?”
“돈 많잖아. 아들.”
난 이날 아버지에게 술값을 뜯겼다.
* * *
아버지와 가졌던 술자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프리랜서, 자유 계약으로 일을 하려고 보니, 내가 손 써야 할 일이 참 많았다.
일을 맡는 것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행정 처리까지, 모든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난 머리가 좋다.
하지만 이걸 혼자 하려니 골이 아팠다.
그때 생각했다.
굳이 내가 해야 할까?
좋은 일꾼, 아니 동료를 두면 될 거 아닌가.
기왕이면 아는 사람이면 좋고.
오갈 데 없으면 더 좋고.
그 와중에, 이런 서류 처리나 정리하는 데 일가견이 있으면 더 좋고.
적임자가 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사수를 향해 물었다.
“팀장님이 깨어나시면 동훈 대리, 다시 일은 할 수 있겠어요?”
안 될 거다.
알고 물은 거다.
“무리라고 본다.”
당연한 답이 들렸다.
음음, 그렇지.
“팀장님은 언제 정신 차린대요?”
그래도 팀장이 멀쩡하면 팬더 대리가 감방까진 안 갈 것 같은데.
그 양반 생떼를 부려서라도 그렇게 안 두겠지.
수틀리면 복면 쓰고 탈출시킬지도 모른다.
“최소 보름, 의식은 이미 찾았고.”
“팀장님, 이미 만나고 왔군요.”
“네가 퇴사한 얘기도 알고, 네 부모님 얘기도 했지.”
강단 있는 우리 어머니.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일반인 어머니가 회사에 쫓아와 사장 죽빵을 날렸다는 말이 허다했다.
그 말을 듣고서 다들 그러려니 했다는데 당최 모를 일이었다.
다만, 내 반응에 요한 형이 ‘네 어머니잖아.’라고 말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불쾌했다.
아니, 우리 어머니가 변신족이라 조금 단순하긴 하고 말보다 손이 먼저 나오시긴 하지만.
됐다, 그만두자.
내 얼굴에 침 뱉는 기분이다.
“아시죠? 우리 아버지.”
난 성인이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다만, 써먹을 수 있다면 부모님 배경이든 뭐든 다 써먹을 줄 아는 영특함을 갖췄을 뿐.
우리 아버지, 유연호 씨는 피닉스팀장.
행정안전부 장관조차도 함부로 못 하는 실세.
세계 정부 연합, 올드포스에서 눈여겨보는 인재이자, 불멸자 최강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투 요원.
한국 정부에서도 함부로 못 대하는 사람이란 거다.
집에서는 팔불출에 아들 지갑을 터는 아버지였지만 밖에서는 이리 대단한 분이다.
“동훈 대리, 나쁜 사람 아니다. 네가 힘써 줄 수 있다면 부탁 좀 해야겠다.”
여전히 딱딱한 말투로 사수가 말했다.
안다. 나도.
더욱이 난 그 사람이 필요하다.
그냥 놔둘 생각 따윈 없었다.
다만, 사수의 말에 틱틱 걸리는 게 있기에 입을 열었다.
“사수의 부탁은 아니겠고.”
사수의 눈가가 떨렸다.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한 얼굴이다.
평소 표정은 포커페이슨데 조금만 틀어지면 표정에서 다 드러난다.
“팀장 아이디어죠?”
“음.”
사수가 대답 대신 신음을 흘렸다.
난 그걸 대답으로 들었다.
“팀장님 전화 연결은 돼요?”
본래 사수에게만 사정을 설명하고 동훈 대리 구출 작전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
“되긴 되는데, 아직 환자다.”
불멸자가 환자는 무슨, 재생 중에 격통이 밀려오긴 하지만 환자까지는 아니지.
“퇴사할 때 인사를 못 드려서 인사드리려고요.”
“거짓말.”
“티 나요?”
말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난 터치 버튼을 눌러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여섯 번 울린 뒤 목소리가 들렸다.
“퇴사 신고라도 하려고?”
“아이고, 중봉이 형, 좀 괜찮고?”
“……뭐?”
“아, 나이 차이 있으니까 삼촌이라고 해야 하나, 삼촌이랑 형 중에 고르세요.”
“……미쳤냐?”
“퇴사하면 남이지 뭐. 고르시라고.”
뚝.
전화가 끊겼다.
“신호가 안 좋나 봐요.”
날 빤히 보는 사수를 보며 말하고 다시 전화했다.
“전화하지 마라.”
“싫은데요.”
“용건만 간단히.”
“동훈 대리, 평생 도망자 신세로 만들고 싶진 않으신 거죠? 그래서 사수시켜서 말 전한 거고.”
뜨끔했는지 말이 없다. 대신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재생 많이 아파요? 참아요.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프니까 팀장이다, 이런 말 몰라요?”
“무슨 미친 소리야.”
몰라 나도. 당신 놀리려고 막 만든 얘기야.
“동훈이 형, 다시 입사는 안 되겠죠? 남 사장이 받아 주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고 정부에서 실험체 하나에 힘을 써 주지도 않겠죠?”
돌아가는 판을 보면 대충 상황을 알 수 있다.
“머리는 뺀질나게 돌아가서는.”
“저 불멸자입니다. 속삭여도 들려요.”
“혼잣말이다.”
“퍽이나.”
“그래서 요구 조건은?”
팀장은 눈치가 빨랐다.
“나중에 필드에서 만나면 한 번 양보해 주세요.”
어차피 나도 팬더 대리는 데려와야 했다.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니까.
변신족 실험체라는 타이틀만 빼면 저만한 능력자를 구하는 게 어디 쉽나.
내가 입사했을 당시에도 별의별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고 들었다.
일전에 친해진 헤드헌터 스티븐 최에게도 물어봤다.
“만약 이동훈 대리, 화림 이동훈 대리는 알지? 그 양반이 FA 시장에 떴다. 어떨까?”
“난리 나겠죠. 그만한 능력 갖춘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동훈 대리는 혼자서 열 사람분의 보고서를 처리했던 행정계의 슈퍼스타다.
거기에 특수종, 수틀리면 전투원의 역할도 수행했다.
물론 피를 무서워하는 불멸자라는 타이틀이 달려 있긴 하다.
그건 아직도 유효한 타이틀이기도 했다.
화림에서는 이동훈 대리의 변신체가 소문나지 않도록 잘 막았다.
남 사장이 영리한 방법을 썼다.
우리 어머니가 사장을 때리고 내가 사장을 벗겨 먹은 것 등, 다른 소문으로 덮어 버렸다.
우리 남 사장 잔머리는 기가 막히게 돌아간다.
“넌 같은 팀으로서 의리도 없냐.”
팀장이 불만을 표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첫 대면부터 시발이라고 해 놓고 의리를 찾아요? 이 양반 진짜 못 쓰겠네.”
할 말 있으면 더 해 보시든가.
짧은 침묵 뒤다.
“형으로.”
그러곤 전화를 끊었다.
“우리 팀장님 마흔 넘지 않았어요?”
사수에게 물었다.
“넘었지.”
“양심이 없네, 이 양반.”
어쨌든 형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으니, 내 조건을 수락한다는 거다.
어차피 데려올 거였는데, 보상이 늘었다.
“그럼 또 봐요.”
“건강히.”
사수가 인사를 건네기에 성큼 다가가 사수를 콱 안아 줬다.
“입사 이유, 가족이죠?”
이전에 사수의 방에서 빛바랜 가족사진을 본 적이 있다.
“기구하지만 평범한 이야기다. 테러 단체에 가족을 잃고 복수하는.”
사수가 말했다.
무려 비약 인간까지 돼서 하는 복수다. 평범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난 사수를 안은 채로 말했다.
“저도 그 새끼들이 개싫어서, 나중에 일 터지면 도울게요.”
“……고맙다.”
사수의 답에 난 그녀를 풀어주고 몸을 돌렸다.
물론 무료로 도와주려는 건 아니다.
이제 프리랜서, 내 시간은 돈이니까.
화림에 톡톡히 대금 받고 지원 나갈 거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영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자, 그럼 동훈 대리 구출 작전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딸랑.
카페 문을 열고 나오자, 아직 이른 시간인데 벌써 해가 지는 중이었다.
겨울의 낮은 짧은 법이었다.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첫눈이었다.
어느새 겨울이었다.
난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아주 잠깐 주저했지만, 전화를 못 걸 정도의 사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 하나쯤은 들어주지 않을까?
이러려고 어머니가 회사에 쫓아온 날 순순히 물러난 건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여보세요. 잘 지내죠? 형, 사장님하고 통화될까요?”
전화를 건 곳은 화림 정보 통신 사장 비서실.
전화를 건 대상은 남명진 사장이었다.
어쨌든, 동훈 대리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