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심장이 뛰었다.
쿵.
심장이 뛰었다.
그런 순간이 있다.
편한 친구로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친구가 이성으로 보이는 그런 타이밍.
프로의 냄새를 풍기는 혜민을 보는 순간, 내 심장이 폴짝거렸다.
내가 쟤를 여자로 본다고?
설마.
그건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심장아, 정신 좀 차려 줄래?
나대던 심장의 두근거림이 곧 가라앉았다.
그렇지, 이게 맞지.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건 이해하시죠?”
평소의 혜민이와 다를 건 없었다.
적당히 뻔뻔하고 할 말 다 하는.
당당하게 가슴을 내미는 자세를 선호하고 발차기를 좋아하는.
그런 애다. 쟤가.
다만, 내가 쟤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뿐.
“전부 저기 계신 팀장님이 시키신 거고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 나온 마법사는 주문의 흔적을 찾을 거고, 우리는 흔적이 남은 요원을 턴다. 단순한 작전이다. 작전 이름은 먼지떨이다.”
혜민이를 향한 내 심장의 반란은 제쳐 두고.
팀장한테 작전 이름 짓지 말라고 건의해 봐야겠다.
아무리 봐도 작명 센스가 나보다 더한 사람이다.
“뭐?”
나도 모르게 팀장을 빤히 바라보니, 팀장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닌데요.”
“속으로 내 욕했지?”
쓸데없이 직감만 날카로워서는.
“아닌데요.”
난 고개를 저었다.
때로는 하얀 거짓말이 사회의 존속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게 하기도 하고.
괜히 내가 욕한 걸 알아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거다.
“저 새끼가.”
팀장이 눈을 부라렸다.
“팀장님 새끼 아닌데요.”
평소와 다름없이 투덕거리는 시간이다.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덤비기에, 적당히 나이 자신 양반 무료하지 말라고 주먹과 발을 몇 번 교환하며 정답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혜민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둘이 사이가 되게 좋나 봐요.”
“네 눈에는 저게 좋아 보여?”
팬더 대리가 되묻는 말도 들렸다.
팀장의 주먹이 막 내 턱 끝을 스쳤다.
난 피하며 무릎으로 명치를 찍는 중이었고.
팀장은 피했지만, 이걸 맞았다면 몸이 위로 들리며 어제 점심 때 먹은 것까지 확인할 만한 그런 무릎 올려 찍기였다.
공방을 교환한 팀장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거리를 벌리고 동시에 말했다.
“안 좋아.”
말하고,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쓸데없이 이럴 때는 왜 마음이 잘 맞는지.
“에효, 관두자.”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연로한 양반이랑 놀아 주는 것도 힘들긴 하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이제 일을 할 시간이기도 했다.
똑똑.
완전 방음이 된 회의실이지만, 문을 통한 진동만큼은 확실히 전해졌다.
누군가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사수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팬더 대리는 그사이 엉망이 된 의자 따위를 세워 놓았다.
혜민이도 그걸 도왔고, 나도 함께했다.
팀장은 움직이느라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뭐. 왜.”
이 양반 까칠한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은 당황할 법했다.
이번에 입사한 신입 사원 중 하나였다.
눈꼬리가 아래로 쳐지고 볼살이 있는 귀여운 여자 사원이었다.
“네, 신입 사원 조, 조수연.”
놀라서 떤다. 겁먹은 강아지 같았다.
팀장은 그런 신입을 말없이 바라봤다.
내가 볼 때는 바라본 거지만, 저 강아지 신입이 보기에는 노려보는 거로 보일 듯했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적당히 팀장의 앞을 가리며 미소를 보였다.
“네, 무슨 일이죠?”
내 얼굴을 보고 안도한 신입 강아지 사원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혜민 씨, 사장님 호출이요.”
“혜민이요?”
“네. 사장님 비서분이 오셔서 3팀 찾다가 안 보여서 2팀 대리님께 말했고, 대리님은 저한테 찾아서 전하라고 하셨고, 저는 3팀을 찾고 찾다가 회의실에 들어갔다는 말을 분석팀 선배님께 들었고.”
놔두면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도 말할 기세다.
“네, 고마워요. 알겠습니다. 고생했네요. 수고했고요.”
강아지 사원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돌려보냈다.
“다녀올게요.”
혜민은 예상한 일이라는 듯, 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회의실을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런 혜민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꼭 설렘 때문에 뛸까?
혜민의 뒤통수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
난 나가는 혜민의 등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 줬다.
“응. 고마워.”
그런 날 보고 혜민이 생긋 웃었다.
음, 역시 내 심장이 고장 난 걸까.
너 자꾸 왜 뛰니?
머리가 복잡하면 몸을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리 말씀하셨다.
육체와 정신은 하나.
머리가 안 돌아가면 몸을 굴리면 된다고.
참 무식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게 되게 잘 먹히거든.
난 팀원에게 말했다.
“저 몸 좀 풀러 갈게요.”
“또 운동?”
팬더 대리가 되물었다.
내게 운동은 취미이자, 특기다. 고로 자주 한다는 말이다.
“대리님, 그러다 뱃살 나옵니다. 부지런히 몸 좀 쓰세요.”
팬더 대리는 매일 군것질을 입에 달고 살며 운동이랑 담 쌓았는데, 이상하게 몸은 좋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나는 노력을 하겠지.
“남이사.”
“네이네이.”
말하고 나도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진짜 땀이나 흠뻑 흘릴 셈이었다.
* * *
남명진은 눈을 감았다.
귀도 닫았다.
숨을 고르게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대자, 소리 없이 의자가 젖혀졌다.
제 사무실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사장의 모습이었다.
여유 넘치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누구냐?’
누군가 개수작을 부리는 중이다.
마윤 상무를 채간 거?
그 정도는 애교였다.
그는 주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누군가 자신의 회사를 노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게 정보를 노리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직감적으로 위협을 느꼈다는 거다.
남명진은 불쾌했다.
몹시 기분이 상했다.
불멸특수대는 여러 개의 지사를 갖고 있고, 최근에 가장 훌륭한 공적을 세운 곳이 바로 화림 정보 통신이었다.
그 중심에는 외부 보안 3팀이 있었고. 거기에 유광익이 계속해서 압도적인 공적을 세우고 있다.
오점이라면 불멸교도 마윤을 놓친 것뿐이다.
그만한 저력을 보여 줬는데도 이 회사를 노린다? 만만하게 보였다는 거다.
‘내가 그냥 놔둘 줄 알았나 본데.’
부처의 중지.
남명진의 별명이었다.
부처가 누구인가, 자비로움의 대명사다.
그런 부처의 중지다. 흔히 볼 수 없는 인내와 자비를 갖춘 사람임을 말했다.
남명진은 어지간한 실수는 모두 용서했고.
죽고 죽이는 세상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부처의 중지란 그런 이미지가 겹쳐 생긴 별명이었다.
“사장님, 강혜민 왔습니다.”
비서가 말했다.
남명진은 눈을 떴다.
이미지를 통해 만든 별명과 실제의 남명진은 간극이 존재했다.
그에겐 사실 ‘부처’라는 두 글자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었고.
그 과감성 덕에 현재 자리에 있는 거였다.
이미지를 통해 만든 별명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의 방심을 이끌게 하는 법이다.
별명은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일 뿐이었다.
“들어오라고 해.”
남명진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평소의 유들유들한 미소와 부드러운 눈빛을 달고 소파 위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며 생각했다.
자신을 건드린 게 누구든, 회사를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치를 생각이 있다고.
그게 만약 사원 누군가의 목숨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남명진에게 중요한 건, 일개 사원의 목숨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이룩한 업적, 화림 정보 통신이 남명진의 모든 것이었다.
부처의 중지, 평소의 인내와 자비를 바랐다면 그 부처의 역린을 건들지 말아야 했다.
화림은 남명진의 역린이었다.
개수작을 부린 놈들을 죽이고자, 그는 가진 인맥을 동원했다.
그 시작이 강혜민이었다.
“오, 반가워요.”
웃으며 인사하자, 혜민이 사장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와, 여기 되게 좋네요.”
“좋죠?”
막 스무 살이 됐다는 마법사다.
아직 수수하고 때가 묻지 않은 얼굴이었다.
귀엽고 상큼한 이미지였다.
세상 모든 미남 미녀가 불멸자는 아니다.
일반종 중에서도 미녀는 있다.
눈앞의 마법사도 드물게 뛰어난 외모였다.
뭐, 남명진은 마법사가 어떤 방식으로 성장하는지 알기에, 이 어린 마법사도 어릴 때부터 다양한 마법으로 제 외모를 가꿨으리라 짐작했다.
“일은 문제없이 진행 중이죠?”
남명진이 막 핸드 드립으로 내린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네, 일단 흔적을 찾아 몇 명은 특정 지었어요. 전 흔적이 보이는 사람만 현재 팀에게 전달하면 되는 거니, 쉬운 일이죠.”
불멸자가 사람의 흔적을 찾는 일의 전문이고.
변신족이 냄새로 흔적을 쫓는 게 전문이라면.
마법사는 주문의 흔적을 쫓는 전문가다.
마나 또는 마력이라 불리는 마법사가 사용하는 기묘한 에너지는 무조건 흔적을 남긴다.
그걸 찾고 파악하는 데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만큼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불러온 마법사가 아직 앳된 강혜민이었다.
“실전이 처음이라고요?”
“네, 처음이지만, 전 여덟 살 때부터 마법을 배웠습니다.”
자신감이 엿보이는 말투였다.
남명진은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믿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
“네.”
의심의 눈초리는 없다.
제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어린 마법사.
그 마법사를 돕는 인연이 있는 요원.
요원의 안전을 신경 쓰는 팀장.
팀장의 약점이자 그를 이곳에 옭아매게 만드는 팀원.
재밌는 구성이다.
그 사이에 공적으로는 현재까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압도적인 요원이 있다.
유광익.
그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남명진은 자신과 광익이 서로 손을 맞잡는 장면을 상상했다.
능히 자신의 후계로 키울 만한 인재다.
혼혈이기에 혈통 우월주의 따위도 없고.
가진 능력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사교성 또한 불멸특수대 제일이다.
서글서글하고, 전 부서에 친한 직원이 있다.
이제까지 이런 불멸자는 없었다.
적어도 1세대의 영웅이라는 남명진이 알기에는 처음 보는 타입의 천재이자, 혈통을 이은 불멸자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생각의 끈을 돌렸다. 강혜민이 묻기에 남명진은 여전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제가 화림으로 불렀으니, 우리 안면은 터야죠.”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명진은 노림수가 분명했고, 그걸 위해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었다.
* * *
“맞아?”
물음에 혜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못 믿어?”
“옆집 사는 애 아니었으면 난 널 처음 보는 거고, 주문 쓰는 작자들은 특히나 숨어 사는 걸 특기로 삼는데, 널 어떻게 믿냐?”
“오빠, 그거 알아?”
“뭐?”
“불신에 이유가 많으면 믿고 싶은 마음을 일부러 외면하는 거래. 우리 오빠 나 좋아하는구나.”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는 걸까.
“우리 혜민이 열 있니?”
이마에 손을 올렸다. 미지근했다.
“나 이제 애 아니다. 스믈이라그.”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하는 게 귀엽긴 한데.
솔직히 그때 심장 한 번 장단에 맞춰 춤추긴 했다만.
넌 아직 나한테 애다.
옆집 사는 꼬맹이, 다만 마법사.
그게 전부다. 그리고 지금은 일하는 중이고.
만담이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지금 퇴로에는 사수가 날 기다리고 있고 팬더 대리도 뒤쪽에 혹시나 있을 변수에 대비해서 대기 중이다.
팀장은 집에 갔다.
“너희끼리 해도 되잖아. 난 오늘 약속 있다.”
중요한 비공식 작전이라며?
왜 혼자 여유 있냐고.
어쨌든 그렇게 시작한 일이다. 퇴근길이었고, 막 주문의 흔적이 있다던 용의자를 쫓는 중이었다.
저 사람 뒤통수를 보니 의문이 들긴 했다.
저 사람은 나도 안다. 외부 보안 1팀의 2급 사원이고 불멸특수대에 어찌어찌 입사는 했지만, 육체 능력 키우는 쪽에는 취미를 두지 못해서 행정 전담이 된 요원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리 나라고 해서 모든 요원의 이름을 외우진 않는다. 하물며 저 사람은 종일 누구랑 인사도 잘 안 하고 제 자리를 지키다가 집에 가는 아웃사이더다.
하루에 말 많이 해야 세 마디쯤 되려나.
저런 사람이 빼낼 기밀이 뭐가 있을까?
“아, 여기서 보네요.”
다가간 내가 말을 걸었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싱긋 미소도 보였다.
남자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놀란 그는 눈썹을 씰룩이다가 말했다.
“네, 대리님.”
이 사람이 선배지만, 직급은 역전했다.
역전 직급의 시대다.
그리고 화림은 직급이 깡패다.
“왜요?”
아웃사이더 요원은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냥 우연히 보고 인사한 건데요.”
말하며 다시 웃었다.
필요한 건 시간이다.
혜림이는 말했다.
최소 3분에서 5분의 시간이 있다면, 상대에게 남은 마법의 흔적을 역산해 어떤 종류의 주문이 쓰였는지 알 수 있다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녁이라도 같이?”
“싫습니다.”
아니, 그렇게 대놓고 거절하면 제안한 사람 상처받지 않나?
“왜요? 왜 안 먹어요?”
나 이래 봬도 사내 이미지 꽤 좋은 편인데.
“그쪽한테 인기의 냄새가 나요. 저랑 안 맞아요.”
……상당히 고찰 적인 이유네.
“저 인기 없어요.”
내 말에 남자가 눈을 흘겼다.
미안하다. 그래, 이건 씨알도 안 먹힐 소리지.
“네, 사실 인기 있어요. 그럼 밥 말고 같이 걸을래요? 요새 공기도 좋은데.”
“굳이?”
아웃사이더 요원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나도 이상한 거 알아.
굳이 우리 둘이 걸을 이유 따위는 없지.
“네, 그냥 이야기나 좀 하면서…….”
언제까지 시간을 끌라는 건가.
말끝을 흐리는 사이다.
“오빠, 뭐 해. 가자.”
뒤편에서 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말은 신호다.
“어, 그래.”
당장 눈앞에 있는 놈을 제압하라는 신호.
몸을 돌리는 척하다가 백스핀 블로우를 날렸다.
이 자가 첩자라면 한 수는 숨겨 뒀겠지.
쩍!
예상 밖이었다.
내 주먹에 맞아 턱이 쪼개진 아웃사이더 요원이 그대로 기절했다.
턱 사이로 피가 줄줄 흘렀다. 사지를 부들부들 떠는 걸 보니 턱을 통해 뇌에 제대로 충격이 전해진 듯싶다.
“……어?”
놀란 내가 고개를 갸웃했고.
“잡아 두라고 했지, 반쯤 죽이라고는 안 했는데?”
혜민이 다가와 말했다.
응.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단다.
어쨌든 첫 번째 용의자를 잡은 셈이었다.
그런데 만약 혜민이가 잘못 찍은 거면, 지금 내가 한 일은 뭐가 되는 걸까.
참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