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가주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어떻게 할까요?”
보좌관이 물었다.
“뭘 어째.”
“그냥 놔둡니까?”
유광익에 관해서 하는 말일 터였다.
“놔둬. 저 나이 때는 다 그렇지. 순백이야, 순백. 아직 순수해서 때가 묻지 않았어. 저런 것도 좋잖아.”
쪼르르, 꿀꺽.
다시 술 한 잔을 채워 마신 가주가 말을 이었다.
“저것도 한때지. 시간 지나면 때가 묻기 마련이고, 그때가 되면 알아서 찾아올 거다.”
가주가 아는 세상은 그렇다.
때 묻지 않은 이가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걸 바꾸고 싶은 이상주의자라면, 그만함 힘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힘은 한계가 있는 법.
“다 한때지.”
가주가 말하며 잔을 비웠다.
유광익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배울 거고, 그때가 되면 오늘의 선택을 후회할 것이다.
기남이 아니었다면 머리통이 박살 났을지도 모를 가주는 진정으로 그리 생각했다.
“수라야.”
“네.”
문밖에서 대기하던 정수라가 곤란한 기색을 감추며 답했다.
광익이 한 짓을 보고 놀라서 말문이 막혔었다.
어느 누가 순혈 가문의 가주 앞에서 이리 행동할까.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장면이다. 화림의 사장도, 행안부의 난다긴다하는 이들도 함부로 못 하는 사람이 가주다.
대한민국 권력의 중추라 할 수 있었다.
“계속 가까이 지내라. 기회를 봐서 씨를 얻어 와도 좋고.”
가주는 덤덤히 말했고.
“네, 알겠습니다.”
정수라가 답했다.
* * *
“그만, 그만해라. 여기 있는 사람을 다 죽인다고 변하는 건 없다.”
기남이 말했다.
안 죽여, 새끼야.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마음을 다잡는데, 기남의 동공이 떨렸다.
“설마, 가주도 비슷한 상태로 만든 건 아니지?”
“뭐?”
“진정해라. 유광익. 이것보다 일을 더 크게 만들지 마라.”
기남이 재차 말했다.
이 새끼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주먹에 힘 풀고.”
진즉에 풀었다. 나 지금 자연체다. 그냥 서 있는 거다.
“심호흡해라.”
아까 했다.
기남이 양 손바닥을 보이며 다가왔다.
“괜찮아. 괜찮아.”
정신병 걸린 광견을 달래는 거니?
“진짜 괜찮아. 흥분을 가라앉혀.”
흥분한 건 잠깐이다.
지금은 더없이 평온했다.
“유광익, 마음을 다잡아라.”
호남이 형도 거들었다.
기남이 다시 말했다.
“유광익, 안 돼. 더는 사람을 죽이지 마.”
쟤네 불멸자야, 안 죽어.
하여간, 김샜다.
“여긴 왜 온 겁니까?”
“가문과 적대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호남은 그렇게 말하며 내가 피떡으로 만들어 둔 경호원을 눈으로 훑었다.
“시비 두 번 붙었다가는 조각이 나는 거냐?”
“그 정도는 아니고요.”
분풀이는 아니었다.
저들은 가문의 경호원, 가주도 내가 한 일을 알 거다.
뒷일 생각 없이 가주를 쥐어패는 대신에 경고를 보냈다.
어설픈 수작질을 하지 말라는 거다.
“가주는 안전한 거냐?”
기남이 물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지키러 가시든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기남이 고개를 저었다.
“유별난 새끼.”
……세상 제일 예민한 새끼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잘했다. 가주에게 위해를 가했다면 경호팀이 움직였을 거다. 네가 쉽게 당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볼 이들도 아니다. 무엇보다 남는 게 없는 일이고.”
나도 이제 어른이 됐다.
옛날처럼 무작정 두드려 팬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정가의 가주 하나가 문제일까.
그가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생각했다.
특수종의 세상은 미친 자들의 세상이고.
이 세상을 다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저런 인간은 수없이 나올 거라는 거다.
우습게도, 저 정가의 가주가 나한테 씨뿌리개가 되라고 한 순간,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 뜯어고쳐 버리고 싶다고.
딱히 대단한 인류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더럽게 마음에 안 드는 것뿐.
뭐, 본래 내가 마음먹은 일이기도 했다.
미친 자들의 세상이니, 나 같은 미친놈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먼저 갑니다.”
난 형제 둘을 놔두고 훌쩍 몸을 돌렸다. 저 둘이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태워다 줄게.”
뒤따라 나온 정수라가 쓰러진 경호원을 보고 놀랐다가 날 보고 말했다.
“됐어요.”
순혈 정가 쪽 사람들하고는 겸상도 하기 싫은 밤인지라.
난 그대로 터벅터벅 걸어 떠났고 아무도 날 붙잡지 않았다.
* * *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말씀하셨다.
괜한 일에 마음을 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자고 일어나면서, 정가고 뭐고 머릿속에서 지웠다.
알게 뭔가.
그 새끼가 그렇게 사는 거겠지.
난 그렇게 안 살 거다.
그리고, 되도록 그런 새끼가 살기 힘든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쓸 거고.
“벌써 그 시즌이네요.”
점심이 지난 나른한 오후의 한때였다.
팬더 대리가 입을 열었다.
“들어올 때 됐지.”
팀장이 뭘 하는지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말했다.
“뭐가 들어와요?”
내가 물었다.
딱히 할 일도 없는 날이었다.
인베이더 퇴치 파견은 어제였고.
최근에 3팀에는 일이 많이 없었다.
물론 여기저기 지원은 나갔다.
인베이더도 잡았고 범죄자도 잡았다.
그래도 일이 많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마윤 상무를 놓친 이후로 보안 2팀에서 미친 듯이 일을 채간 여파다.
“신입.”
내 물음의 대답은 사수가 했다.
“신입?”
“너 후임 받아야지.”
팬더 대리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불멸특수대가 사람을 매년 뽑지는 않는다.
딱히 주기적으로 인원을 충당하지도 않고.
공채로 뽑는 인원도 있고, 특채로 뽑는 인원도 있었다.
내가 들어온 뒤로 이제까지 신입은 없었는데.
후임?
왜일까. 그 두 글자에 심장이 뛰었다.
“신입 받으면 첫 대면에 시발 해도 되나요?”
내가 물었다.
“되겠냐?”
팬더 대리가 실실 웃으며 답했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팀장이 찔리나 보다.
“아닌데요.”
“하, 저거 너무 컸어.”
본래 키는 제가 조금 더 크지 않았나요.
“그러고 싶어?”
사수가 물었다.
“아니요. 농담이죠.”
후임이라, 들어오면 잘해 줄 거다.
시발 말고 환영해 줘야지.
귀여워도 해 주고.
“우리는 특채 한 명 받기로 했다.”
팀장이 말했다.
특채? 순혈인가?
“마법사로.”
팀장이 말을 이었다.
저 양반 나 놀리는 거지?
“……우리 회사에 마법사도 들어옵니까?”
진짜로? 놀리려고 하는 말 아니고?
“그래서 특채지.”
팬더 대리가 거들었다.
세상에는 마법사가 있다.
대부분 숨어 살지만, 각 지역에 연맹을 만들어 활동한다는 건 안다.
알음알음, 몰래몰래 활동하니까 내 코트나 장갑 같은 것도 만드는 거고, 호남이 형도 제 리볼버 쓰는 마법을 배웠겠지.
그래도 그렇지 불멸특수대에 마법사가 들어와?
“세상이 변하고 있어. 이제 마법사도 얼굴을 들이밀고 활동하겠다는 거지.”
변하는 사회를 꿰뚫어 본 팬더 대리의 말이다.
마법사가 할 대외적 활동의 첫 단추가 불멸특수대에서 활동하는 거라는 거다.
“똘똘한 놈이 왔으면 좋겠네요.”
마법사든, 불멸자든 일만 잘하면 될 일이다.
근데 그 마법사가 오면 팀장이 또 갈구려나?
“어설픈 놈이 오면 조져야지.”
나와 눈을 마주치자,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저 양반은 사람 괴롭히는 거에 아주 취미가 붙었다.
마법사가 입사한다는 소문은 금세 돌았다.
공채 입사 시기에 맞춰 들어온다는 말도 들렸다.
난 평소와 다름없이 일했고, 시간을 보냈다.
퇴근하고 할 일이 없으면 가끔 요한 형과 귀태 형을 만나기도 했다.
“미호 보고 싶다.”
술집에 앉자마자 귀태 형이 말했다.
“맨날 보잖아.”
툭하면 찾아가는 주제에 뭘 보고 싶어.
“전화번호는 알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알지.”
안단다.
“용케 전화번호를 줬네.”
내가 아는 우미호라면 절대 안 줄 것 같은데, 물론 나한테는 순순히 번호를 줬지만.
“안 줬어. 인명부에서 보고 저장했지.”
옆에서 요한 형이 덤덤히 말했다.
“……스토커냐?”
이 양반, 조금만 더 하면 신고당하겠는데?
“전화는 안 해.”
귀태가 도리질을 쳤다.
“해도 안 받으니까 의미가 없는 거지.”
요한 형이 다시 덤덤히 사족을 붙였다.
“난 내 여자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귀태 형이 이마를 핏대를 세웠다.누가 당신의 여자입니까. 방귀태 씨.
놔두자, 청춘이다.
술이 한 순배씩 돈 뒤다.
“너 미남 대리랑 썸 안 탄 건 잘한 거다.”
요한 형의 말에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이상형에 근접했지만, 조금 부족했어.”
“부족?”
요한 형이 되물었다.
“성격이 잘 안 맞더라고. 난 낮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요부 스타일이 이상형인데, 대리님은 낮에도 요부 스타일 같더라고. 조금 아쉬웠지.”
“……이 새끼는 진짜 미친 새끼인가.”
요한 형이 감탄했다.
“내 기준은 확고해.”
“신부님이 되지 그러냐? 중이 되거나.”
“나 여자 많이 좋아하는데? 결혼이 내 인생 두 번째 목표야.”
“첫 번째 목표는 뭔데?”
“이상형 만나는 거.”
요한 형은 지그시 날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만 25세 동정으로 마법사가 될 만한 후보 1위다.”
뭐라는 거야.
“미호 보고 싶다.”
이, 미호무새는 술 한잔에 저리 한 번씩 말한다. 대충 무시해 주는데, 술에 취해서 정신이 돌아왔는지, 귀태 형이 오랜만에 멀쩡한 소리를 뱉었다.
“너희 팀 마법사 온다며?”
“그렇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3팀은 비약 인간에 혼혈, 순혈 마법사까지. 변신족하고 초능종만 있으면 종합 선물 세트 되겠다.”
요한 형이 이어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마법사를 우리 팀에 넣는 건지.”
“그 마법사가 강력히 요구했다는데? 한 팀에 있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역시 사내 방송 김요한이다.
어디서 이런 걸 또 듣고 왔다.
“내 미모에 반한 여자인가.”
내가 말했다.
“남자면 어쩌게?”
“여자 아니야?”
“나도 몰라. 마법사들은 원체 제 정체를 잘 숨기고 다니니까.”
꼴깍.
소주잔을 비우며 요한 형이 말했다.
“혼혈 모임이냐?”
한창 마시는 중인데, 정기남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본체만체 지나갈 놈이 어쩐 일로 말을 거나.
최근에 좀 가까워진 기분이 들긴 했다.
아침에 드잡이질도 줄었고, 기남이가 까탈스럽게 구는 횟수도 줄었고.
이전에 제 가주가 날 부른 일로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저 개나리가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합석할래?”
요한 형이 물었다.
기남은 잠시 고민하더니, 알겠다며 자리에 앉았다.
얘가 진짜 어쩐 일이래.
“돈도 많은 놈이 소주냐?”
기남이가 앉자마자 틱틱거리며 말했다.
“돈 많은 거랑 소주랑 무슨 상관이냐?”
“좀 쓰고 살아라.”
잘 쓰고 산다. 이 새끼야.
“마법사가 합류한다고 들었다.”
마법사가 입사한다는 것 자체가 놀랄 일이긴 했다.
정기남이 관심을 가질 정도니.
“가주는 잘 계시고?”
툭 던지니.
“……잘 지내겠지.”
기남의 말문이 잠깐 막혔다.
곤란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다.
“너희 둘은 안 친한 듯 보이면서도 친한 것 같냐.”
우리 둘을 보던 요한 형이 말했다.
우둑.
그 말에 기남이 소주잔을 말아쥐었다.
“말조심하지?”
“아니, 뭐, 그렇다고.”
요한 형이 손사래를 쳤다.
나한테야 너희 기남이, 샌드백 기남이, 개나리 기남이지.
얘가 또 동기 사이에서는 까칠하기로 소문이 났거든.
“호남이 형이랑도 친하고, 기남이도 가깝고. 너 전에는 미호랑도 일했지? 초인싸네, 광익이. 이 정도면 마법사랑도 아는 사이 아니냐? 진짜 광익이 보러 오는 거고.”
그럴 일이 있겠냐?
“내 미모에 반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농담을 툭 던지니, 기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맛 떨어졌다.”
그리고 훌쩍 나갔다.
저 새끼가.
“한잔 먹은 값은 내고 가야지.”
뒤통수에 대고 말하니, 기남이 가운뎃손가락을 보여 주고 유유히 떠났다.
오케이, 넌 오늘 밤에 지옥을 볼 것이다.
눈탱이 밤탱이 예약이다.
“……넌 진짜 저 새끼 안 불편하냐?”
요한 형이 물었다.
“불편할 게 뭐 있어.”
기남이 새끼 뭐, 예민한 고양이 같지만, 상대하다 보면 또 재밌다.
반응이 찰져.
“아, 미호 보고 싶다.”
이 미친 방귀태보다는 낫지.
적당히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갔다.
가끔 수다나 떠는 자리다.
씻고 들어가니 기남이가 안 보였다.
이 자식 봐라. 도망갔네?
전화를 걸었다.
안 받았다. 내일 아침에 보자, 정기남.
자고 일어난 뒤, 기지개 켜고 기남이가 쟁여둔 유기농 시리얼 한 봉지를 다 먹고 출근했다.
가는 길에 1팀에 들르니, 정기남은 오전 일찍 파견 근무를 나갔단다.
“아, 네.”
“기남 씨 자주 찾네, 둘이 친한가 봐.”
“네, 뭐 룸메이트잖아요.”
대강 답하고 자리에 돌아갔다.
“오늘이다.”
드르륵.
오자마자 팬더 대리가 앉은 채로 의자를 굴려 옆에 붙이더니 말했다.
“마법사요?”
“그래. 나 조금 기대된다. 정식 마법사는 처음 보거든.”
“남자래요? 여자래요?”
“여자래.”
“우리 팀이랑 일하고 싶어 요청했다는데 맞아요?”
“너도 들었냐?”
“지나가면서요.”
“루머겠지.”
출근하고 1시간쯤 지나서다.
탕비실에 들렀는데 최미남 대리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광익 씨.”
긴 생머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니, 정말 뇌쇄적인 눈빛이란 이런 거구나 싶다.
안 돼. 이 여자는 개인 아쿠아리움을 가진 수족관 사장님이다.
여기에 빠지면 답이 없다.
“네, 바쁘시죠?”
“아니요. 요즘 한가한데.”
그렇구나. 커피 한 잔 타는데, 날 보며 미남 대리의 눈빛이 느껴졌다.
“평소 저녁에 뭐 해요?”
“운동하고 밥 먹고 쉬고 그러죠.”
“여자친구 안 만나요?”
“여자친구 없는데요.”
“근데 왜 날 찼어요?”
내가 찬 거야?
“농담이에요.”
눈으로 말하자,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말한다. 끼 부리는 거다. 예쁜 여자가 서슴없이 스킨십을 해 주니 가슴이 콩콩 뛰긴 했다.
“네, 뭐.”
“3팀에 전해 줄 서류가 있는데, 같이 가요.”
“네.”
난 미남 대리와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사무실로 향했다.
우뚝.
“광익 씨?”
음?
난 자연스레 발을 멈췄다.
뭐지? 저 익숙한 뒤통수는?
우리 팀 책상 사이에 아는 뒤통수가 보였다.
내 눈썰미는 꽤 좋은 편이다.
그리고 그 좋은 눈썰미로 봤을 때, 저 뒤통수가 여기서 보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통수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사나운 요크셔테리어를 닮은 옆집 이웃 여자 사람.
강혜민이다.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이냐.
네가 왜 여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