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140화 (140/488)

140. 너 그러다 죽어

“정기남, 너냐?”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물었다.

기남은 오늘 종일 파견 근무였다.

그래서 난 집에서 놈을 기다려야 했다.

내 물음에 기남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려는 거냐.”

“너희 집에서 나 보자는데?”

“우리 집?”

“가주가 보자고 했다고.”

“……널?”

“날 보지, 그럼 뭘 보겠냐.”

이 새끼는 일하다가 나사를 몇 개 빼 놓고 왔나.

아그작. 아그작.

난 양파맛 감자칩을 씹으며 답했다.

“가주님이 직접?”

“영상통화로 얘기하자고 한 건 아니니까 아마 직접 오겠지.”

“왜?”

“내가 물을 말이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현관에 서 있던 기남이 돌아섰다.

“야, 어디 가?”

“알 거 없어.”

평소의 그 정기남이다.

떠난 놈을 보며 감자칩을 마저 씹었다.

저 새끼가 아니네.

그럼 가주라는 양반은 왜 만나자는 건지.

고민해서 결론이 나지 않을 때는 고민하지 않는 게 답이다.

난 푹 잤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퇴근 시간에 맞춰 정수라가 날 데리러 왔다.

고급 세단이 회사 앞에 섰다.

“타.”

“네.”

차가 향한 곳은 성북구의 고급 술집이었다.

방마다 방음 시설이 돼 있는지, 종업원들의 발걸음 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비싸 보이네요.”

“싸진 않지.”

“애는 잘 커요?”

“잘 커.”

똑똑.

문에 노크하고 안에서 문을 슬쩍 열자, 정수라가 입을 열었다.

“왔습니다.”

“들어와.”

스으윽.

자재를 뭘 썼는지, 여닫이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안에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갈색 머리칼에 파란 눈의 외국인?

아니, 자세히 보니 알겠다.

혼혈이다. 다만, 특수종의 혼혈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혼혈이다.

서양과 동양의 미모가 적절하게 가미된 외모였다.

“앉지.”

파란 눈깔 불멸자가 말했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순혈, 이쪽이 그 정가의 가주다.

눈가의 주름으로 봐서 나이도 쉰은 훌쩍 넘긴 듯하다.

그래도 불멸자 특유의 동안 외모는 살아 있었다.

“뭐 좋아하나? 오늘은 굴이 좋다고 하는데.”

“네, 굴 좋죠.”

자리에 앉았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문 앞에 섰다.

건장한 체구의 불멸자였다.

“술 하나?”

제가 바로 화림 최고의 주당입죠.

“네, 조금.”

겸양의 말을 남기고, 이름도 모르는 술을 한 잔씩 마셨다.

난 적당히 고개를 돌려 술잔을 비웠다.

이게 바로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란 바른 청년의 모습이다.

“수라의 딸을 구해 줬다지? 애썼네.”

“별말씀을. 해야 할 일이니, 했습니다.”

애가 위험하다. 당연히 구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일 하려고 불멸특수대에 몸담았다.

정확히는 이렇게 일하면서 달달한 보상도 받길 원해서 특수대에서 일한다는 게 더 옳은 말이려나.

술은 적당히 달고 썼다.

입에 착 감기는 걸 보니, 보통 술은 절대 아니고.

“술맛 괜찮지?”

“좋네요.”

시답잖은 얘기가 오갔다.

이 집 굴이 어떻고, 안주 맛은 어떠하며, 여기에 또 겨울에만 먹는 명주가 있다는.

근데 이 양반이 나는 왜 보자고 한 걸까.

친분이나 나누자고 날 불렀을까?

“왜 불렀나 궁금한 눈치인데.”

거, 누가 순혈 정가 아니랄까 봐. 기가 막히게 감 좋으시네.

“네.”

진짜 이상한 일이었다.

가주는 내게 친절했고, 안주와 술 둘 다 혀가 즐겁다 못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좋았는데.

이상하게 불편했다.

가시방석까진 아닌데, 뭔가 품평회에 오른 생선이 된 기분이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네, 그러십쇼.”

“애를 좀 낳아 주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양반이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네?”

되물었다.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짝지어 주고, 그게 아니라면 인공 수정도 괜찮고.”

“네?”

난 어지간하면 당황하는 법이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비밀을 알려 준 이후로 더 그랬다.

그랬는데, 이건 너무 나갔다.

“뭘 하라고요?”

“씨를 좀 뿌려 달라고 했네.”

“농사지으시는구나. 요새 일손이 좀 부족하시죠? 밭이 어딘가요?”

“밭이라고 표현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지. 인연이 있는 수라는 어떤가?”

“저기 선생님, 저 아직 총각입니다.”

애 엄마를 저한테 붙이시면 안 되죠.

속이 타네.

술을 한잔 더 마셨다.

착하고 달라붙던 술맛은 그대로다.

“나이를 맞춰 달라는 거라면…….”

“잠시만요. 잠깐 정리 좀 해도 되겠습니까?”

침묵으로 답을 대신하기에 내가 마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정자은행에 정자를 기부하듯이 기부를 하거나, 장가를 오라는 거죠? 데릴사위로?”

“조금 틀렸다. 혼혈은 데릴사위로 올 수 없으니까.”

“그럼 그, 아이를 낳아 달라는 건요?”

“씨만 뿌려 달란 거지. 이레귤러의 피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자네 같은 경우는 꽤 특별하니까.”

난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다.

그 행위에 꼭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이왕이면 사랑을 전제로 이상형의 사람과 첫날밤을 보내고 싶긴 하다.

“적당히 욕구도 풀고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도 들어줄 생각이 있는데, 돈을 원하나?”

하, 근데 이건 뭐지.

내 더러운 기분의 원인을 알 것 같다.

갑자기 이 가주라는 새끼의 정신 구조를 뜯어 보고 싶은걸.

눈앞에 있는 회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씹으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내가 혼혈이긴 한데 너무 특별하게 잘나서 그 혈통이 이어질지 실험하고 싶다?

그러니 정가의 여자 아무나 붙잡고 그 짓을 해라?

이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가문이라며? 가족 아닌가?

물론 정가는 피를 잇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그거 때문에 외국에 있는 가문과 교류하거나 다른 순혈의 남자나 여자를 들인다는 것도 안다.

그래야 정가의 예민함을 안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 새끼는 지금 제 가문의 여자를 뭐로 보는 걸까.

애 낳는 기계?

순혈 정가는 애들 키워서 불멸특수대나 특임대, 정부 각 부처에 보내는 순혈 공장인 거냐?

“진심으로 하는 말이죠?”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살면서 이렇게 화끈하게 열이 올라온 건 몇 번 안 되는데.

“대가를 치르겠다는 건데.”

가주가 팔짱을 꼈다.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드나 보다.

하하하하.

미안한데 난 당신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데.

꿈틀.

절로 근육이 움직였다.

아, 잠깐 고민해 보자.

내가 여기서 가주에게 쌍욕을 퍼부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고민 끝.

몰라, 그런 거.

피가 끓는다.

변신족의 본능인지, 아니면 내가 이제껏 살며 가진 가치관 덕분인지는 모르겠는데.

“원한다면 정부 부서에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고, 그게 아니라면 빌딩 한 채 살 정도의 돈도 줄 수도 있네. 뭐 바라는 게 따로 있으면 말…….”

“개 같네.”

절로 욕이 나왔다.

“……지금 뭐라고?”

아니, 이제까지는 이런 제안을 다들 순순히 받아들였어?

“퉤.”

씹다 만 회를 뱉었다.

몹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이런 새끼한테까지 예의를 차려야 해?

테러리스트만 개새끼야?

나한테는 얘도 마찬가지인데?

“행동을 조심해라.”

뒤에서 경호원이 말했다.

“조심 안 했으면 지금 누구 대가리 하나는 터졌어.”

눈앞이 붉다. 콧김이 푹푹 나왔다.

짜증이 솟구쳤다.

“원하지 않는군.”

팔짱을 낀 채로 가주가 말했다. 그는 파란 구슬 같은 눈으로 날 주시했다.

“아직 혈기가 있어. 그럴 나이지.”

혈기? 아니, 그래. 내가 혈기도 있지.

근데 혈기 때문만은 아닌데.

이건 내가 살며 채워 넣은 나의 중심, 간지럽지만, 신념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고로, 내가 지키기로 마음먹은 중심축 같은 거다.

애초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서야 이런 짓거리를 할 수가 없지.

아, 진짜 대가리 깨고 싶네.

“손에 쥔 젓가락 내려놔라.”

나도 모르게 힘을 줬나 보다. 젓가락을 쥔 손에 핏줄이 돋았다.

난 한 손으로 쇠젓가락을 중지에 끼워 힘을 줬다.

부드럽게 휜 젓가락을 식탁 위에 놓고.

“부정청탁 방지법 때문에 이런 거 얻어먹으면 안 돼서, 내가 먹은 건 내가 계산하고 갑니다.”

참았다.

이 새끼가 기남이 아빠만 아니었으면 진짜 죽통 날렸다.

나가서 카운터에 얼마인지 물어보고 반만 계산했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니, 이 가주라는 양반의 호위부대인지 세 명의 남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으흠, 그쪽이 유광익?”

그중에 하나가 말을 걸었다.

딱 봐도 시비 걸고 싶은 눈치였다.

“맞는데 누구? 아, 가주 경호원? 기다리느라 고생했네.”

난 모른 척 적당히 거만하게 답했다.

시비, 걸고 싶으면 걸어야지.

사람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지, 참고 막 그러면 안 돼.

그럼 나처럼 지금 열통 터져.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혼혈 따위가.”

아, 너 그거구나.

혈통 우월주의.

나 그거 좋아해. 때릴 때 찰져. 시원해. 기분이가 좋아져.

그리 생각하며 슬쩍 나설 때였다.

“아, 늦었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니, 쌍남 형제가 보였다.

여긴 어쩐 일로 왔을까.

나한테 시비를 건 불멸자가 쌍남 형제를 보더니, 그쪽에도 코웃음을 날렸다.

“버러지끼리 어울리는 건가?”

지금 저 버러지는 날 포함, 쌍남 형제한테도 말한 거지.

그 말을 들은 호남은 미간을 찌푸렸고.

기남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너 그러다 죽어.”

* * *

기남은 가주의 부름을 받았다는 광익의 말을 듣자마자 제 형을 찾았다.

“과장님. 아니, 형.”

“호칭은 하나로 통일해라.”

호남은 개인 단련실에서 벤치 프레스를 하는 중이었다.

“가주님이 광익이를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덜컹.

들고 있던 바벨을 내려놓은 호남이 땀을 닦으며 일어났다.

“네가 아는 유광익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나?”

둘 다 가주라는 사람을 안다.

피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제 가문의 수장이다. 그의 말은 가문에서 곧 법이고 진리다.

가주가 광익에게 제안할 말이야 뻔했다.

가문 밑으로 들어오라 하기에는 유광익이 해낸 일이 보통을 훌쩍 넘었고.

그럼 남은 건 하나다.

조선 시대도 아니고, 아직도 그런 짓이라니.

호남이 수건을 목에 두르며 동생을 바라봤다.

“유광익은 미친놈입니다.”

기남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얼마나?”

“그 ‘얼마나’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요.”

말 그대로다. 기남은 광익이 할 일을 예측할 수 없었다.

좋은 면으로나 나쁜 면으로나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놈이다.

“친구라고 하지 않았냐?”

“누가요?”

이건 걸고넘어져야 할 부분이다. 기남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후, 어디서 만나는지 알아보고 가 보자. 이건 광익이한테도 가문에도 좋게 안 끝날 것 같으니까.”

기남은 광익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지만, 하나는 알았다.

자기가 아는 유광익이라면 그 제안 절대 받지 않을 거라는 거.

그리고 보통 삔또가 상한 유광익은 상당히 미친놈이 된다.

호남은 둘이 만나는 곳을 찾았고, 기남은 그 정보를 듣고 형과 함께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 본 건, 한번 붙어 보자고 시비 거는 가문의 사람과 광익이 대치하는 장면이었다.

기남은 생각한 말을 그대로 뱉었다.

“아, 늦었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오감을 집중하지 않아도 광익의 기분이 꽤 뒤틀려 있다는 게 보였다.

평소의 그 장난스러운 태도가 아니라, 한없이 순수한 눈빛을 보인다.

저건 연기다. 낚시다.

놈은 사냥감을 노리는 중이다.

반대로 정가의 일원이 저리 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해는 한다.

어디서 굴러떨어진 놈이 갑자기 가주와 독대하고 가문의 핏줄 중 하나를 이으라는 특별 취급을 받는다.

거기에 그놈은 혼혈이다.

여기에 하나 더 하자면,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광익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거다.

잘해야 동대문의 구원자, 최근에 좀 잘나가는 신예 정도로 안다.

광익을 아는 기남이야, 노필두를 잡은 건 유광익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디 또 그런가.

이계에서의 일도 그리 퍼지지 않았다.

이것도 아는 사람만 안다.

정보는 제한됐고, 모를 수도 있었다.

다만, 그 대가는 본인이 치러야 할 것이다.

가문의 일원이라고 모두가 친한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호남과 자신은 배척당하는 쪽이다.

“너 그러다 죽어.”

그래도 최소한 경고는 해 줘야지.

그리 말하니.

“맞아요. 그러다 기남이한테 맞아 죽어요. 우리 기남이가 얼마나 무서운데.”

거기서 날 팔아?

하여간 난 놈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건방진.”

그렇게 말하며 경호원이 주먹을 쥔다. 광익은 얌전히 맞았다.

쩍.

광익의 광대뼈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어, 정당방위다. 증인 형제 잘 봤지?”

어, 봤지. 보긴 했지.

툭.

땅을 박찬 광익의 몸이 잔상을 남긴다.

그는 작정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품으로 파고들어 발등을 찍어 부수고, 팔꿈치로 명치를 때린 후 주먹으로 턱을 깬다.

한순간에 불멸자 하나가 떡실신이 됐다. 피를 질질 흘리며 쓰러졌다.

쓰러지는 놈을 보며 광익이 나머지 경호원 둘을 바라봤다.

광익은 성이 차지 않는 모습이었다.

“조금 부족한데,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나지 않습니까? 나 더 해도 되는데, 한 대씩 더 맞아 줄 용의도 있는데.”

“아니, 사양하죠.”

여자가 먼저 발을 빼고.

“임무에 충실해야 해서.”

남자는 아예 물러났다.

“아, 음, 아.”

광익은 그 둘을 보고 몹시 아쉬워했다.

기남의 광익의 미친 상태에 나름 기준을 뒀다.

그냥 미친놈.

많이 미친놈.

제대로 미친놈.

지금 상태는 제대로 미친놈 상태였다.

고로 말려야 했다.

놔두면 진짜 가주 뚝배기를 깔지도 몰랐다.

“야, 그만해.”

기남이 나섰다. 사태를 수습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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