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132화 (132/488)

132. 싸움은 장비빨

난 왼손바닥을 방패처럼 들었다.

휘잉, 훙, 훙.

허벅지에 감겨 있던 뱀이 머리를 치켜든다.

왕자가 선물한 장갑의 은하수 방어로 막고, 스트레이트.

후속 공격을 막으며 발을 걸고, 초근접전을 시도.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상대를 제압할 여덟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상대가 든 무기 형태는 채찍.

중장거리 무리다.

몸에 양쪽 균형이 미묘하게 다른 거로 봐서는, 한쪽에 권총 따위를 차고 있을 확률도 높았다.

그게 아니라면 무게감이 있는 나이프 정도.

상대의 무기와 자세를 보는 거로 습관이나 공격 패턴 따위를 머릿속에 담은 뒤, 곧바로 잊었다.

그저 한번 훑어서 넘기는 거로 충분하다.

상대를 머릿속에 정형화하면 변수에 대응하기 어렵다.

툭.

왼발을 내밀었다.

공방을 교환하기 직전.

“그만.”

탁.

박필로 팀장이 한 손을 금속 채찍의 끝을 향해 펼치고, 반대 발로 내 발끝을 막으며 말했다.

“여기는 불멸특수대입니다. 문제 일으키고 싶습니까?”

박필로 팀장이 재차 말했다.

여자의 눈썹이 0.1mm 정도 씰룩였다. 참 표정 변화 없는 친구일세.

“내가 먼저 한 거 아닙니다.”

여자가 말했다.

어쭈, 그럼 내가 먼저 했냐?

“유광익, 넌 잠깐 나 좀 보자.”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허공을 멍하니 보던 여자의 시선이 날 본다. 난 피식하고 웃었다.

“짜증.”

여자는 날 힐끗 보고는 제 무기를 다시 허벅지에 칭칭 감으며 읊조렸다.

너 혹시 정기남 누나냐?

순혈 정가라며?

염병, 쌍남 형제에 미친 누이가 하나 더 왔네.

박필로 팀장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난 순순히 끌려나갔다.

“유광익.”

“네, 말씀하십쇼.”

그래, 솔직히 내가 조금 흥분하긴 했는데.

그게 꼭 내 잘못이라고 보긴 어렵단 말이지.

저게 먼저 도발했잖아.

근육의 긴장도, 자세, 회의실 내 위치, 눈빛, 경계하는 태도.

전부가 도발적이었다. 수틀리면 단숨에 셋 다 제압하겠다는 오만한 도발.

날 보자마자 자신을 관찰하는 눈을 거두라 말하기까지 했다.

‘눈깔’이란 두 글자에 그런 의미가 서려 있었다.

여긴 우리 집 안방이다.

순혈 정가의 앞마당이 아니라.

콧김을 훅 뿜었다.

이건 내가 변신족이라서 이렇게 흥분하고 그런 게 아니라, 쟤가 좀 오버했다니까?

“순혈 정가면 우리가 접고 가 줘야 합니까?”

박필로 팀장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광익, 너 원래 이런 캐릭터냐?”

박필로 팀장과 눈을 마주쳤다. 사고뭉치를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기에 오해를 풀어줬다.

“쟤가 먼저 그랬는데요.”

손가락으로 회의실 안을 가리켰다.

문이 닫혀 있는 게 아쉽다. 열려 있었으면 방음이 안 돼서 내 목소리도 들어갔을 텐데.

어쩐지, 심 대리가 문을 야무지게 닫더니만.

“누가 먼저 쳤니가 중요해?”

“아니, 제가 먼저 한 게 아닌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프로처럼 하자.”

“네.”

내민 입술을 넣지 않자, 박필로 팀장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해 좀 해 주자. 순혈 정가 애들이 본래 저러기도 하는데, 지금 상황이 안 좋기도 하고 그러니까. 나도 알아, 저쪽이 실수한 거야. 그런데 이걸 일일이 따지면 일이 안 돼. 말한다고 변할 애들도 아니고.”

박필로 팀장이 날 살살 달랬다.

“눼.”

입술을 도로 넣었다.

“그래, 싸우지 말자. 알았지?”

팀장이 새끼손가락까지 내밀면서 약속이라고 말하면, 왠지 손가락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박필로 팀장의 눈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눼눼.”

다시 대답했다.

그래, 참자. 나 유광익, 어른이다.

호적상으로도 어른이고, 동기 사이에서도 내 정신 연령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방귀태나 김요한을 보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내가 더 형 같다.

“좋아. 들어가서 바로 브리핑한다.”

다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죠. 이쪽은 유광익 사원입니다.”

순혈 정가에서 나온 개나리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순혈 정가에서 나온 정수라.”

이름과 딱 어울리는 친구다. 수라처럼 시비 걸기 좋아하는 개나리구나.

이제부터 넌 개나리 수라다.

“자, 이제부터는 싸우지 말고.”

“그럴 생각 없습니다.”

개나리 수라가 말했다.

“애가 덤빈다고 같이 싸우면 어른이 아니죠.”

내가 답했다.

다시 개나리 수라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 사이로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박필로 팀장이 시야를 가로막고 섰다.

“브리핑하자. 심 대리.”

“네.”

심무용 대리가 홀로그램 지도를 띄웠다.

“팀원 중 하나가 연락이 끊겼습니다. 잠입 임무 중이었고, 위치는 여기.”

심 대리가 지도 중 한 곳을 가리키자, 홀로그램이 확대됐다.

서울이 아니다. 제주도다.

“순혈 정가의 일원 중 하나가 납치됐고, 그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잠입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일반 기업으로 꾸몄지만, 미친 과학자 집단 시설이 아닌가 의심 중에 있다.”

팀장이 이어 말했다.

브리핑은 짧았지만, 알아야 할 건 다 있었다.

구출 구조 작전이었다.

코드명 아델.

하고 많은 코드명 중에 아델이라니.

잠입 요원이 노래 좀 하나 보다.

어쨌든, 그 아델 요원의 연락이 두절됐고.

불멸특수대는 요원 구출팀을 꾸리기로 했다.

조건은 소수 정예일 것.

박필로 팀장은 제 팀원을 위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남명진 사장의 직속부대에도 지원 요청했지만, 그건 불가, 대신 사장은 날 추천했다.

제 직속팀에도 나만큼 치는 불멸자가 없다고 했다던가.

본래 그 요원의 목적이었던 순혈 정가의 일원을 구하는 것까지가 목표였다.

“이상.”

박필로 팀장이 회의를 끝냈다.

어째, 빨리빨리 진행한 기분이 드는걸.

“가자.”

심 대리가 날 끌고 나갔고.

팀장과 개나리 수라가 회의실에 남았다.

난 나가다가 슬쩍 발을 뒤로 밀어, 문이 닫히는 걸 막았다.

“가자고.”

심 대리가 재차 미는 힘에 몸이 밀렸다. 그래도 문이 늦게 닫히긴 했다. 귀를 쫑긋 세웠다.

개나리 수라의 목소리가 들리다 말았다.

“내 ㄸ…….”

분명 쌍디귿 발음이었는데 다음이 뭘까.

문이 닫혔다.

분명 뭐가 있는데.

아무리 순혈 정가라지만, 여기서 깽판을 칠 순 없다.

가문과 정부는 불가침이 원칙이긴 하다.

나도 알 건 안다. 가끔 귀태 형, 요한 형과 퇴근 후 술자리를 갖곤 했는데, 그때 들은 얘기가 있었다.

“순혈 정가 애들은 다 저래?”

순수한 호기심을 담아 물었고.

“넌 그런 것도 모르냐? 아빠가 그런 거 안 알려 줬어?”

“그거 패드립이지?”

주먹을 쥐며 말하자, 요한 형은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니다.”

“오늘 술값 쏴.”

“……와, 있는 놈이 더 하다더니.”

포상금을 왕창 받은 건 사내에서 알 사람은 다 알았다.

하여간 요한 형을 통해 들은 얘기다.

순혈 불멸자의 가문 중 현재 존속되는 곳은 둘, 그중 하나가 바로 예민함 가득한 정가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도 비슷한 피를 잇는 가문이 있다고 하고.

이들의 위치는 다 비슷하다고 들었다.

권력, 즉 올드포스의 간섭을 받지 않는 대신, 각종 혜택을 받는다는 것.

가령 면세라든지, 그 외에도 여러 의무에서 자유롭다. 대신 이들은 제 가문의 일원을 불멸특수대에 보낸다고 들었다.

이들의 의무는 하나뿐.

나라를 위해 싸울 불멸자를 공급하는 것.

이렇게 말하니까 가문이 무슨 공장 같긴 하네.

자세한 건 모른다.

기남이한테 집안일을 물어보면 완벽히 무시하니, 할 말도 없고.

그럴 때면 기남이도 내 아버지에 관해 물었는데.

사실 나도 할 말이 없긴 하다.

보통 분이 아닌 건 분명한데.

그냥 고위급 공무원이라고 말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좀 많아야지.

어쨌든, 내가 아는 순혈 정가는 여기까지다.

그러니까 기고만장해서 불멸특수대에서 깝칠 정도는 아니란 거지.

“대리님.”

“응?”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해서 식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순혈 정가 일이잖아요.”

“그런데?”

“호남이 형이나 기남이는 안 가요?”

가문의 일인데, 가문의 일원이 빠지다니.

“……정호남 과장님한테 형이라고 불러?”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심무용 대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왜?”

“친구 형이니까?”

“기남이랑 광익 씨가 친구야?”

“네.”

나와 기남이의 관계도 알 사람은 다 안다.

“기남이가 속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이번 신입이 이상한 건지.”

“그냥 평범한 동기이자, 친구죠.”

난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까칠하긴 한데, 아버지 말씀이 맞았다.

사람은 오래 봐야 한다. 기남이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다.

생각보다 배려심이 깊다.

날 위해 욕실 청소도 매일 그렇게 열심히 한다.

결벽증 있는 놈이랑 사는 게 이렇게 편한 줄은 몰랐다.

가스레인지에 뭘 묻혀 놓으면 기겁하며 닦아 놓곤 하는 친구다.

“뭐 물어봤었지?”

“자기들 가문 일인데 왜 그쪽이 안 오냐고요.”

“말하면 복잡한데, 이거 순혈 정가에서 공식으로 요청 온 일이 아니야.”

“네?”

“개인이 요청했다는 거지. 아까 그 정수라 씨가 의뢰한 거고.”

“세계 정부 연합, 올드포스 직속, 대한민국 행안부의 휘하, 불멸특수대 화림정보통신이 개인 의뢰도 받습니까?”

“거창하네. 필요하면 받기도 하지. 광익 씨는 1팀에서 제일 지원을 많이 나가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데?”

“인베이더 처리?”

“설마.”

말하며 심 대리가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윗분들 경호. 뭐, 꿀도 빨고 돈도 버는 일이니까. 권력자나 재벌 같은 양반들은 고가의 경호를 원하거든.”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 아직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불멸특수대도 돈이 필요하고 권력에 순응해야겠지만.

세상에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곳 하나쯤은 있으면 어떨까 한다.

낯간지럽긴 한데, 제 밥그릇 챙기면서 정의 운운하는 곳 말이다.

“그럼 저 말고 시, 이중봉 팀장님은요?”

그쪽은 잠입 및 근접전을 비롯한 어지간한 임무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박필로 팀장님이랑 광익 씨 팀장님이랑 같이 일이 되겠어? 프로들이니까 일은 하겠지만, 아우, 난 그거 보고 싶지 않네. 어지간하면 안 보고 싶어. 진심으로. 특히 이중봉 그 새, 팀장님은 나도 별로야.”

“그 새끼라고 하셔도 됩니다.”

심 대리가 하려던 말을 내가 끝맺어 줬다.

“광익 씨도 시발 팀장 해도 돼.”

대리님이 눈웃음을 보였다.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냐고?

쉽다. 공동의 적을 씹었다.

사내 식당에서 한우 투플러스 스테이크가 나왔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고가의 식단이 나오기도 한다.

일주일에 한 번쯤?

괜히 복지 팔만대장경의 회사가 아니다.

“먹읍시다.”

구출 작전은 한시가 급하지만, 그렇다고 준비가 소홀하면 안 된다.

잘 먹고 무장 잘 챙겨서 가야 한다는 소리다.

미디움 웰던으로 구운 소고기의 핏물이 나이프가 썰린 자리로 스며 나온다. 그걸 한입에 넣고 씹으니,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을 날뛰었다.

수비드 방식으로 익히고 그 뒤에 숯불로 구운 걸까?

어지간한 미식가 뺨을 때리는 불멸의 혀가 만족감을 표했다.

내가 다른 건 모르겠는데, 화림 사내 식당 주방장은 진짜 받들어 모실 거다.

어머니가 화내실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끓여 주신 된장찌개를 제외하고는 이쪽 주방장이 만들어 준 요리들이 단연 압권이다.

된장찌개야, 어쩔 수 없고.

그건 집에서 어머니가 끓여 주는 게 최고다. 김치찌개도 그렇고.

입이 즐거웠다.

맛있게 잘 먹은 후에, 사내에 있는 스펠 기어 엔지니어에게 내 코트가 이상 없다는 확인도 받았다.

헥사곤 필드 코트, 갤럭시 필드 장갑, 4번 타자 아다만티움 샷건, 발도 전문 아다만티움 칼날 정글도, 저격 전문 웨어러블 기어, 와이어 품은 보위 나이프.

이게 내 커스터마이징 장비다.

어쩌다가 이렇게 장비가 든든해졌지?

하나둘 선물 받다 보니 이렇게 됐다.

심 대리가 내 장비를 보더니 물었다.

“그게 다 광익 씨 거야?”

“네.”

“……재벌이세요?”

만든 의도를 떠나서 하나하나가 억대로 호가하는 장비로 추정된다.

특히 통짜 아다만티움은 다시 녹여서 써도 돈값을 한단다.

그래도 난 내 4번 타자가 좋은 걸, 이게 또 그립감이랑 타격감이 죽여준다.

탄이 너무 비싸서 문제지.

“아니요. 소시민인데요.”

“몸에 지닌 거 다 팔면 작은 상가 하나는 그냥 사겠는데? 명품 이상으로 둘렀네.”

“대리님, 그거 모르십니까?”

“뭐?”

“싸움은 장비빨입니다.”

심 대리가 인정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맞는 말이지 뭐.

불멸의 3대 무기가 마약, 감각, 재생이라고 했던가?

그 3대 무기 위에 장비가 있다.

고가의 장비를 몸에 둘둘 두르는 거야말로, 불멸자가 꿈꾸는 최고의 무기가 아닌가.

“부럽네.”

심 대리가 중얼거렸다.

거, 눈독 들이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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