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평범한 월요일의 시작이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거하게 저녁 식사를 해치운 일요일 오후 저녁이다.
아버지가 식탁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엉망이 된 식탁이 보였다.
우리 셋은 전쟁과도 같은 식사를 끝냈다.
오늘 베스트 메뉴는 통삼겹살 오븐구이였다.
아버지, 어머니 입가가 번들거렸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나도 마찬가지일 테고.
“출장 다녀와서 피곤한데 뭘 해요.”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집에 있는 건 뭐 쉬운 일인가. 집안일도 힘들고 피곤한 겁니다.”
아버지는 고집을 부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하듯 깨가 쏟아졌다.
둘의 눈에서 반짝거리는 러브 광선이 쏟아졌다.
오늘 둘째 보시겠네.
“동생 이름은 유산균 어떻습니까?”
“넌 동생 이름을 그렇게 짓고 싶니?”
어머니가 날 나무랐다.
“하긴, 여자애라면 좀 그렇겠네요. 유산슬이라고 할까요?”
“아들, 애 낳으면 꼭 작명소 가라. 절대 직접 이름 짓지 말고.”
아버지가 내 어깨를 잡고 말했다.
“네. 반드시.”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우리가 아들을 너무 곱게 키운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곱게 키웠으면 아들이 천국 문도 두드리지 않았을까요?
그동안 삶이 머릿속을 스쳤다. 요단강을 레일 삼아 왕복으로 몇 번은 헤엄친 것 같은데.
“잘 먹었으니,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밥 잘 먹고 요단강에서 반신욕은 하기 싫었다. 난 내 할 일을 찾았다.
“굳이 하겠다면야.”
아버지가 고무장갑을 가져다줬다.
어머니는 그릇을 겹쳐서 싱크대에 두며 말했다.
“기름기는 키친타월로 잘 닦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저도 자취 생활 반년이 넘었습니다. 소자, 이제 설거지 좀 합니다.”
난 실력 발휘를 위해 고무장갑을 꼈다.
키친타월로 기름 닦고 싱크대에 물을 받아 그릇을 불리고, 수세미를 적시고 세제를 짠다.
쭉, 적량의 세제와 물이 만나 거품이 만들어져 몽글몽글해졌다.
고소한 곡물 향이 코를 찔렀다.
세제에 무슨 이런 향을 넣나.
괜히 먹고 싶게.
“그럼 아들 수고.”
“네이 네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사뿐하게 밖으로 나가셨다.
두 분의 오붓한 저녁 산책, 자주 있는 일이다. 난 싱크대의 물기를 닦고 행주를 팡팡 털어서 널어 둔 뒤에 소파에 앉았다.
피로 따위는 없었다.
이 몸뚱이가 어떤 몸뚱이인가.
불멸과 변신이 만든 최고의 걸작 아닌가.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제 서로를 알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두 분 다 참 꺼리시니, 말 꺼내기가 껄끄럽다. 폭탄선언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데, 그러다 두 분 사이가 멀어지면?
아오, 진짜 싫을 것 같은데.
출장 간다고 툴툴대다가도, 어머니는 아버지 얼굴만 보면 녹은 아이스크림이 됐다.
왜 그렇게 아버지가 좋으시냐고 물으니.
“일단 잘 생겼잖아.”
그게 이유야?
사랑에 외모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네, 뭐, 아예 무시할 순 없지.
다 자기만의 심미안이 있고 타입이 있는 법이니까.
내 눈에 예쁘면 된다는 거다.
“네 아빠 몸도 좋아.”
아들 앞에서 그런 말은 안 하셔도 좋은데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저 찬란한 금슬을 내가 깨도 될까?
애초에 서로 숨기는 것 없이 살면 어머나 좋을까.
고민해서 뭐 하나. 언젠가 말할 때가 오겠지.
적당히 서로 눈치채면 더 좋고.
부르르-
TV를 볼까, 아니면 배를 깔고 뒹굴뒹굴할까 고민하던 참이다.
미뤄뒀던 웹소설이나 볼까.
즐겨보던 작가가 왕국을 키우는 소설을 썼다. 나름 내 취향이라 꽤 재밌게 읽는 중이었다.
이미 완결 난 거라 기다리지 않아서 좋기도 하고.
특히나 이 작가의 네이밍 센스가 내 타입이었다. 크르르 운다고 이름을 크르르라고 짓는다. 참 미친 새끼 아닌가.
막 그리 폰을 여는데, 부르르하고 진동과 함께 메시지가 왔다.
혜민이었다.
[광기의 강혜민] 집이지? 나와.
[나] 우리 집에 카메라 설치해 뒀냐?
[광기의 강혜민] 단지에서 시부모님 마주쳤거든.
[나] 시부모님? 너 벌써 결혼했어? 이제 스물 아니냐? 요새 애들 빠르다더니.
[광기의 강혜민] 니네 엄빠 봤다고.
말하는 싸가지 봐라.
얘는 참 애가 안 변한다.
[나] 우리 혜민이 공부만 못하는 줄 알았더니, 기본 지식도 많이 부족하구나.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이웃사촌 부모님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란다.
[광기의 강혜민] 아, 나오라고. 얘기나 하게. 나 안 보고 싶어?
[나] 술 마셨니? 나 바쁘다.
[광기의 강혜민]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간다. 바쁘긴 뭘 바빠, 또 바닥에 배 깔고 웹소설이나 보고 낄낄거리고 있었겠지.
이 새끼 봐라. 진짜 카메라 달아 뒀나.
귀찮긴 한데, 안 본 지 꽤 되긴 했다. 더 못 보면 우리 혜민이 상사병으로 앓아누울라.
일어나서 대강 바지와 티, 바람막이를 챙겨 입었다.
주둥이에 묻은 기름기도 닦았다.
놀이터로 오라기에 그쪽에 가니, 그네에 앉은 광기의 강혜민이 보였다.
“여, 아직 제정신은 아니지?”
“뭐라는 거야. 오랜만에 내 얼굴 봤으면 키스부터 해 줘야지.”
“우리가 이전에는 키스하는 사이였던가?”
“오늘부터 그런 사이가 되도 난 괜찮아. 준비됐어.”
“우리 혜민이 열 있니? 너희 어머니한테 전화할까? 구급차 부를까?”
“짜증 나.”
“난 짜증 안 나.”
“재수 없어.”
“난 신나.”
“사람 놀리는 데는 아주 타고났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그쪽으로는 독보적이지.”
넌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에 팀장이란 새끼가 있는데 회사 내에서 악명이 자자하거든?
내가 그 양반도 놀려먹는 사람이다, 이거야.
정기남은 뭐, 디저트고.
우미호랑 요한 형이나 귀태 형은 별미 정도?
“됐어. 너 혹시 여자 생겼니? 연애해? 회사에서 썸 타?”
“매일 생기는 중이고 썸 타는 사람은 각 팀에 두 명씩 있지.”
“농담하지 마라.”
말하는 혜민의 눈이 빛났다. 그 안에 담긴 광기가 보였다.
소름이 돋았다. 가끔 보면 얘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불멸자나 변신족은 아닌데 말이야.
“없어. 자식아.”
머릿속에 최미남 대리가 스쳐 갔다. 그녀가 보낸 무수한 녹색 시그널.
그래도 아닌 건 아니지.
그 순간이야 나도 모르게 혹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아닌 건 아닌 거다.
실제로 이계에서 복귀했을 때, 미남 대리가 저녁 먹자고 했고.
난 그걸 거절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 타입 아니라고.
미남 대리는 꽤 충격받은 것처럼 보였다.
근데 문어발은 진짜 내 타입 아니다.
요한한테 들을 것도 없었다. 정기남, 남한테 관심이 요만큼도 없는 그 정기남도 최미남 대리를 알더라.
기남 자신한테도 호감을 보였다고.
문어발은 질색이다. 고로, 난 여자가 없다.
까칠이나 애주가 과장, 사수가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애인은 아니잖아.
“이 오빠가 기준이 조금 높아요.”
내가 눈가에 손날을 올리며 말했다.
“좋아. 그럼 됐어. 그래야 내 남자지.”
“어디서 내 혼삿길 막는 소리를 막 하는 거냐? 혜민아, 나도 진지하게 하나만 물어보자.”
“말해.”
혜민이 자세를 다소곳하게 고쳤다.
이거 물어보기 미안하네.
얘가 작년에 수능을 봤다.
“수능 몇 점?”
“……그게 궁금하냐?”
어금니를 까드득 갈진 않았지만, 혜민의 눈빛은 당장 날 찢어 죽일 것 같았다.
“한때 네 스승이었던 사람으로서 무척이나 궁금하구나.”
“진짜 진심으로 말하는데, 죽어 버려.”
말하고 혜민이 하이킥을 날렸다. 깔끔한 상단 차기다. 애가 공부는 못하는데 발차기는 참 잘해요.
난 손바닥으로 가볍게 발등을 받아 내고 밀었다. 균형을 잃은 혜민이가 뒷걸음질 쳤다.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그러다 기우뚱하고 몸의 균형을 잡는다. 허리를 반쯤 뒤로 꺾고 턱을 당기며, 혜민이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안 잡아 줘?”
“잡으면 엘보가 날아왔겠지.”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는 아니잖니?
“쓸데없이 날카로워.”
“업무 처리가 날카로워서 칭찬을 많이 듣는 편이지.”
“흥. 됐다. 하여간 딴 여자 만나지 마라.”
“그건 네가 결정하거나 참견할 일이 아니고요. 수능 몇 점 맞았나 그거나 말하세요. 대학 가면 인기 초절정 미녀가 되리라 호언장담한 옆집 사는 강혜민 씨.”
“싫어.”
“좋아. 그럼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냐?”
혜민 어머니는 학구열에 목숨 거는 유형은 아니지만, 남에게 뒤처지는 걸 즐기시는 분도 아니지.
고민하던 혜민이 말했다.
“일주일 가출했었어.”
“응?”
“엄마가 날 죽이려고 했었단 말이야.”
풉.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눌렀다.
“개새끼.”
혜민은 그런 날 향해 진심을 고백하고 탁탁탁 뛰어갔다.
그래, 건강하게 컸으면 됐지.
공부 그게 중요하냐?
다만, 어디서 나한테 과외받았다는 말은 하지 말아다오.
치욕이니까.
아, 평화롭다.
그래, 사는 건 이런 맛이지.
그네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운 달빛이 땅을 비췄다. 기온이 뚝 떨어졌다.
어느새 계절이 또 변하는 중이다.
끼익.
그네를 탔다. 바람을 맞으며 행복을 만끽했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지.
툭.
쌩쌩 날던 그네를 한 발로 멈췄다.
그네가 움직이던 운동 에너지를 소화해 낸 다리 근육이 움찔하고 부풀었다.
우레탄 바닥에 발자국이 남았다.
이런 삶도 나쁘진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자 하는 일을 외면할 생각은 없다.
재능은 쓰라고 있는 거다. 더구나 나도 안다.
난 특별하다. 규격 외의 재능을 타고났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안다.
순혈의 불멸보다 우월하며, 인베이더 무리 사이에서도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인다.
이게 특별한 재능이 아니면 뭐겠는가.
“아들, 동심 폭발 중이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와 팔짱을 낀 두 분이다.
“아뇨. 혜민이 봤어요.”
“우리 며느리가 포기를 모르는구나.”
“그러게요.”
“혜민이가 들으면 상처받아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혜민이 날 쫓아다니는 건 아파트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내가 번번이 차는 것도.
“너도 여자애 마음에 상처 주면 안 된다. 그럼 엄마 마음이 매우 아플 거야. 그러니까 어서 여자친구 만들라고 했잖니.”
엄마 마음이 아프면 안 되지.
그럼 링에서 엄마랑 데이트다.
여자친구라고 하는데 왜 자꾸 최미남 대리가 생각나냐.
사실 별 사이는 아닌데.
크, 진짜 외모는 이상형에 가까웠는데, 이번에는 성격이 문제다.
“네이 네이, 알겠나이다. 어마마마.”
농담으로 넘기고 우리는 나란히 집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함께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해 영화를 봤고 푹 잔 뒤, 월요일 아침에 출근했다.
아버지와 함께 나서는 길에.
“아들, 너무 나서지 말고.”
걱정 어린 말을 해 주셨다.
“네, 아버지 출장 좀 줄이시고요.”
“그래도 최근에는 엄마 컨디션 괜찮더라. 전처럼 우울해하지도 않고.”
“네, 그럼 다행이죠.”
그게 다 누구 덕이겠습니까? 아버지.
제가 마리를 투입한 결과 아닙니까.
인사를 나누고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오랜만에 집에서 가는 출근 코스였다.
일찍 출발했더니, 사무실에 사람이 없었다.
기남이는 집에 왔으려나.
이계와 달리 이쪽 회복실에는 치료에 관한 장비가 많다. 팔 하나쯤이야, 자연 치유도 아니고 이제 슬슬 나을 때가 됐지.
자리에 앉아있으니, 곧 사수가 출근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왔네.”
그 뒤에는 팬더 대리가 휘파람을 불며 왔다.
“기분 좋은 일 있습니까?”
“어제 랜덤 박스 대박 터짐.”
랜덤 박스?
“게임 얘기.”
사수가 부연설명을 해줬다.
이 양반은 모바일 게임 중독자다.
마지막으로 팀장이 왔다.
“회사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일찍 다니냐? 정시 출근해. 월급 더 안 준다.”
평소와 같은 팀장의 모습을 보며 난 슬그머니 다리를 뻗었다.
주말 내내 일 없으면 기척 돌리기만 연습했다.
원리는 터득했다.
기본적으로 두 개의 비기를 섞어 쓰는 거다.
왼팔 전완근에 힘을 주며 기척을 흘린다. 기척 속이기다. 일종의 페인팅.
동시에 왼발을 뻗으며 기척 죽이기.
왼손으로 기척을 흘리고 왼발에는 기척을 죽인다.
보통 어려운 게 아닌데, 난 그냥 됐다.
하니까 그냥 된다. 실험 삼아 해 봤는데 된다. 진지하게 한 것도 아니었는데, 되길래 연습했고.
지금은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었다.
내 자리는 보안 3팀 입구 바로 옆, 누구든 안으로 들어가려면 내 옆을 통과해야 했다.
팀장이 내 왼손을 힐끔 보면 입을 연다.
“이 새끼는 왜 아침부터 지…….”
툭.
말하다가 내 왼발에 걸렸다.
평소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팀장이 앞으로 기우뚱 균형을 잃고 통통 외발로 뛰었다.
그 와중에 균형을 잡네.
무엇보다, 이게 되네?
불멸 비전 기척 돌리기 성공.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시에.
“하하하.”
팀장의 웃음이 들린다. 그는 웃으며 자기 자리로 가더니 서랍을 뒤적였다.
“광익아, 튀어.”
팬더 대리가 말했다.
“네?”
팀장이 서랍에서 폴딩 나이프를 꺼냈다. 착- 하고 칼날을 세우고, 팅팅 손가락으로 몇 번 나이프를 튕긴 팀장이 날 바라봤다.
“그래, 죽자. 너 죽이고 나도 사직서 쓸란다.”
“장난입니다.”
말하면서 내뺐다.
툭, 파티션을 넘어 옆자리 1급 사원의 책상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쉭.
내 뒤로 나이프가 공기를 갈랐다.
“야! 너희는 아침부터 왜 지랄이야!”
요새 한창 예민한 외부 보안 2팀장이 출근하며 외쳤다.
평범한 월요일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