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청학동 에이스가 돼서 돌아왔다.
내가 없는 동안, 블랙홀 이상 현상이 터졌다.
홀 생성 개수가 늘고, 겹문이라 나오는 인베이더 숫자가 늘어서, 대응팀도 덩달아 늘어야 했다.
사람 손이 부족한 시기였다.
경찰 특수대 PWAT는 잠도 못 자고 사이렌을 울리며 서울 시내를 싸돌아다녔고.
불멸특수대도 마찬가지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출동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다 하다 안 돼서 엑스큐라시 쪽 민간군사기업도 고용했다고 한다.
화림도 정신이 없었다.
신입, 사원, 대리, 과장, 팀장, 부장까지 일선에서 뛸 수 있는 사람은 다 나갔다.
그게 팀장의 눈 밑이 까만 이유다.
하지만 사수의 눈 밑이 까만 이유는 좀 달랐다.
이 난리 통에 불멸교도 마윤 상무, 그러니까 내가 이전에 된통 엿을 먹인 그 양반이 탈옥했다.
화림 내 수감 시설에서 감옥으로 이송할 때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운도 억세게 좋은 양반이지.
마침 이송 차량 앞에 홀이 터졌고.
지원군을 부르며 버티는 사이, 마윤 상무는 도주했다.
몸에 갖가지 추적 장치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을 잔뜩 먹여 놨음에도 그는 도망갔다.
더구나 도주한 뒤, 추적 장치도 금세 제거했단다.
혼자 도주할 몸 상태가 아니었으니, 조력자가 있는 건 당연했다.
유력한 조력자로 프로메테우스를 의심했고.
사수는 그 흔적을 쫓느라 밤을 지새웠다.
“고생들 하셨네.”
난 팀원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탈옥도, 이상 현상도, 지금은 상당히 잠잠해진 상태였다.
“원래는, 너 돌아오면 꿀 빨고 와서 좋냐고 물어보고 싶었거든.”
팬더 대리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근데 뭐, 할 말이 없다. 개척 4팀에서 네가 해 준 일, 공적으로 계산해서 팀에 넣어 준다고 하더라. 근데 그게 우리 1년 치 MBO를 넘었다.”
난 팬더 대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거만하면 안 된다.
“그렇군요.”
단순한 호응이면 충분했다. 팀장은 말이 없었다.
“팀장님.”
“왜?”
“그렇답니다.”
“뭐가?”
“1년 치 MBO.”
“……그래서 어쩌라고.”
“1년 치 MBO.”
난 똑같은 말을 똑같은 어조로 반복했다.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거만하면 안 된다.
“하, 미친.”
“1년 치 MBO.”
세 번째 같은 말을 하자, 팀장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적당히 해.”
팬더 대리가 말렸다.
난 날이면 날마다 이런 기회가 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원 혼자 1년 치 MBO를 따왔는데요?”
겸손하되 할 말은 하고 사는 것, 그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참된 청년의 자세가 아닐까?
팀장은 입술을 삐죽거리다 말했다.
“잘했다. 아주 자아알했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사람의 마음에 충족감을 준다.
음, 괜찮네.
팀장의 칭찬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들을 건 들어야 했다.
“아, 시발, 겁나 잘했네. 내가 너무 대단한 사원님을 모시고 있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할 말이 없어. 큰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지.”
“아, 그렇게까지 하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까득.
팀장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음, 더 건드리면 미친개가 되겠군.
게이지가 가득 차기 직전이다.
사수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팀장을 외면하고 사수를 바라보자, 사진 한 장을 툭 건넸다.
“너한테 남기고 간 쪽지.”
마윤 상무는 도망가며 친히 러브레터도 썼다.
이송 차량 벽에 피로 쓴 혈서였다.
[유광익 잊지 않으마]
“이 양반 과거력 조사해 봤어요? 범죄 경력 같은 거?”
내가 물었다.
“왜?”
사수가 눈을 깜빡였다.
“분명 스토커였을 것 같아서요.”
사람이 너무 집요하면 매력이 없는 법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범죄자가 되는 법이다.
불멸교도 마윤은 범죄 수준의 집요함을 가졌다.
사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꽤 재밌는 농담이었나 보다.
“말 하나는 청산유수지.”
내 한마디에, 팀장은 조금 전 화를 내려던 건 잊은 채 낄낄거리며 말했고.
팬더 대리는 대놓고 피식 웃었다.
꽤 큰 목소리였는지, 주변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그 새끼는 스토커일 거야.”
“거기에 탈옥범이죠.”
“쓰레기지.”
다들 말을 보탰다.
“마윤 개새끼.”
합창으로 끝내는 걸 보니, 탈옥한 마윤 개자식 때문에 마음고생이 있었던 듯싶다.
“다시 보이면 꼭 난도질해 버린다.”
뒤에 있던 2팀장도 분노를 표했다.
그날 호위 임무에 보안 2팀이 지원을 나갔었다고 들었다.
덕분에 실적이 왕창 깎였겠지.
잘하면 실적이 오르고, 실수하고 임무에 실패하면 그만큼 점수가 깎인다.
이번 일로 2팀이 올해 인사 평가에서 후한 점수를 받긴 그른 셈이다.
이게 다 그 개자식 마윤 때문이었고.
하여간 마윤의 탈옥은 큰 이슈였지만, 그렇다고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는 혼혈의 피를 이었어도, 도주한 지 일주일이 지난 탈옥범을 어떻게 잡나.
벌써 외국으로 날랐을 확률이 99%다.
나한테 원한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이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 같다.
불멸특수대는 툭하면 테러범을 잡고 싸우는 정부 직속 기관 중 하나니까.
번번이 이런 위협에 시달린다고 볼 수 있다.
“무시해. 어디서 염병할 테러리스트 새끼가 요원을 협박해? 다음에 걸리면 내가 오십 조각 낸다.”
팀장이 의자를 뒤로 비스듬히 눕히며 말했다.
낮잠이라도 잘 것처럼 보였다.
팀장이 말했듯, 위협은 위협일 뿐이었다.
어떤 테러리스트도 쉬이 요원의 목숨을 노리진 않는다. 물론 작전 중에야 별의별 일이 다 생기지만, 이런 위협은 요원의 삶에서 일상이었다.
사실 그리 무섭지도 않고.
마윤 상무가 정체를 들키고 도망갈 때, 창문 앞에서 팀장에게 쥐어터지는 걸 봤다.
내가 했어도 비슷한 속도로 잡았을 것 같았다.
“몸은 좀 괜찮고? 이계에서 난리가 났다며?”
의자에 앉자, 우측 파티션 너머에서 눈을 내민 아는 얼굴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름 친하게 지내는 이웃사촌이었다. 외부 보안 2팀의 1급 사원.
“이러다 올해 안에 대리도 다는 거 아니야?”
참고로 말하자면, 이 작자는 오리엔테이션 때 파랑새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직급이 같다.
난 지긋이 그를 보다가 말없이 미소만 보였다.
“잘나가도 나 잊지는 마.”
그걸 본 만년 1급 사원이 농담을 건넸고.
“대리 되면 꼬박꼬박 존댓말 쓰십쇼.”
내가 그 말을 받았다.
“그거 농담 같지가 않아.”
1급 사원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오전 일과,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이계 작전 보고서는 정호남 과장이 알아서 다 썼다.
그리고 난 작전 성공 수당으로 포상금을 받았다.
이 포상금이라는 게, 본래 임무의 위험도와 활약의 정도에 따라 좀 달라지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큰 위기를 막는 데 주요 역할을 하면, 화림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돈으로도 표현했다.
“사수.”
난 통장에 입금된 내역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응?”
“오늘 소고기 콜?”
“갑자기?”
“소고기는 갑자기 먹어야 맛있는 법이라는 거 모릅니까?”
“난?”
뒤에서 팬더 대리가 말했다.
“드루와, 드루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하자.
“요잇.”
팬더 대리는 알아듣지 못할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좋다. 행복했다.
사람은 전부 선하다는 성선설을 믿는다.
세상은 아름답다.
맑고 아름다운 태양이 팀장 뒤편 창가에서 비쳐들었다.
오후가 되어가는 시점의 따사로운 햇볕이었다.
“염병.”
팀장은 욕을 뱉으며 블라인드를 쳤지만, 나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일상의 한 장면일 뿐이다.
“세상은 아름답네요.”
내가 그리 중얼거리자 사수는 고개를 갸웃했고, 눈치 빠른 팬더 대리는 ‘포상금?’ 하고 되물었다.
“정답.”
눈치가 귀신일세.
내 이름은 여러모로 유명해졌다.
개척 4팀에서 내가 나올 때 같이 복귀한 휴가 인원의 입에서 내 활약상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다.
‘진흙 사막의 영웅’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는데.
좀 부끄럽기도 했다.
영웅은 좀 그렇지.
구원자 때도 좀 그랬고.
하여간 포상금 액수는 오천만 원이었다.
꺽. 잘 먹었습니다.
실수로 줬어도 절대 안 뱉을 테다.
물론 실수 따윈 없었다.
[남명진] 이계 임무 보고 잘 들었다.
사장이 직접 메신저를 보내기도 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과 여러 가지 가십거리는 요한 형이 신나서 메신저로 말해 줬고.
귀태 형이나 1조 문신남 자식, 친한 사람 몇이 돌아온 날 반겼다.
사실 다들 날 반겼다.
한 명, 두 명 친하게 지내다 보니.
“여, 광익이, 점심은?”
“먹어야죠.”
“같이 갈까?”
“아뇨. 팀원이랑 갑니다.”
이렇게 점심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저 작자랑은 어쩌다가 친해졌냐?”
뒤에서 팬더 대리가 물었다.
방금 지나간 사람은 박필로 감사팀장이다.
예전에 나한테 감사팀으로 오라고 제의했던 그 감사팀장이 맞다.
그러다가 이중봉 팀장이랑 살벌하게 눈싸움도 벌이고, 휘하에 있던 심 대리는 팔도 부러졌었다.
여전히 우리 시발 팀장하고는 최악의 사이였지만, 나랑은 아니지.
팀을 옮기진 않지만, 적당히 잘 지내지 말란 법은 없잖아?
“운동을 좋아하더라고요.”
내부감사 1팀장 박다람과 나, 박필로는 운동으로 맺어진 사이다.
“열심히 단련해서 이중봉 팀장님 콧대를 부러뜨리는 게 목표 같습니다.”
되지도 않은 농담을 건네자.
“웃기시네, 덤비라고 해. 난 언제든 열려 있다.”
팀장이 답했다.
저 양반 자는 줄 알았더니, 눈만 감고 얘기는 다 듣고 있네.
“그래서 소고기는 언제?”
팀장이 물었다.
내 평생 이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가끔 보면 저 양반도 귀여운 구석이 있다.
“점심 고?”
“고.”
다들 동의했고, 우리는 점심으로 한우 등심을 구웠다.
맛깔났다. 배도 불렀고.
한동안 뉴스에서 블랙홀 겹문 사태를 떠들더니, 지금은 또 잠잠했다.
큰 파도가 한차례 지나간 듯싶었다.
“요새 공기가 아주 흉흉해.”
밥 잘 먹고 팀장은 신소리를 했다.
난 흉흉하건 말건, 당장 급한 일을 해야 했다.
박병준 박사 부녀 상봉 말이다.
그리고 나와 어머니의 모자 상봉도.
씁. 괜찮겠지?
일단 명품 백 하나 사고 생각할까.
그게 나을 듯싶다.
잘 먹고 잘 쉰 우리는 업무에 복귀했고 난 이틀 뒤, 정식으로 박병준 박사의 개인 용무 경호 임무를 맡았다.
대외적으로 알릴 수 없으니, 사장이 손을 써 준 덕분이었다.
즉, 말이 경호 임무지, 박마리를 만나는 게 목적이었다.
* * *
요즘 날씨가 지나치게 화창하다는 생각이 든다.
뉴스에서 연신 올해 여름이 길어졌다고 말했다.
가을은 짧고 여름은 긴 한 해다.
부웅.
난 박병준 박사를 조수석에 태웠고, 우리는 말 없이 움직였다.
침묵은 짧았다. 박사가 얼마 안 가서 입을 열었다.
“마리는 안전하겠지?”
이성을 찾고 건강도 찾은 덕분에 박사의 안색은 꽤 깨끗했다.
딸을 걱정했는지, 피로감이 얼굴에 보이긴 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네.”
아마도.
안전은 한데, 어머니 밑에 있었으니 꽤 예의도 찾았을 겁니다.
본래 아무나 물 것 같은 강아지였다면, 지금은 얌전한 애완견이 됐을 것이다.
“지킬 건 지켜야 하는 거, 알죠?”
예의상 물었다.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동네의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살던 동네다.
치킨집과 대형 카페 몇 개를 지나자, 3층에 필라테스 센터가 보였다.
건물 옆에 보이는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댔다.
박사가 실수할 일은 없을 것이다.
불멸특수대의 기밀과 비밀을 말할 마음도, 생각도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제 몸에 최소 서른다섯 개의 추적 장치가 심어져 있으며, 특정 단어를 발설할 시 작동하는 전극 장치도 목 뒤에 붙여 놨다.
뭐, 일단 개소리를 하거나 도주를 시도하면 내 손에 반 죽는다.
내가 맡은 일은 말이 경호지, 반은 간수다.
“잠깐 기다려 보실래요? 저 먼저 좀 뵙고.”
차 뒤에서 주섬주섬 쇼핑백을 꺼냈다.
명품 백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구두 하나와 옷 한 벌을 더 얹었다.
포상금 덕이 컸다.
“알겠다.”
박사가 답했다.
약속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마리도.
“소자 왔습니다. 어머니.”
조용히 다가가 말하니, 어머니가 지긋이 날 바라보신다. 야생의 살기가 느껴졌다.
수틀리면 죽는다.
툭.
첫 번째 무기를 던졌다.
명품 백.
저게 얼마더라. 한 구백 얼마 하던데.
살 때 손이 덜덜 떨렸었다.
“음?”
살기가 줄었다. 다 사라지진 않았다.
두 번째 무기를 던졌다.
구두다.
툭.
무게감을 느낀 어머니가 쇼핑백을 열고 상자를 살피며 말했다.
“아니, 엄마가 이 나이에 힐을 신겠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심 기쁜 얼굴이다.
저 구두는 얼마더라. 하여간 손을 떨며 계산했고.
직원한테는 괜히 수전증이 있다는 핑계를 댔었다.
평생을 소시민으로 살았기에, 거금을 쓸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미 살기는 없어졌지만, 세 번째 무기도 꺼냈다.
옷이다.
“……아들, 오늘 저녁 먹고 싶은 건 없고? 오랜만에 봤는데 볼이 홀쭉하네, 잘 먹고 다녀야지. 회사에서 돈 많이 버나 보다. 아들?”
“네, 제가 일을 좀 잘해서 보너스를 두둑하게 받고 그래요.”
“그렇지, 그래야 우리 아들이지.”
어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에 허리를 숙여 그 손길을 영접했다.
“마리 안녕?”
그러면서 별생각 없이 인사를 건넸는데.
“네, 오라버니. 건강은 이상 없으신지요?”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난 허리를 굽힌 자세로 굳었다.
애가 좀 많이 변했네?
그 자세 그대로 어머니를 바라보니.
“마리, 착한 아이야.”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착하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짐승을 맡겼는데 어떻게 청학도 에이스가 돼서 돌아온 것 같았다.
“그, 음, 마리 아버지 데려올게요.”
일단 박사부터 데려오고 볼 일이었다.
난 다시 나가서 박사를 데려왔다.
박사는 마리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였다.
이 사람 겉보기와 달리 감수성이 풍부하다.
“마리야.”
박사가 다가가며 가슴을 열었다.
안으려 하는 자세였다.
마리는 안길 듯하다가 양팔을 벌려 박사의 팔을 막고, 정강이를 비스듬히 갖다 대며 박사의 다리 진로를 막았다.
음, 어머니, 애를 키우랬더니, 무술도 가르치셨나 봅니다.
애 자세가 보통이 아닌데.
“누구신지?”
그 자세 그대로, 마리가 박사에게 되물었다.
박사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침을 꼴딱 삼켰다.
어느새 눈물은 바싹 말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