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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117화 (117/488)

117.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트롤 두 마리를 죽일 때 슬러그 나이프탄을 다 써 버렸고.

4번 타자도 잔탄이 없었다.

왼쪽 정강이 골절, 팔꿈치 뼈 복합 골절, 그 외 자잘한 상처, 장비 손상까지.

부상이야,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잘 먹고 잘 자면 나을 테니까.

다만, 코트의 헥사곤 필드가 발동을 멈췄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마법이 걸린 장비, 흔히 말하는 ‘스펠 기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려나? 어쨌든 당장은 육각 결계 코트가 조금 튼튼한 천 쪼가리가 됐다.

옆구리에 구멍도 뚫렸고.

이거 기워도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사내에 있는 기어 엔지니어에게 보여 주면 되겠지.

불멸 특제, 방검방탄복도 엉망이다.

위에 걸쳐 입은 무장 조끼도 여기저기 구멍 나고 찢어졌고.

결론, 꽤 고생했지만,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끄르륵.

고블린 한 마리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그 옆에 있던 오크 놈은 머리가 반쯤 깨져서 뇌수와 피를 질질 흘려 바닥을 적셨다.

마지막 남은 고블린 머리통을 발로 걷어차려다가 디딤발에 힘이 안 들어가 돌을 하나 주워서 머리통을 찍었다.

퍽.

녹색 피가 금이 간 페이스 가드 위로 튀었다.

절뚝거리며 몇 걸음 걸어보니, 당장 나자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뚜벅뚜벅 걸어, 초소로 돌아가자, 우두커니 선 호남과 팔 하나를 잃은 기남이, 반 시체가 된 까칠이와 배에 피어싱으로 하기에는 과하게 큰 구멍이 뚫린 혼혈 대리님이 보였다.

호남이 날 바라봤다.

“지원 병력으로 오신 겁니까?”

내가 물었다.

“복귀하는 길이었다.”

호남이는 여전히 까칠했다.

기남은 숨을 고르며 제 형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과하게 반짝거렸다.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기도 하고.

“와우, 여기 무슨 변신족 분대 병력이라도 온 겁니까?”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다. 개척 탐사팀이었다.

“이거 트롤 살점이다. 와우, 주둥이에 수류탄이라도 집어넣은 건가.”

아, 첫 번째로 조진 놈은 근접 거리에서 4번 타자로 쏴 버렸다.

살덩이가 아니라 조각이 돼서 흩뿌려졌지.

꽤 장관이었다.

물론 그 대가로 왼팔이 뒤틀렸다. 지금도 팔의 근육과 신경, 뼈가 욱신거린다고.

“트롤 포함해서 숫자가 스물이 넘어.”

“한 명이 한 거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며, 초소 창밖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페이스 가드 때문에 얼굴은 안 보였다.

“오자마자 과장님이 하신 건 아니고. 초소에 지원 병력도 없고.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올라온 작자가 물었다.

“대략, 쿨럭, 인베이더 스물 이상이, 쿨럭, 꾸웩.”

말하다 말고 대리님이 피를 토했다. 소리가 적나라했다.

“수혈팩 꽂아라. 보고는 회복한 뒤에 하고.”

그 말에 혼혈 대리님이 품에서 수혈팩을 꺼내 제 팔뚝에 꽂았다.

퓨슉- 하고 농축 혈액이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배에 구멍이 뚫렸으니, 얼마나 아플까.

혈액 응고제 따위를 뿌린 것 같지만, 그래도 상처 부위가 너무 크다.

“남은 인베이더는?”

기남이 물었다. 성격 급한 놈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밖으로 눈을 돌렸다.

치이익.

신호탄이 타들어 가는 중이다.

기남은 그걸 보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고 눈을 돌려 제 형을 바라봤다.

호남은 밖을 한 번 보고, 안을 한 번 봤다.

다시 밖을 보고 안을 한 번 더 본 뒤,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정진해라.”

그 말을 끝내고, 호남은 저벅저벅 걸어서 초소 밖으로 나갔다.

“빌어먹을.”

기남이 중얼거렸다.

자식, 안쓰럽네.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야, 너희 형 진짜 왜 그러냐?”

사람이 잘했으면 칭찬도 하고 그래야지.

동생이 응? 이렇게 고생해서 트롤도 잡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반쯤 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잘 싸웠잖아.

나라도 칭찬해 줄까 싶어서 기남이를 보는데.

기남이 날 무섭게 노려봤다.

왜 이 새끼는 위로를 해 줘도 지랄이지?

진짜 성격 나쁜 새끼와는 상종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초소 방비 근무는 현 시간부로 정찰대에서 대체한다. 너희 셋은 곧바로 복귀한다.”

멀뚱히 이 장면을 지켜본 개척 탐사팀원이 말했다.

근데 이 양반은 누굴까.

“밖에서 싸운 건, 너구나.”

전신에 흘린 피, 남은 상처, 들고 있는 무기와 흔적.

불멸자에게 이 정도 관찰력은 당연한 수준이다.

“네, 뭐.”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제성 과장이다.”

그가 말했다. 화림에 와서 느끼는 건데, 나만 보면 자기소개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1급 사원 유광익입니다.”

“그래.”

이제성 과장이 말하고 몸을 돌렸다.

어쨌든 복귀 시간이었고.

난 포옹을 약속했지만, 현 상황에서 그걸 지킬 수 없기에 까칠이를 안아 들었다.

이건 회복실에 가도 고생 좀 하겠는데?

전신에 응고제, 하얀 가루를 잔뜩 뿌려 놓은 몸뚱이가 꽤 가련해 보였다.

재생은 고통을 수반한다. 까칠이는 최소 6개월은 쉬어야 할 몸이 됐다.

“포옹은 깨어나면 해 줄게.”

기절한 동기에게 속삭였다.

이제성 과장이 혼혈 대리님을 부축하고, 기남이는 혼자 걸었다.

뒤를 돌아봤다.

초소에 남은 정찰 대원 둘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좀 치시네.”

“개척팀 안 올래요?”

스카우트 제의는 이제 처음 보는 사람마다 하는구나.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이중봉 팀장님 알아요?”

“어, 알죠, 그 양반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저 외부 보안 3팀.”

“아.”

정찰 대원 둘이 동시에 외마디로 답을 대신했다.

아니, 새삼 궁금해지네.

우리 시발 팀장은 회사 생활을 어떻게 했길래 만나는 사람마다 반응이 저러냐.

어쨌든 스카우트 제의 거절할 때는 참 쓰기 좋은 양반이었다.

* * *

회의에 들어가기 직전, 개척 탐사팀장은 당직 과장을 따로 불렀다.

“왜 2초소는 아무도 안 보내고 3초소에만 갔나?”

덕분에 정호남 과장이란 새끼가 지랄 발광을 했다.

근무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업무 체계는 대체 어디서 온 거냐 묻기에, 팀장도 이마에 핏대를 세워야 했다.

‘시방새.’

지가 순혈 적통의 가문이면 가문이지, 남의 일터에 와서 입을 털어대?

보통 꼴사나운 게 아니었다.

“네? 당장 급한 곳만 간 겁니다.”

“양쪽 초소 전부 습격당했잖아.”

“아직 보고 안 올라갔습니까?”

과장이 눈을 깜빡였다.

“보고서 쓸 애들이 다 사경을 헤맨다.”

불멸자이니, 진짜 사경을 헤매진 않았다. 그래도 반죽음인 건 맞았다.

이번 습격에서 그나마 멀쩡한 근무자가 딱 둘이었다.

지원 병력으로 온 1급 사원 유광익과 3급 사원 정기남.

한쪽은 팔이 잘렸지만, 다른 한쪽은 절단 부상이 없다.

대신 다른 근무자 중 지금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본 것만 구두로 보고해 봐.”

상황을 알아야 대처를 한다.

팀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네, 뭐. 그 유광익이가요. 괴물이던데요?”

불멸자라고 다 같은 불멸자가 아니다.

일반인 중에서도 타고난 근력이 약하고 운동 신경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 괴물 같은 피지컬의 인간이 있다.

불멸자나 변신족도 같았다.

유광익이 딱 그랬다.

사고 당시, 당직 과장은 가장 빨리 현장에 도착했다.

도착한 그는 광익이 날뛰는 걸 봤고.

습격한 인베이더의 숫자도 파악했다.

그와 동시에 대기 병력을 전부 이끌어 3초소로 향했다.

나눠서 감당하기에는 힘든 숫자였다.

다행히도 이곳에는 괴물 같은 신입 사원이 전부 개박살을 내고 있었고.

“얼마나 잘 싸우디?”

“솔직히요?”

“팩트로만.”

“그, 소문으로만 듣던 행안부 특임대 수준이던데요?”

행안부 특임대.

풀어 말하면 행정안정부 특수 임무 부대다.

불멸특수대가 거르고 거른 불멸자의 모임이라면.

그곳은 이레귤러 포함, 요원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만 모아 둔 곳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팀장님도 좀 힘들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 상황.”

“새끼가.”

팀장도 상급의 전투 가용 인원이다.

다만, 당직 과장의 말이 진짜라면, 팀장도 과장의 말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고블린, 오크, 트롤 3종 세트라.

전신 무장을 하면 가능은 할 것이다.

최신식 기어로 무장해도 가능은 할 거고.

하지만 고작 산탄총 하나에 스펠 기어 두어 개, 냉병기만으로 상대하기는 끔찍한 숫자였다.

“그 친구 기가 막혀요. 나 태어나서 그렇게 잘 싸우는 불멸자는 처음 봅니다. 두 눈으로 안 봤으면 믿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금 내가 그래. 그게 말이 되나 싶어.”

“진짭니다. 제가 봤다니까요. 그리고 결과가 말해 주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광익이 있던 2초소의 피해가 3초소 피해보다 더 적다.

배에 구멍이 뚫린 김다미 대리도 말했다.

“초소에 남은 셋은 트롤 한 마리를 감당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정기남 사원의 전투 판단력이 놀라웠지만, 밖의 상황까지 살필 여력은 없었습니다. 다만, 예상하기로 유광익 사원이 없었다면 전멸했을 겁니다.”

요원 셋이 트롤 한 마리.

이것도 사실 대단하다. 김다미와 근무자 신입 사원의 능력은 안다.

고로, 초소 안에서 정기남은 드물게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줬다.

정기남은 능히 최고의 신입 사원, 경이의 신입이라 불릴 만했다.

하지만 유광익의 존재가 정기남이란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다.

“진짜 괴물 새끼인가.”

“완전요. 괜히 NS가 아니라니까요.”

규격 외.

그래,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 * *

불멸자는 잘 먹고 잘 쉬는 것도 일이었다.

특히나 부상 이후라면.

난 먹고 자고 싸고의 삼고를 실행했다.

덕분에 몸이 딱 이틀 만에 나았다.

완벽한 컨디션이 되려면 하루 정도 더 있어야겠지만, 지금 당장 움직일 정도는 됐다.

뼈에 실금 정도는 남은 것 같지만, 그리 아프진 않고.

이 정도면 뭐, 반나절이면 완벽해질 것 같다.

나머지 반나절은 회복한 몸을 풀어서 근육의 긴장도를 다시 높이는 과정쯤 되겠지.

그사이 난 돼지를 두 마리쯤 위장에 밀어 넣은 것 같았다.

기남은 팔을 재생하기 위해 약물을 투여하느라 치료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대리님과 까칠이도 마찬가지였다.

이틀 동안 딱 두 번 정호남 과장과 마주쳤는데.

“……기남이도 할 수 있다.”

한 번은 이렇게 말했고.

“그래도 덕분에.”

두 번째는 이렇게 말했다.

난 과장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묻고 싶었다.

세 번째 만나면 물으려 했는데 긴급회의가 잡혔다.

“유광익 사원?”

“누구신지?”

“목소리 들으면 모르나? 그 예민한 감은 전투 때에만 발동하는 건가?”

아니, 알긴 알겠는데.

되게 목소리와 얼굴 이미지가 안 맞는다. 목소리는 곱상한데, 생긴 건 턱이 각진,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잘생긴 산적이다.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이제성 과장이었다.

“그 수염, 페이스 가드 안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돌돌 말아서 넣지.”

“아.”

과장님이 목울대까지 내려온 수염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아서 안으로 밀어 넣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안 불편합니까?”

“안 불편해. 이건 내 아이덴티티다.”

사람은 십인십색, 이 사람도 특이하다. 불멸자 중에서는 정상인이 없는 걸지도 모르고.

“긴급회의다. 너도 참석이고.”

“저도요?”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난 그 뒤를 따라서 회의실로 향했다. 가는 중에 과장이 물었다.

“몸이 회복됐다고 들었다. 너도 순혈의 적통이냐?”

“아닐걸요. 저 혼혈이거든요.”

“음, 이레귤러.”

짧은 대화였다.

도착하니,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이 섞여 있었다.

앉은 사람은 열여섯.

눈에 띄는 사람은 다섯이다.

일단 김동철 이사랑 호남이.

안으로 들어가니 김동철 이사가 눈으로 아는 척을 해 왔다.

고개를 꾸벅 숙여서 나도 마주 인사했다.

전투가 끝나서 복귀하자마자 다친 곳은 없냐며, 날 반겼다.

진짜 날 미래의 신랑감으로 생각하는 걸까.

딸이 예쁘다는데 사진이나 보고 싶다.

호남이는 날 보지도 않았다.

시선을 회피하는 걸 보니, 여전히 날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상석을 차지한 김동철 이사의 맞은편이다.

개척팀장과 유명한 두 명의 과장이다.

개척팀장은 귓불이 컸고, 그 옆에 이제성 과장은 얼굴이 빨갛고 수염을 길게 길렀다.

맞은편 여자 과장은 화림 내에서도 알아주는 주당, 그래서 셋이 합쳐 별명이 도원결의.

또는 볼 빨간 남매들.

첫째는 귓불이 빨갛고, 둘째는 얼굴이 빨갛고, 셋째는 머리카락부터 전신이 빨갛다.

오티 때와 고통 감내 훈련장의 마니아인 양초남 김한이 생각나는 머리칼이다.

이 셋은 인베이더 시신 앞에서 의남매를 맺었다는 말도 떠돌 정도로 친하며 예전부터 함께 손을 맞춰 본 이들이라고 들었다.

소위 말하자면 개척 탐사 임무의 베테랑 셋이다.

먹고 싸고 자면서 들은 정보였다.

“이사님,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해.”

그 말에 이제성 과장이 일어났다.

“특이종입니다.”

거추장스러운 미사여구나, 불필요한 설명은 배제한 보고 체계였다.

“초능력을 발휘하는 특이종이나, 재생하는 오크 따위보다 더 위험한 케이스라고 판단합니다.”

“근거는?”

김동철이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지뢰 지역을 피하고 야습, 포위 따위를 감행하는 인베이더입니다. 특이종이 아니라 네임드였다면 이 정도 피해로 막지 못했을 겁니다.”

특이종.

넘버링의 인베이더 중에서 색다른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는 놈들을 말한다.

그중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들이 네임드가 되는 거니.

네임드가 보스라면 이놈들은 중간 보스급이었다.

초소 습격 사건의 경위가 삼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김다미 대리 포함, 정기남 사원 외 1인의 활약으로 트롤 한 마리를 격살했습니다.”

그랬지, 보진 못했지만, 우리 기남이가 활약했다.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이제성 과장이 날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유광익 사원이 남은 모든 인베이더를 격살했습니다.”

회의실 공기가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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