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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113화 (113/488)

113. 인기가 흘러넘치는데.

여우의 태도가 까칠하다고 느꼈었는데, 그건 까칠함이 부끄러움이었다.

오감과 육감에 예민한 불멸자라도 타인의 감정을 전부 읽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럼 독심술사게?

날 바라보는 까칠이의 얼굴에 적당히 홍조가 폈다. 그러니까, 열 받아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나 다음 달에 한 달 휴가거든.”

다섯 달 근무, 한 달 휴식.

이계 근무자의 특권이다.

그래, 휴가구나. 그건 알겠는데.

지금 나한테 휴가 날짜를 알려 주는 것보다는 뒤쪽에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냐.

“축하해. 근데 너 뒤에 램프 깜빡이는데?”

우리가 맡는 네 군데의 창 위로는 램프가 두 개 있었다.

그중 왼쪽 첫 번째 램프에 파란빛이 번쩍였다.

“응, 근처에 인베이더가 왔나 봐.”

응. 알지. 나도 듣고 왔으니까.

당직 과장은 이걸 간단하게 설명했다.

첫 번째 램프는 고압 지뢰가 발동한다는 표시라고 했었다.

램프의 불이 번쩍이더니, 까칠이의 뒤쪽, 창가에서 파란빛이 터졌다.

웅 하는 진동이 발끝으로 느껴졌다.

고압(高壓) 지뢰.

이계의 자원과 지구의 과학이 만든 무기다.

밟는 순간 고압 전류가 터지면, 반경 2m 일대에 있는 모든 걸 단숨에 숯덩이로 만든다.

어지간한 폭발에 죽지 않는 튼튼한 인베이더를 위해 만든 물건이다.

화염 내성이나 결빙 내성이 있고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가도 돌격하는 터프한 인베이더라 한들, 고압 전류는 무시 못 한다.

심장과 모든 내장기관을 동시에 타격하기에 효율적이다.

심장이 두 개거나 내장이 터져도 움직이는 놈들을 잡는 데 딱 좋은 무기.

역으로 말하면, 불멸자를 잡기 좋은 무기이기도 했다.

그 램프가 반짝였다가 꺼졌다.

이게 의미하는 건 고압 지뢰가 근접한 인베이더를 죽였다는 건데.

얘는 왜 이렇게 위기감이 없냐?

“뒤로 돌아서서 총알을 갈겨야 하지 않을까?”

물었다.

“아직 괜찮아. 고압 지뢰는 100m 밖이고, 단방향 신호로 램프가 번쩍이는 거라서 관리하는 지역에 인베이더가 종종 들어오곤 하거든. 한 달 뒤에는 뭐할 거야?”

현 상황과 질문 내용이 어긋난다. 그래도 난 편견 없이 들은 내용을 정리한 뒤, 당장 내가 해야 할 말을 정리해 말했다.

“저기, 동기야. 두 번째 램프도 번쩍이는데?”

두 번째 램프는 고압 지뢰를 통과해서 살아 있는 인베이더가 있다는 의미였다.

이게 제일 급한 거 아니냐.

근데 옆에 선 대리도 급해 보이지 않았다.

“데이트할래?”

까칠이가 물었다.

“저기, 너 뒤에 불 켜졌어.”

이제 램프가 문제가 아니다.

각 네 개의 창 앞에는 동작 감지 라이트가 붙어 있다.

초소에 다가가기 전에 왜 굳이 라이트로 신호를 보냈겠나.

근처에 움직이는 모든 걸 파악하는 장치가 붙어 있으니 그렇지.

“잠깐만.”

까칠이는 그렇게 말하곤 페이스 가드를 내려 얼굴을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맡던 창밖, 라이트가 적을 여실히 비췄다.

넘버링 11 고블린이었다.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팔 한쪽이 없었다. 녹색 피가 바닥에 뚝뚝 흘렀다.

고압 지뢰에 당한 거로 보인다. 피가 흐르는 양이 적고, 상처 단면이 까맣게 탔다.

나머지 두 마리는 멀쩡했다. 손에는 조잡한 쇳덩이 따위를 들었는데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고블린 놈들은 갑자기 켜진 불빛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얼굴에 라이트를 쏘면 눈을 뜨기 힘든 법.

밖으로 나간 까칠이는 소총을 들고 라이트 불빛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고블린의 머리에 총알을 박았다.

다다, 다다, 다다.

어지간한 불멸자는 타고난 특등사수다.

총알은 거침없이 고블린의 머리통에 구멍을 만들었다.

퉁.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까칠이가 페이스 가드를 올렸다.

상기된 얼굴이 보인다. 호흡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걸 보니, 이런 일이 익숙해 보였다.

전초기지 근무자에게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인가 보다.

“취향 한번 독특하군.”

끙끙대면서도 기남이는 꿋꿋이 입을 열었다.

“데이트하자. 나랑.”

까칠이가 말했다.

요새 나 왜 이러나.

인기가 흘러넘치는데.

“나랑?”

“응.”

까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옆에서 자꾸 기남이가 추임새를 넣었다.

이 새끼 이제 식은땀도 흘리네.

그러면서도 진짜 꿋꿋이 입을 터는 걸 보니 존경심이 솟아오를 지경이다.

“미안.”

난 거절했다. 어장관리 할 것도 아니고, 애초에 틈을 줘서 뭐 하겠나.

만날 생각도 없고 까칠이의 몸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관심은 있지만, 성욕만 갖고 사람을 만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나.

“아.”

까칠이가 짧은 탄식을 흘리고 몸을 돌렸다.

그런 날 보며 기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정신 나갔군.”

아니다. 이 새끼야.

요새 나 진짜, 이상하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단 말이다.

그 분석팀 최고 미녀가 사귀자고 농담도 하는데 그린 라이트가 막 폭죽처럼 터지고 그랬거든?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친구 하자. 친구.”

내가 읊조렸다.

“친구?”

“그래. 친구.”

까칠이가 조용히 읊조렸다.

“친구 좋지. 오빠오빠 하다 보면 아빠, 친구친구 하다 보면 여보.”

야, 그건 아니지.

“그래. 친구 하자.”

웃으며 까칠이가 말하기에 굳이 더 따지지 않았다.

지금부터 최소 네 시간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 한 번 근무가 4시간이다.

이제 30분 조금 넘었다.

3시간 30분을 어색한 침묵 속에서 보낼 수는 없지 않나.

“그럼 전 어때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이번에는 혼혈 대리님이 물었다.

“쿨럭.”

기남이가 기침을 뱉었다.

“대리님.”

옆에서 까칠이가 눈을 흘겼다.

“아니, 사귀자는 게 아니라 그냥 타입이 궁금해서.”

“아, 이상형이요?”

분위기 한 번 또 박살 날 뻔했다.

“응. 광익 씨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대리님이 물었다.

까칠이가 귀를 쫑긋 세우고, 기남이도 좀 나아졌는지 내 쪽을 향해 시선을 한번 던지더니 중얼거렸다.

“그 얼굴에 따진다고?”

이 새끼가, 내 얼굴이 어때서 새캬.

일반인 사이에 넣어 두면 빛나는 외모다.

물론, 생태계 파괴 수준의 정기남보다는 아주 조금 덜 생긴 편이긴 하지.

“제 이상형은.”

난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섹시하고 청순하고 고아하고 귀엽고 지적이며 배려 깊고 같이 놀아주고 얼굴 예쁘고 몸매 좋고 어우동과 신사임당이 반반씩 섞인 그런 여자.

내 말이 끝나자.

“제정신이냐?”

기남이가 날 걱정했고.

“음, 그래. 그랬구나. 친구 하자. 친구.”

까칠이가 날 외면했으며.

“……광익 씨는 어려운 남자네요.”

대리님은 말을 고르고 골라 입을 열었다.

“저 진입장벽 낮은데.”

내 말에 대리님은 수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근무에 임했다.

아니, 내가 못할 말을 한 건가?

셋 다 내가 양심이란 친구의 장례를 치른 것 같은 반응이다.

침묵의 근무 시간이 시작됐다.

아까보다 분위기가 더 안 좋아졌다.

“흠흠.”

어색함에 헛기침을 하며 뭐라 말이라도 꺼내 볼까 하는데, 갑자기 내 앞에 있던 동작 감지기가 작동하며 라이트를 비췄다.

“거수자 발견.”

꺼내려던 말을 삼키고 근무자의 본분을 지켰다.

라이트가 비추자, 손으로 눈가를 가린 작자가 보였다.

김동철 이사였다.

그가 초소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

근무 상황 순찰이었다.

“이상 없지?”

“현 2초소 상황 이상 무. 고블린 세 마리 발견 후 격살. 고압 지뢰 1회 발동했습니다.”

대리님이 말했다. 얼굴에 웃음기를 빼니까 꽤 강인한 인상이다.

“좋아.”

이사는 말하고 마저 근무나 서라고 말한 뒤, 내 옆에 선다. 이 양반 뭐하나.

“흠.”

그가 헛기침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계 근무는 처음인데 어떤가?”

“1급 사원 유광익, 잘 적응했습니다.”

“그런가?”

말하며 난 기남을 슬쩍 봤다.

이쪽이 문제지, 나야 뭐.

김동철은 기남이는 쳐다도 안 보고 나만 바라봤다.

이거 영 어색하네.

처음 입사했을 때는 다들 정기남, 정기남이랬는데, 이제는 같이 있는데도 나만 보니.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네, 무척이나.”

아버지는 불멸자고 어머니는 변신족인지라, 건강 하나만은 지구 최강인 부모님일지도 모릅니다.

김동철 이사는 시답잖은 얘기를 즐기는 편인가 보다.

전에도 고기 좋아하냐고 물으면서 고기를 줬었지.

잠깐의 침묵 뒤다. 김동철 이사는 내가 느끼기에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여자친구 있나?”

“……없는데요.”

이 질문, 아까도 들었던 것 같은데.

“담배?”

“안 피웁니다.”

김동철 이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금 말했다.

“다음 달 사내에 중요한 행사가 있는데 같이 갈 텐가?”

머릿속에서 아까 까칠이가 했던 말이 오버랩됐다.

“데이트할래?”

“아뇨. 싫습니다. 제 이상형은…….”

다시금 내 이상형을 읊으며, 끝에 여자를 좋아한다고 다섯 번 넘게 반복했다.

“저 여자가 좋습니다. 여자가 최고입니다. 여성이야말로 제 이상형의 기초상입니다. 여자 최고. 여자 만세.”

“……또라이.”

기남이의 추임새가 아니더라도 다들 눈빛이 묘했다.

이거 아니야?

김동철 이사가 나한테 추파 던진 거 아냐?

“나 딸 있네.”

김동철이 조용히 읊조렸다.

“올해 열여섯이지.”

“아, 네.”

“자네는 험난한 길을 걷는 걸 즐기는군.”

“제가요?”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거 아닌가.”

아닌데.

“워커홀릭도 좋지만, 요즘에는 워라벨이야. 이중봉 팀장처럼 살아서는 안 되지.”

“으으음? 이중봉 팀장님이요?”

시발 팀장이 왜?

“그 작자야, 평생 독신에 일과 결혼하지 않았나. 정말 그렇게 살고 싶나?”

대뜸 시발부터 박고 시작하는 팀장처럼 살고 싶냐고?

아뇨. 그럴 생각 없는데.

사명감 부르짖으며 내 일생을 일에 갈아 넣으라고?

진심으로 난 그럴 생각 없는데.

다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 보겠다는 것뿐인지라.

“좋은 상사를 만나는 것도 운이지. 그리고 운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잡는 거고. 수고하게.”

말하며 김동철 이사가 몸을 돌렸다.

문을 열기 직전 이사는 한마디를 더 남겼다.

“내 딸은 아주 아주 아주 예쁘다.”

그리고 나갔다.

어쩌라는 거지?

“저기 광익 씨.”

“네, 대리님.”

“전 광익 씨가 되게 좋은 사람 같거든요.”

“저도 대리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편히 말씀하십시오. 동생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붙임성은 내 최고의 장기다.

그 말에 대리님이 눈웃음을 보였다. 호감 가득한 표정이다.

그와 함께 말한다.

“어디 가서 이상형 얘기는 하지 말아요.”

“음, 네?”

“그거 하지 마. 사람이 되게 양심 따윈 없어 보여.”

진심을 담아 하는 걱정에.

“동의.”

까칠이가 동의하고.

“풉.”

기남이는 날 비웃었다.

근무고 뭐고 살풀이 한번 하고 싶다. 우리 기남이 얼굴에 주먹을 꽂고 싶다.

잠깐 고민하는데, 기남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후우, 빌어먹을 이계.”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키고 제가 담당한 창밖을 뚫어지듯 노려보더니 묻는다.

“김다은 대리님. 인베이더가 출현하면, 보통 개체 수가 몇이나 됩니까?”

“많으면 다섯을 넘기도 하죠. 보통은 둘에서 셋? 그나마 여기는 안전 지역이니까요.”

개척팀이 이미 소탕한 지역에 기지를 세우고 지뢰를 깔고, 주변 인베이더를 주기적으로 소탕하면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 된다.

이곳도 그렇게 만든 안전지대다.

“그럼 스물이 넘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기남이 물었다.

“보통은 그 정도 숫자가 와도 고압 지뢰를 뚫지 못하죠.”

그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난 4번 타자 손잡이를 쥐었다.

오감 이전에 육감과 직감이 위험을 경고한다. 목덜미에 난 솜털이 쭈뼛 섰다.

“김다은 대리님, 현 시간 추정 최소 서른 마리 이상의 인베이더 접근을 감지했습니다.”

기남이 일어나며 헬멧을 벗고, 이마의 땀과 목덜미를 손과 손등으로 훔쳤다.

저 말의 의미는 감각 크랭크 조절이 끝났다는 말이고.

그와 동시에 적을 감지했다는 거였다.

“이제 멀쩡해졌냐?”

“상관하지 마라. 스컹크.”

말하며 기남이가 기관단총의 노리쇠를 당겼다.

퉁.

오른손에 기관단총, 왼손에는 권총.

나도 4번 타자 대신 소총을 들었다.

팍.

동작 감지기가 작동하기 전에 뭔가가 날아와 초소의 라이트를 깼다.

적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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