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103화 (103/488)

103. 진급의 조건

“바쁜 와중에 온 거야. 고마운 줄 알아.”

지하 주차장에 승강기가 도착하자마자 왕자가 말했다.

“저도 바쁜 와중에 알을 구했죠.”

“알?”

옆에서 새로운 호위가 눈을 부라렸다.

“무슨 짓이지?”

그걸 본 알이 호위에게 말했다.

“무슨 짓이냐고.”

“……아닙니다.”

호위가 물러났다.

마, 자식아, 내가 너희 왕자님이랑 앙? 같이 튀고, 서로 뒤도 봐주고, 다 했어.

“시간 있으면 좀 더 있다 가려고 했는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바빠.”

“눈빛 좋아졌네요.”

난 다른 말을 했다.

막 사라졌을 때야 이놈의 왕자 새끼 꼭 찾아 조지겠다는 마음이었지만.

내심 걱정하긴 했다. 진짜다. 한 1% 정도는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기껏 살려 놨는데 어디서 객사한 건 아닌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이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런데, 잘 먹고 잘살고 있었구나.

다니엘과 새로운 호위만 달랑 데려온 줄 알았더니.

지하주차장 자동문이 열리자, 그 앞에 대기한 이들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선두에 선 건 입술이 새빨간 백인 여자다.

외모가 단연코 눈에 띈다. 순혈 불멸자가 분명했다.

그 뒤로 대략 쉰 명의 특수종과 특수 장갑으로 제작된 세단, SUV 등이 보였다.

만만치 않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몇몇과 시선이 오갔다.

움찔하며 어깨를 움직이는 놈도 있었다.

경계심? 아니, 그것보다는 호승심에 가깝다. 그런 걸 느끼며 나도 기세를 피어 올리려는데.

“눈깔아.”

알이 나섰다.

“이런 개애새들이 어디서 눈을.”

“진정하십시오.”

다니엘이 말렸다.

“너희 뭐 하냐?”

새로운 호위도 나섰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친 몇몇 경호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알은 씩씩거리며 양팔을 걷어붙이다가 숨을 고르고는 허벅지를 탁탁 털었다.

“수행원들인데 아직 길이 안 들었어. 아버지 직속에 있던 애들을 이양받았더니, 아주 파란만장이야. 제 놈들이 잘난 줄 아는 쓰레기들. 감히 누구한테 눈을 부라려?”

거침없는 언사가 나왔다.

그런데 중간에 뭔가 이상한 게 껴 있는데…… 파란만장?

“기고만장 아니고요?”

“파란만장 아닌가?”

“아닌데요.”

“기고만장, 기고만장. 좋아. 외웠어.”

알은 천재다. 이 한마디만으로 모든 상황에 맞춰 저 말을 쓸 수 있겠지.

“난 이제 가야 해.”

알이 말했다.

바쁘다며? 그럼 가야지.

나도 올라가서 남은 일을 정리해야 한다. 무혐의를 받았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보고서도 제출해야 하고, 할 일이 많았다.

“네, 어서 가시죠.”

미련이 남을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알은 내 말에 수행원에게 손짓을 보였다.

“가져와.”

수행원이 뭘 주섬주섬 챙겨왔다.

내 코트였다.

왕자가 그걸 받아 나에게 건넸다.

“싸구려지만 잘 썼어.”

“싸구려 아니라니까요.”

“이건 오다 주웠다.”

코트 외에 왕자가 장갑을 건넸다.

까만색의 가죽 장갑, 받는 순간 코트와 비슷한 느낌을 줬다.

이 말은 장갑에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오다 주운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장갑을 살피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이글이글.

지글지글.

갖가지 시선으로 날 쏘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아까도 눈을 마주쳤던 수행원 친구들이다. 눈에 삼겹살을 올려도 구워지겠네.

알이 눈치 못 챌 만큼 조심히, 날 향해 적개심을 불태운다. 왜? 장갑을 착용하며 흔들어 봤다.

손에 착 감겼다.

좋은 물건 같은데.

“내가 준 첫 번째 선물이다. 잃어버리면 죽일 거야.”

알이 말했다. 그 말에 집요한 독기가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인가.

“가보로 물려주겠습니다.”

“좋은 태도야.”

고개를 끄덕이는 알에게 물었다.

“안 가요?”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꼭 같이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알은 몹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표정을 바로 하고 말했다.

“조이를 죽인 거로 널 노리는 놈들이 있을 수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다니엘.”

알의 말에 다니엘이 작고 네모난 강화 플라스틱 카드를 건넸다.

딱 신용카드 크기다.

“골든 오러 카드입니다.”

“왕가의 힘이 필요할 때 그 카드에 적힌 곳으로 연락해.”

“네, 뭐.”

주니까 받는다. 근데 그, 내가 초능국에 도움 청할 일이 뭐라도 있으려나.

모르겠다. 결혼할 때 집이나 한 채 해 달라고 할까.

서울 아파트값을 알고 뒷목 잡는 건 아닌지 몰라.

“그럼.”

알은 입을 열었다가 입술을 깨물고 저, 음 따위의 의미 없는 단어를 몇 번 뱉었다.

“빨리 가요. 애들 겁나 기다리네.”

여전히 나에게 불쾌한 시선을 보내는 수행원이 몇 명.

그중 일부는 왕자가 나에게 건넨 두 가지 선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거, 생각보다 대단한 물건인가 본데.

눈에 담긴 탐욕이 느껴진다. 난 그걸 느낄 때마다-

장갑을 흔들고, 카드를 손에서 핑그르르 돌렸다.

그걸 본 수행원 놈들은 눈에 불을 더 켰다. 보니까 재밌다. 더 놀리고 싶지만, 진짜 헤어질 시간이었다.

특수 장갑으로 제작한 고급 세단의 뒷문이 열리고, 알이 그 앞에 선 채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살기로 결심한 모양이니, 다행이다.

죽은 생선 눈깔이 아닌, 생기발랄한 십 세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넌 내 첫 번째 친구다.”

그 말을 하고 알이 차 안으로 쏙 몸을 던졌다.

쿵 소리와 함께 차 문이 닫히고, 위잉- 하며 창문이 손가락 한마디만큼 내려갔다.

“언제 한번 놀러 와.”

친구라.

맞다. 내가 범국가적 왕따랑 친구 해 준다고 하긴 했는데.

그땐 그때고. 이제는 왕자의 지위도 찾았고 제대로 살기로 했으니 그냥 떠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알은 나에게 친구라 말했다.

호의가 느껴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따뜻한 감정은 받는 이를 기쁘게 하는 법이다. 나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간지러운 건 딱 질색이지만.

난 창문에 손을 대고 말했다.

“알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도와줄 테니까.”

“……됐어. 일개 회사원 도움 따위.”

알은 그리 말하고 상큼하게 창문을 닫고 떠났다.

진짜 거절이 아니라 부끄러워 그리 말했다는 건 나도 알겠다.

수행원 중 하나가 끝까지 날 노려봤다.

이마에 세 번째 눈이 달린 초능 특수종이였다. 가끔 저런 특이한 형태로 신체에 변화가 오는 특수종도 있었다.

그 특수종이 차에 오르며 중얼거렸다.

“왕가의 보물을…….”

음. 아무래도 내가 뭔가 대단한 걸 받은 거 같은데?

* * *

사무실에 올라가니, 팀장이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날 반겼다.

“운 좋은 새끼. 사고뭉치 새끼, 하등 쓸모없는 비루한 막내 새끼.”

사람이 참 한결같아.

“제가 하등 쓸모없는 놈이면 어지간한 불멸자는 다 폐기 처분일걸요?”

내가 한 일이 있는데 쓸모없다니, 그건 아니지.

“오만한 새끼.”

팀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은 저리해도 기분은 안 나빠 보였다.

사수와 팬더 대리의 얼굴까지 한 번 쓱 훑어본 뒤에 입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고생했어.”

사수가 말했고.

“경호원 한 무리를 슬러그 나이프 하나로 때려눕혔다며? 이래도 니가 회귀자가 아니라고?”

팬더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날 반겼다.

“아닌데요. 사실 대리님 전…….”

“전?”

“초사이어인입니다.”

아무 말이나 던져 줬는데.

“크으, 좋다.”

팬더 대리는 이게 마냥 좋단다.

왕자 납치라는 오해를 받긴 했지만, 어쨌든 일이 잘 풀렸다.

“보고서 써.”

사수가 내 할 일을 알려 줬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자리에 앉으니, 메신저에 불이 났다.

일단 무시다. 일일이 다 대답하면 보고서는 다음 달 보름쯤이나 완성할 거다.

타닥타닥 타자를 치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요한과 귀태였다.

“사랑은 허리케인, 오늘도 미호는 예쁘다.”

귀태 형은 여전하고.

“안녕하십니까. 연구팀 김요한입니다. 날씨가 참 맑죠?”

“어, 요한이 어서 오고.”

팬더 대리가 요한 형을 반겼다.

둘은 어느새 부쩍 친해졌나 보다.

요한은 인사와 함께 내 옆에 앉았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뭘? 나 바쁜데.”

“왕자님.”

소문은 말보다 빠르다. 내가 친 사고는 숨길 종류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까.”

대충 얼버무렸다.

그런 요한이 내가 테이블 한쪽 구석에 둔 장갑을 발견했다.

“음, 으흠, 이건.”

요한의 특기 중 하나다. 물건 분석, 입이 염가판매 중인 싸구려 칫솔보다 싼 것도 특기 중 하나지만.

이쪽이 본업이지.

그래서 요한은 불멸자 중에서도 연구팀에 소속되어 있는 거고.

본래는 분석팀이었다가 특기 개발 후에 옮겼다.

“으으으음. 이거 되게 좋은 것 같은데.”

다만, 아직 경험이 짧아서 모든 걸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래?”

뒤에서 팬더 대리가 관심을 보였다.

곧 그는 장갑을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

“야, 그거 비싼 것 같다.”

그건 나도 알겠다. 일국의 왕자가 준 건데, 그럼 싸구려 장갑을 줬겠나.

“눈독 들이지 마소.”

난 말하고 장갑을 챙기고 카드도 보여 줬다.

“골든 오러 카드? 이것도 받았는데 알아요?”

“알지, 모르겠냐?”

요한이 먼저 답했다.

“초능국에게 원조를 요청하면 국가급 전력으로 딱 한 번 도와준다는 소원 카드다. 함부로 쓰지 마.”

팬더 대리가 말을 이었다.

엄청 대단한 물건이었네. 왕자 놈 진짜, 나에게 반한 건가.

“왕자를 어떻게 꼬드긴 거야? 비법이 뭐냐?”

옆에서 귀태 형이 끼어들었다.

“뭘 꼬드겨. 같이 사선을 넘다 보니 우정이 생긴 거지.”

대충 답해 줬다.

“같이 사선을 넘는다. 오케이, 접수. 미호랑 같은 작전에 나가야겠다. 같이 사선을 넘으면 우리 사이에도 진전이 있겠지.”

꿈도 야무져요.

“사랑은 허리케인.”

귀태 형은 그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저 인간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지.

“부러운 자식.”

요한도 떠나고.

난 보고서에 전념했다. 너무 지루할 때만 메신저에 답을 툭툭 해 줬다.

미호와 기남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기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인상적인 연락도 있었다.

비만 불멸자 강푸름이었다.

[강푸름] 나 살 다 뺐다.

고생했다. 자식아.

애초에 무슨 불멸자가 살이 그렇게 찌냐고.

얘도 특이체질이지.

보고서를 작성하고, 승인 올리고.

밖을 보니 석양이 창가를 타고 넘어와 사무실 내부에 황혼의 빛을 흩뿌렸다.

긴 하루였다.

팀장이 퇴근하고 팬더 대리와 사수도 가고 나도 집으로 향했다.

홈 마이 스윗 홈이다.

문을 벌컥 열며 말했다.

“기남아, 형 왔다.”

“……미친 새끼.”

“형이 오늘 좀 피곤하거든.”

“또라이 새끼.”

한결같은 자식.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저녁으로 대충 간장계란밥이나 해 먹었다.

“왜?”

밥 먹는데, 기남이 새끼가 자꾸 빤히 쳐다보기에 물었다.

“나도 할 수 있다.”

기남은 그 말만 하고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

뭘 할 수 있는데?

씻고 먹고 양치하고 침대에 누우니, 편-안했다.

알은 잘 갔으려나?

띠링.

그렇게 생각하는데, 폰이 울렸다.

[알 수 없음] 내 연락처야. 등록해.

메신저에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친구 추가를 하자 프로필 사진이 떴다.

오만한 꼬맹이가 내 코트를 두른 사진이 보였다.

이름을 등록했다.

헤어질 때는 한동안 못 볼 것처럼 굴더니, 곧바로 연락이 오네.

[십 세] 잘 자고.

[나] 또 봐요. 왕자님.

[십 세] 알이라고 불러.

[나] 그래요. 알.

알은 정말 날 좋아하는 것 같다. 뭐, 내 매력 때문이겠지.

하여간 이놈의 매력, 사람을 홀리곤 하지.

난 잤다. 아주 푹 잤다.

꿈도 안 꾸면서 자고 일어나니, 혼자였다.

기남은 아침마다 내가 기절시키니 아예 30분 일찍 출근했다.

자식, 요령이 생겼네. 내일은 나도 30분 일찍 일어나야지.

곧바로 씻고 먹고 나도 출근했다.

“굿모닝, 대리님.”

사수는 언제나 일등 출근이다.

“사장님 호출이야.”

그리고 오자마자 난 사장실로 향해야 했다.

“아침부터요?”

“직전 임무가 사장님의 오더였잖아.”

당연히 찾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난 사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사장실로 향했다.

앞을 지키는 비서 누나한테 윙크 한 번 해 주고.

“미친 거야?”

아침 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얌전히 안으로 들어가자, 사장님이 소파에 앉아 식사 중이었다.

“이번 임무로 진급은 안 된단다.”

사장이 에그 머핀을 씹으며 말했다.

먹는 걸 보니까 배가 고프다.

“그래요?”

본래 이번 호위 임무로 진급하기로 했었는데, 내가 임무 실패란다.

임원진이 무척 거세게 반대했다고 했다.

“아쉽네요.”

말만 그렇다.

진급 조금 늦게 한다고 하늘이 쪼개지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그래서 질이 안 되면 양으로 하면 되거든?”

“……뭘요?”

“진급 조건 채우는 거.”

사장은 날 그냥 놔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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