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96화 (96/488)

96. 사고뭉치

“저녁은 어땠어요?”

다가온 에바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은 된장찌개였다.

“그거 맛 이상해.”

에바 입맛에는 안 맞았다. 당연하지, 후각이 예민한 변신족은 냄새에 민감하니까.

처음 맡는 향이니, 꺼려졌을 거다.

왕자님은 만족한 것 같던데.

“내일은 나들이 가는 거죠?”

“그래. 가로수길? 거길 꼭 가 보고 싶다니까.”

웃으며 한 걸음 안쪽으로 다가온다.

왕자의 강력한 요청으로, 난 몇 가지 한국 식자재를 호텔에서 받을 수 있었다.

특별히 주방까지 딸린 스위트 룸이니 이런 게 가능했지.

아니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역시 돈이 최고지.

“유.”

숨결이 가깝다.

난 에바를 보며 변신족의 본능에 대해 떠올렸다.

욕구는 곧 충동이 되고, 그 충동을 참는 건 일주일을 굶은 채로 눈앞에 초코파이를 던져 놓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살인 충동, 성적 충동, 다양한 욕구는 곧 충동으로 표현되고.

에바는 아무래도 성욕이 그 주체가 되는 것 같았다.

욕구와 충동은 변신족마다 다른 법이니까.

코와 코가 맞닿고.

에바가 입술을 부딪쳐 오기에, 난 그녀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입술이 닿는다. 뜨겁고 말랑한 덩어리가 앞니를 열어 달라고 아우성친다.

“음?”

그런 상황에서 난 에바의 뒷머리 끄덩이를 잡고 당겼다. 순간 에바의 콧구멍과 열린 입, 혀가 보였다.

난 서슴없이 오른손에 쥔 청양 고춧가루를 그녀의 코와 입에 쑤셔 넣었다.

반사적으로 에바가 힘을 썼다.

뭐, 너만 변신족은 아니잖냐?

나도 버텼다.

바둥거리는 발은 발로 밟고, 목 근육에 핏줄이 솟을 정도로 힘을 주는 것 같아서 나도 머리끄덩이를 쥔 왼팔 근육에 힘을 줬다.

잠깐이면 충분했다.

코점막을 파고든 고춧가루는 곧 그녀의 얼굴을 시뻘겋게 바꾸고.

방심한 변신족의 후각은 곧 약점이 되니.

“끄으으으아아아.”

에바가 비명을 질렀다.

놀란 다니엘이 먼저 주방에 들어왔다.

“에바?”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뒤로 물러서며 개수대에 대충 손을 털었다.

에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도 안다. 나 각성하고 나서 처음에 저 후각 컨트롤을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실수로 후추를 쏟아붓고 어찌나 고생했는지.

미안해요. 에바.

그 고춧가루에는 후춧가루와 소금 따위가 섞여 있어요.

기왕 코로 먹는 거 편식하면 안 되잖아요?

“젠장, 무슨 일이야? 보이?”

“몰라요.”

밖으로 나서니, 로버트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몹시 놀란 표정으로 대답하자 반대쪽에서 조이가 나온다.

“왕자님 곁을 떠나면 안 되죠. 조이.”

그렇게 말하니.

“잠깐 지켜 달라고.”

조이가 나한테 말했다.

그러지 뭐.

난 왕자님 곁으로 왔다. 저녁 든든하게 먹고 한창 글레이브 걸스 직관 촬영을 스트리밍으로 보던 십 세가 날 본다.

사실 이건 도박이다.

난 왕자가 살고 싶어 한다고 판단했고.

이곳이 안전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증거도 없고, 왕자가 나에게 직접 요청한 건 하나뿐이다.

살려 달라는 말.

여기서 왕자가 내 말을 따라 주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다.

나중에 에바가 따지면, 당신이 무서워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하지 뭐.

“왕자님, 야반도주해 보셨어요?”

내가 물었다.

“아니.”

“해 보실래요?”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층이라 반쯤 열리는 창을 힘으로 밀어 뜯듯이 전부 열고, 이불을 가져와 왕자를 등에 업고 단단히 묶었다.

“고소공포증 있어요?”

“없어.”

그래, 천재 꼬마, 강단도 좋지.

결심한 아이의 얼굴을 보니, 나도 덩달아 결심이 선다.

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난 창문으로 나가 벽을 탔다.

* * *

에바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찔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코를 찔렀다.

끄륵!

코에서 빨간 물이 흘렀다.

“끄으으으.”

누군가가 물을 흘려줬다. 그걸 얼굴에 들이붓고 몇 분이 지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에바가 외쳤다.

“빌어먹을 꼬마!”

“누구?”

“유!”

로버트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곧장 왕자가 있던 방으로 향했다.

뒤따라 다니엘과 로버트, 에바도 들어왔다.

그들의 눈앞에 보인 건 휑한 방과 열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뿐.

로버트가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 밑에서 유라는 꼬마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바람 소리 사이로 예민한 불멸자의 청각이 꼬마의 목소리를 잡았다.

“왕자님이 밤바람을 쐬고 싶다고 해서 산책하고 올게요.”

그걸 믿으라고?

“미친 보이.”

로버트가 중얼거렸다.

“보이 아니고 유광익이라니까.”

한국 꼬마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내려섰다.

이미 해는 졌고, 어둠이 드리워지는 시간이다. 호텔 앞의 불빛이 둘을 비췄다.

“미친 한국인 꼬마가 왕자님을 납치했다.”

로버트가 말했다.

“전 병력 전부 모아! 지금 당장 쫓는다!”

에바가 먼저 움직였다. 곧 셋도 그 뒤를 따랐다.

조이는 혀를 차며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당장 전 병력 1층으로 집결. 불멸특수대원이 왕자님을 납치했다.”

숨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소란을 숨길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광익이 벽을 타고 내려오는 걸 본 사람도 있었다.

호텔 내에 있던 화림의 정보원은 부리나케 움직이는 이들을 눈으로 좇았다.

곧 그들이 하는 말도 들었다.

몇 가지 말, 상황, 왕자님이 사라졌다는 것도 곧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걸 주도한 놈이 불멸특수대라는 것도.

정보원은 화림에 긴급 통신을 넣었다.

* * *

“안 챙겨 주셔도 됩니다.”

이중봉의 말에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알아서 다 하는 놈입니다.”

“그러는 것치고는 끼고 산다며?”

중봉은 속으로 강희모를 욕했다.

입 싼 분석팀 새끼.

“안 끼고 삽니다.”

“아니기는.”

사장은 깍지 낀 손을 풀며 말했다.

“산 잘 타는 놈 있으면 손 내밀어주고 싶잖아.”

“혼자 놔둬도 잘 타는 놈을 끌어줘서 뭐 합니까?”

“더 빨리 오르게 하는 거지. 다음 능선으로 더 빨리 갈 수 있게.”

“급하게 가다가 발목 접질립니다.”

“이번 일이 그런 건 아니잖아.”

중봉도 알았다.

재작년에도 한번 한국을 방문했던 코리안 빠돌이 왕자.

그 이면에 몇 가지 정치적인 문제도 있긴 했지만, 사실상 큰일은 아니다.

고로 이번 일은 사장이 광익을 밀어주기로 작정한 거다.

그걸 일개 팀장이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팀원이니 할 말은 한다. 그게 이중봉이란 인간이었다.

“천천히 공들여 자라게 해 주십시오.”

“그런 사람이 이제까지 신입을 그렇게 갈아치웠어?”

그건 기본도 안 된 놈들이니까.

불멸특수대에 들어왔다고 들뜬 놈, 실력도 없으면서 자만심만 가득한 놈,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는 놈.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놈이 있었어야지.

다 기준 이하였다.

그래도 최소한의 의무는 했다.

제대로 자라라고, 정신적인 면을 다독이기 위해 욕설이라는 채찍을 휘둘러 줬다.

못 버티고 나간 놈 잘못이지.

그게 어떻게 자신의 잘못인가.

중봉은 당당했다.

“제가요?”

“말을 말자.”

사장은 손을 털었다.

“어쨌든, 그 친구는 오티 때부터 내 사람이야. 벌도 섞였지만, 어쨌든 이번 일은 휴가이자 보상이다.”

성질이 꽤 사납긴 하지만, 그래도 끽해야 애다. 왕자라는 후광에 밀려 제 일을 못 한다면 실망하겠지만, 크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래.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이번 임무가 좋은 경험은 될 것이다.

시간을 보내는 법.

요인 경호를 위해 필요한 건 실력보다 인내심이라는 것도 알 테고.

이제까지 광익이 나선 일은 전부 거칠었다.

어스 블랙홀 웨이브, 형태변환자 검거, 아더 사이드 축능석 경호, 머니 & 세이브 테러, 마지막 박병준 박사 초청.

특히나 마지막 일에서는 큰 사고도 쳤다.

실험체를 데려온 거다.

고로, 사장은 광익에게 임무이자 벌을 준 거였다.

목적은 두 개다.

하나는 인내심을 기르라는 거고.

둘은 실험체를 빼돌린 것에 대한 벌이었다.

그 왕자, 성격이 참 만만치 않으니, 임무가 꽤 즐거울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큭큭 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웃으십니까?”

“이중봉 팀장, 그 왕자 호위해 봤지?”

두 해 전에는 팀으로 움직였고, 다들 꺼리기에 자신이 합류했었다.

중봉은 왕자를 떠올리며, 그 곁에 서서 낑낑댈 광익을 떠올렸다.

그래. 이 일은 벌이자 보상이다.

왕자를 감내해야 하는 게 벌.

이후 떨어질 대가가 보상.

중봉도 웃었다.

사장과 미묘하게 의견을 갈렸지만, 둘은 공통으로 광익이 고생하는 걸 즐겼다.

본래 두들겨 맞은 철이 더 단단해지는 법이니까.

둘이 같은 생각을 하는 그 타이밍에 사장실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곧 1년에 한 번도 듣기 힘든 사장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왕자가 실종됐습니다.”

“자세히 말해.”

“유광익 이급 사원이 데려갔답니다.”

“……응?”

사장이 짧은 침묵 끝에 되물었다.

“그렇답니다.”

비서도 해 줄 말이 없었다.

그게 들은 내용 전부였다.

“이중봉 팀장.”

“네, 팀 소집하겠습니다. 분석팀도 가동합니다.”

중봉이 곧바로 나갔다.

그걸 보며 사장은 혀를 찼다.

쉬운 일이다. 왕자를 2주 동안 지키고, 적당히 한국 유람이나 시켜 주면 끝날 일.

그런데 이건 뭔가.

“이 친구는 사고를 안 치면 일이 안 되나?”

사장이 물었다.

비서는 할 말이 없었다.

* * *

호텔 밖으로 나와서 달리며 인파 사이로 파고들었다.

자, 곧 뒤를 쫓는 놈들이 잔뜩 올 테고.

일단 본사에 연락해야겠지.

달리다 보니 지하로 들어가는 PC방이 보였다.

왕자를 데리고 들어가자, 사장이 슬쩍 나와 왕자를 바라봤다.

요즘은 PC방도 무인 충전식이다. 대강 시간을 충전하고 구석에 앉아서 스마트폰 전원을 켰다.

호텔 내에서야, 재밍 장치가 기본이었다.

전자 장치 사용이 안 된다는 거지.

그래서 지금에야 통신을 시도할 수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팀장, 팬더 대리, 사수.

전부 다 알려야겠지만, 지금 당장 급한 건 그쪽이 아니지.

“임무 중 아니었어?”

전화를 받은 상대가 물었다.

“맞아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전에 부탁 하나 들어준다고 했었죠?”

“퇴근했어. 내일 얘기해.”

“급해요. 대리님.”

강희모 대리는 눈치가 빨랐다.

내가 사고 쳤다는 걸 금세 알아챘다는 소리다.

“뭐야?”

“로버트, 다니엘, 조이, 에바. 차례로 불멸자, 초능 특수종 둘, 변신족이에요.”

말하며 이제까지 그들에 대해 알아낸 걸 읊었다.

로버트가 착장한 무기와 방어구.

나머지 셋도 마찬가지다.

특히 조이의 능력도.

“네 명 출신부터 시작해서 현 상황까지 딥하게 한번 파 주세요. 뒤에 누가 있는지, 어떻게 해서 지금 여기에 있는지까지.”

“내일까지?”

“지금요.”

바빠, 이 양반아.

전화를 끊었다. 끊기 무섭게 팀장한테 전화가 왔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첫 마디가 귀에 착 달라붙는다.

“네, 저도 건강합니다. 팀장님. 평안하시죠?”

“무슨 미친 짓이냐?”

나도 모르지.

아직은 모른다.

“왕자님 신병에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걔를 데리고 나와? 위협이 있으면 그쪽 애들한테 알려야지?”

“그쪽 애들이 위협이라서요.”

“확신해?”

“반쯤?”

왕자를 보며 말했다.

“시발. 반쯤, 뭐? 반쯤?”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이미 일은 일어났는데 어쩌라는 겁니까.

“너 이 새끼, 잡히면 뒈진다.”

잡히면 진짜 죽어요.

아까 보니까 로버트 눈에서 빛이 뿜어지더라고.

“네,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소싯적에 우리 동네 술래잡기 왕이었습니다.”

다급한 와중에도 팀장은 말을 잃었다.

사람이 말이야. 위트를 잃으면 안 되지.

“미친 또라이 새끼. 하여간 이쪽으로는 연락도 하지 말고 숨어 있어.”

네?

“지원 없어요?”

“유꽝익 사원님, 지금 왕자 데리고 여기 오면 국제 문제예요. 니가 데리고 다니다가 죽어도 국제 문제고요. 현 상황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시발, 개인의 일탈로 인한 납치거든요. 지금 너 님은요, 납치범이자, 도망자 신세라는 거고요.”

에, 이건 예상 못 했네.

“상황 수습할 때까지 잡히지 마라. 꽝.”

“노력 중입니다.”

전화를 끊고 왕자를 다시 챙겼다.

“가시죠.”

PC방은 언제나 그러하듯 소란스러웠다.

난 왕자를 호위하며 그들이 들고 있는 장비를 봤다.

분명 추적 장치가 있었다.

왕자의 몸 어딘가에 박혀 있을지도 모르지.

일부러 지하로 왔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겠지?

맞았다.

나가는 길에 보니, 인중이 빨갛게 물든 에바가 있었다.

그녀는 날 발견하자마자 동공이 세로로 쭉 쪼개졌다.

이 양반아, 여기 도심 한복판이야.

난 왕자를 들고 뛰었다.

“악.”

왕자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참아요.”

말하고 난 왕자를 안고 내달렸다.

왼쪽으로 짓다 만 건물이 보였다.

난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