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친한 척 사기
위화감은 무엇인가.
어색함이다.
그럼 난 왜 어색함을 느끼는 걸까.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일단 이 왕자 새끼가 문제다.
“이분들 이름이 뭐라고?”
“글레이브 걸스입니다.”
긴 창대를 들고나와 춤을 추는 그룹인데, 최근에 차트 역주행으로 핫이슈였다.
왕자는 최근, 이 걸그룹에 폭 빠졌다.
겨우 십 세가.
“조숙하시네요.”
“네 알 바 아니다.”
그래. 내 알 바는 아니지.
그런데 너 이상하다는 건 아냐?
평소에는 한국 음식, 걸그룹, 보이그룹, 예능 따위를 보다가도 방심하면 이런 말 따위를 하곤 하잖아.
“한국에서 살 수 있다면.”
못 들은 척 지나가 주면 에바가 와서 톡 하고 어깨를 두드린다.
“왕자님, 의무를 잊으시면 안 되죠.”
에바, 양키, 변신족.
몸매가 죽여주고, 얼굴도 예쁜 편이다.
난 왕자가 선을 넘어서 에바한테 흑심을 품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면 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에바는 왕자를 살뜰하게 챙기는데, 정작 왕자는 에바보다 나랑 시간을 더 보냈으니까.
그냥 한국 빠돌이라 날 좋아하는 거라면 이해하겠지만.
이게 또 그런 거로 보이지는 않아서.
“머어저어리.”
굳이 머저리란 단어를 길게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네.”
“글레이브 걸스를 만나고 싶어.”
“저랑 안 친해서요.”
무슨 개소리냐는 듯 왕자가 큰 눈으로 날 바라본다. 난 그 눈알을 콕 찔러 주고 싶었다.
표정이 더 가관이다. 경멸이란 두 글자를 얼굴로 쓴다.
어린 나이에 몇 개 국어를 하는 천재이니, 그만큼 표현력도 풍부한 건가.
“당연한 말은 하지 마. 멍청이.”
“방법이 없다는 거죠.”
이런 밉상인 왕자인데.
왜 내 눈에는 마리랑 똑같아 보일까.
아니, 마리랑은 다르지.
마리는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 같았고.
이쪽은 죽기 직전에 빛을 뿜는 반딧불 같단 말이지.
왜 그럴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하는데 다니엘이 입을 연다.
“눈깔 돌려라.”
다니엘, 양키. 초능 특수종.
생긴 건 나쁘지 않은데 성격이 개차반이다.
“너 안 봐.”
“미친놈.”
뭐, 이런 사이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면 좀 좋아?”
조이, 중동 미남, 초능 특수종.
이쪽은 서글서글한 성격에 노는 걸 좋아한다. 무엇보다 트럼프를 즐기는 친구다.
“한 판?”
“좋지.”
도박을 즐기는 게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데, 그걸 포기할 수도 없단다.
그래서 화투를 가르쳐 줬다.
“아수라발발타.”
“그건 무슨 의미야?”
“주문 같은 거지.”
고스톱을 가르쳐 주자 신났다.
대충 어울려 주는 사이, 에바가 다가왔다.
에바의 취미는 뭘까. 모르겠다.
하나 아는 건, 날 좋아한다는 거다.
“평소에 훈련 열심히 해? 아니면 모든 불멸특수대원이 다 이래?”
“제가 특별한 거죠.”
그러면서 여러 의미가 담긴 손짓으로 내 몸을 쓰다듬었다.
19금의 의미를 제외하면 내 몸을 더듬으며 육체를 살피는 거로 추정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도 위화감이 느껴진다는 거다.
우리는 한편이고 왕자를 지키는 일에 힘을 합하는 사이잖아?
그런데 이상하게 날 경계하는 것 같단 말이지.
그것도 은근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그래서 나도 그렇게 했다.
정확히는 한 사람의 행동을 카피했다.
방귀태다.
그 형은 사랑은 허리케인이라 외치는 바보니까.
고로 난 바보를 연기했다.
“헤, 일 끝나면 한잔하기로 한 거 잊으면 안 돼요. 에바.”
이렇게 말할 때 침까진 흘리진 않지만, 적당히 헤픈 웃음은 필수다.
“물론이지.”
조이와는 패를 돌리고.
에바와는 약속을 거듭하며 농담을 따먹고.
“헤이, 보이. 불멸자는 몸을 단련할 줄 알아야 해.”
로버트, 흑곰, 불멸자.
이 작자와는 운동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눴다.
“저도 나름 합니다.”
“팔씨름 한 번 할까?”
불멸자치고는 특이하게 힘자랑을 좋아하는 흑곰이다.
그와 팔씨름을 하며 져 주면.
“헤이, 보이. 더 단련해. 약한 남자는 쓸모가 없다.”
이리 말하며 이두박근을 보여 준다. 그걸 보며 에바는 내 팔을 쓰다듬고.
다시 조이는 옆에서 한 판 더 하자고 종용한다.
간간이 왕자가 날 불러 욕하고.
다니엘은 날 외면한다.
모두가 다 날 찾는 것 같아서 복잡해 보이지만.
날 중심으로 보면 단순했다.
다니엘은 무시.
에바와는 썸.
조이와는 친구.
로버트와는 형제.
뭐, 이런 느낌이다.
난 이들과 꽤 친해졌다.
그걸 더 깊게 파고들어서 보면 난 이들과 꽤 친한 척을 하는 사이가 됐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게 사흘에서 닷새, 엿새가 되기 전 새벽.
왕자가 자기 싫다며 투정을 부렸다.
역시 십 세인가.
“다른 사람의 하루와 내 하루는 달라.”
핑계가 이렇다.
“왕자님.”
에바와 조이, 둘 중 하나는 꼭 깨어 있었는데 오늘은 조이 차례였다.
“내일 아침에 일찍 깨워 드릴게요.”
“흥.”
콧방귀를 뀌는 왕자의 목을 수도로 내리칠까.
그럼 조이가 나에게 환호성을 보낼 것 같은데.
참았다.
난 내 위치를 고수했다.
한 발자국 떨어진 채로 대충 시간이나 때우며 돌아갈 불멸특수대 경호원의 역할에 충실했다.
칭얼거리던 왕자는 날 가리켰다.
“야, 자장가를 불러라.”
시방새가.
“네?”
“날 편안하게 재워야 할 거다.”
이미 눈이 반쯤 감긴 주제에.
부탁해.
조이가 뒤에서 입 모양을 보였다.
그래. 왕자로 태어나지 못한 내 죄지.
“가시죠.”
난 왕자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호화로운 침대에 눕히니, 그 바로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자는 에바가 보였다.
다니엘, 조이, 에바, 로버트.
이 넷에 나까지 총 다섯과 밖을 지키는 대략 스물에 가까운 호위 병력까지.
왕자 하나 지킨다고 여러 사람 손을 타는구나.
“불러라.”
대충 자장가를 불러주니, 왕자는 곧 고로롱거리며 코를 골았다.
웅얼거리는 잠꼬대가 들렸다. 나 외에 들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서 왕자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난 못 본 체했다.
괜히 ‘어제 자면서 질질 짰습니다’ 하면 내일은 또 얼마나 지랄하겠나.
이틀 뒤에 서울 나들이를 한다고 했던가.
가로수 길을 가고 싶다고 했었나.
그렇게 엿새째가 지난 뒤.
별일 없는 아침을 보내고.
조이가 쉬러 간 사이, 난 왕자가 고집을 부려서 식사를 챙겨야 했다.
마음 같아서야 고추장 폭탄 비빔밥 같은 걸 해 주고 싶지만, 참았다.
“간장 계란밥입니다.”
“누가 먹는 건데?”
돈 없고 밥해 먹기 귀찮은 자취생의 베스트 메뉴다.
“주로 대학생이 즐겨 먹는 메뉴죠.”
솔직히 나도 모른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메뉴라 해 준 거지.
왕자는 드물게 욕을 하며 먹지 않고 맛있다고 했다.
입맛이 까다로운 듯하면서도 단순하다.
한국 빠돌이 왕자의 식사는 대부분 내가 담당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왕자가 시켰고 난 했다.
위화감을 무시한 채로, 난 이들과 잘 어울렸다.
“아, 에바, 옷에 케첩이 튀었어요.”
이번에 해 준 건 치즈 계란말이다.
난 손재주가 나쁘지 않았고, 불멸자로서 미각도 예민했다.
고로 내가 만든 요리는 꽤, 상당히 먹을 만했기에.
에바나 조이도 곧잘 같이 먹곤 했다.
그사이 다니엘은 꿋꿋이 혼자만 따로 먹었다.
저 새끼는 타고난 아웃사이더다. 왕따다. 어쩔 수 없다. 성격이 별난 놈인걸.
“최악이야.”
에바는 결벽증이 있었다. 옷에 뭐가 묻는 걸 싫어했다.
내가 케첩을 묻혀 놨으니, 신경질이 났을 거다.
물론 그녀는 내가 그런 짓을 한지 모른다.
손은 눈보다 빠른 법이니까.
“야, 노란 깡통.”
그사이 다니엘을 부르자, 그가 눈을 부라렸다.
“죽고 싶나?”
아서라. 싸우면 네가 죽지 내가 죽겠냐?
“뭐? 죽여? 이 새끼가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왕자님도 저 새끼 싫죠? 몇 대 패도 됩니까?”
“니가 더 싫어.”
왕자가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다.
“네, 왕자님도 저 새끼 싫어하는 것 같더라니.”
“까불지 마라. 한국인.”
“양키야, 덤벼.”
“그만해, 다니엘.”
왕자가 다니엘에게 말했다.
“콧대를 한번 꺾어 놔야겠습니다.”
다니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여간 단순한 새끼.
소란이 일자, 에바가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며 외쳤다.
“로버트!”
“소리 안 질러도 들려.”
그래, 로버트는 불멸자니까.
어느새 문을 열고 로버트가 들어왔다.
난 그사이 포크를 쥐고 당장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기척 흘리기다.
로버트가 그걸 보고 반응했다.
나와 다니엘 사이를 가로막는다.
“그만.”
로버트가 힘을 써서 다니엘의 어깨를 쥐었다.
“놔. 저 새끼 주둥이를 찢어 놓겠다.”
침착하고 명확한 영국 발음으로 말하니, 저 말이 되게 신사적으로 들렸다.
“베.”
난 혀를 내밀어 줬다.
“죽인다. 죽인다.”
다니엘은 중얼거리며 로버트에게 끌려가고.
“젠장, 유, 왜 그러는 거야?”
에바가 나오며 날 나무랐다.
“에바, 엉덩이에도 묻었어요.”
내가 다시 말하자, 그녀가 인상을 썼다.
“젠장.”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밖에는 로버트가 다니엘을 진정시키고 있고.
조이는 잘 테고.
고로 지금 여기는 순간적으로 왕자와 나 외에 듣는 귀가 없다.
난 왕자와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살고 싶으세요?”
이 한마디에는 참 많은 것이 응축되어 있었다.
왕자의 눈가가 떨렸다.
이번 임무의 목표는 둘.
하나는 왕자의 안전.
둘은 왕자의 목적.
둘 중에 우선인 건? 왕자의 안전이다.
얄밉고, 욕부터 배워서 입에 걸레를 문 왕자였지만, 고작 열 살, 십 세다.
살고 싶다는 애를 죽일 수는 없지 않나.
“무슨 개수작이야?”
왕자가 물었다.
천재는 천재였다. 고작 열 살짜리가 이리 말을 잘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 보니.
신기하긴 하지. 그래도 애는 애다.
“살고 싶다면서요. 시간 별로 없습니다.”
로버트가 다니엘을 진정시키는 데는 5분도 필요치 않을 거고.
에바가 돌아오는 데는 2분이면 충분하다.
암살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난 위화감을 느꼈고 방귀태와 같은 바보 연기를 하며 알았다.
왕자는 죽는다. 적어도 자신은 죽으리라 믿고 있고.
경호원은 그걸 방관할 것이다.
이유? 원인? 모르지.
내가 아는 건 하나다. 얘는 애고 살고 싶어 한다는 것.
“틱톡틱톡. 시간 갑니다. 살고 싶어요?”
다시 물었다.
왕자의 눈망울이 떨렸다.
“죽고 싶지 않아.”
그놈의 자존심은.
“의뢰 접수, 불멸특수대원 유광익, 지금부터 알 칼리드 볼리아나 님의 요청으로 작전 돌입합니다.”
“알이라고 불러도 좋아.”
고새 마음이 풀리셨어? 애는 애라니까.
“그 계란말이라는 게 본래 이렇게 양념이 튀는 거야?”
에바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가끔요.”
내가 원할 때만 그렇지.
“미안해요. 에바, 자꾸 다니엘이 절 노려보는데 알죠? 불멸자의 예민함은?”
난 불멸자의 예민함을 핑계로 댔다.
“다니엘한테 주의를 시킬게. 하지만 너도 조심해야 해. 다니엘을 흥분하게 하지 마.”
“네, 제 잘못이에요.”
잘못을 인정하고 슬며시 웃는다.
“그 옷이 더 잘 어울려요.”
그녀는 외모 칭찬을 좋아했다.
웃는 에바를 뒤로 다니엘이 들어왔다.
“미안했다.”
선뜻 사과하며 손을 건넸다.
다니엘은 그걸 무시하고 지나쳤다.
“유, 보이, 다니엘이 향수병에 걸렸어. 이해해.”
로버트가 열린 문틈에서 말했다.
“닥쳐. 로버트.”
“네, 이해해요.”
앙탈 부리는 금발 머리 다니엘을 두고 난 에바와 희희낙락 떠들었다. 분위기 띄우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렇게 저녁까지 먹어 치운 뒤, 주방 정리를 하자니.
에바가 들어왔다.
“미안. 왕자님도 별나신데, 다니엘까지.”
이렇게 둘이 있는 시간이 꽤 있었다.
그때마다 에바는 나를 향해 유혹의 소나타를 췄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거나 슬쩍슬쩍 몸을 스치기도 했다.
오늘도 그랬다. 주방에 선 나에게 에바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