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왕자의 안전을 위해서
아버지는 난감한 일이 생겼을 때 일단 내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생각하라고 했다.
물리적인 위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적 위치를 고려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나서도 되는 일인가.
그렇게 해결될 일인가?
안 된다면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이도 저도 생각하기 싫다면,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도 되는가.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해라.
아버지는 이렇게 조언했었다.
그럼 나 집에 가도 될까?
갑자기 기남이가 보고 싶었다.
우리 기남이, 형 없이 잘 지내고 있지?
“뭐 해? 안 가?”
왕자라는 새끼가 왜 갑자기 라면을 찾고 지랄이냐고.
내 위치를 떠올렸다.
불멸특수대 요원이다.
여기서 화내면 안 된다. 그럴 수 없다. 화낸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임무만 실패하는 꼴이다.
가면을 쓰자, 난 어른이니까.
“곤란합니다. 왕자님.”
난 밀착 경호, 즉 꼭 붙어서 경호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 자리에 있다.
만나는 순간부터 떨어질 수 없다는 거다.
“시발, 쟤 뭐래.”
이 새끼는 한국말을 욕으로 배웠나.
야, 나 밀착 경호잖아. 못 가. 알지?
눈으로 뒤에 선 금발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날 외면했다.
야, 왕자를 설득해야지, 여기서 모른 척하면 어떻게 하냐.
아니, 왜 쌩을 까.
“너 이름이 뭐라고?”
“불멸특수대 요원 유광익입니다.”
“입 닥치고 다녀오라고 딱 한 번만 더 말한다.”
이 말을 안 들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
고문과 폭력 없이, 저 왕자가 한국에 온 이유를 알아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친분을 쌓는 거다.
그래. 그렇게 하자.
저 새끼 입안의 혀가 되자.
여기서 왕자의 머리통을 쥐어박는 순간, 마리가 죽고 사장은 실망할 것이다.
“금세 다녀오겠습니다.”
말하고 문을 나서니, 앞을 지키는 각진 턱의 흑인 남자가 날 힐끗 봤다.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 합니다.”
“보이, 네 임무를 잊으면 곤란해.”
“대신 다녀오실래요?”
“보이, 내 일은 이 문 앞을 지키는 거야.”
어깨가 벌어지고 덩치가 큰 친구다. 버릇처럼 상대를 살피니, 가슴팍에 권총을 지녔고 뒤쪽 허리춤에는 까만 쇠막대기 하나를 꽂았다.
거기에 입고 있는 까만 슈트도 재질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밀도 방탄 섬유다. 내 코트만큼은 아니지만, 훌륭한 방어구이자 옷이다.
왕자와 친해질 수 없다면 이쪽을 공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목적만 달성하면 되니까.
편의점에 내려가서 불닭면과 피로회복제랑 바나나 우유 하나를 사서 올라갔다.
“전 유광익입니다. 마셔요.”
흑인 문지기한테 주자, 이게 뭐냐고 물었다.
“먹으면 힘이 나는 음료수.”
긴 여행을 다녀온 직후다.
특수종이라고 해도 피로를 느끼기 마련이다.
“땡큐, 유. 내 이름은 로버트다.”
“그래요. 로버트, 당분간이지만 잘 지내 봐요.”
로버트가 흰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사람 좋은 시골 농부를 보는 기분이다.
“왕자님, 불닭면이 왔습니다.”
“늦어, 굼떠, 굼벵이.”
저 새끼 입을 꿰매 버릴까.
아니, 왕자 입안의 혀가 되기로 한 게 십 분 전이다. 참자.
“끓일 줄 모르시죠? 끓여 드릴까요?”
“갓뎀, 머저리, 베뜨, 이미 다 봐서 알아. 나와.”
베뜨는 뭐야? 불어 발음이었다. 욕인 게 분명해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슬쩍 뒤에 보이는 스마트폰 화면 속 스트리밍 앱에서 불닭면을 먹고 욕하는 러시아 여자가 보였다.
다른 경호원, 혼혈로 보이는 여자 경호원이 이미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뒀다.
“에바, 넌 이런 일 하지 마.”
왕자가 그걸 보고 물을 몽땅 싱크대에 버렸다.
쟤가 뭐하나 싶어서 보는데.
“헤이, 너 이리 와서 물 저거 받아서 끓여.”
왕자가 손가락으로 날 한 번 가리키고 다시 더럽게 비싸 보이는 생수병을 가리켰다.
“제가요?”
“그럼? 내가 해?”
아까는 네가 한다며.
물까지 끓일 수는 없다는 거냐?
“네네.”
조카 라면 먹는 데 물 끓여 준다는 마음으로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버튼을 눌러 줬다.
“다 했으면 꺼져.”
왕자가 말했다.
원투를 날릴 뻔했으나, 어느새 내 마음에는 부처님이 자리했다.
내가 외운 불경이 있었으면 지금쯤 속으로 오십 번쯤 되뇌었을 거다.
불경 대신 발라드 노래 한 곡을 되새기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왕자는 라면 비닐을 뜯고 조심스레 끓은 물을 붓고 면이 익는 걸 기다렸다.
그 과정 하나하나를 아주 천천히 집중해서 했다.
누가 보면 도자기라도 빚는 줄 알겠다.
면이 익는 동안 금발 남자에게는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 머리카락을 보니까 바나나 우유가 생각났다.
“달아요.”
피로를 푸는 데 달달한 것만 한 게 없지.
“임무 외에 잡담은 필요 없다.”
이 양반도 까칠하네. 우유도 안 받았다.
“뭘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굴어. 헤이, 내 이름은 조이다. 그 친구는 다니엘, 저쪽은 에바. 바깥에 있는 친구는…….”
“로버트죠?”
“벌써 친해졌군.”
나를 제외한 왕자의 경호원은 총 넷이었다.
금발 싸가지 다니엘.
그리고 저쪽에서 날 향해 눈웃음을 보인 여자가 에바.
바깥의 흑곰이 로버트.
마지막으로 지금 넉살 좋게 웃는 눈이 깊고 코가 길쭉하고 큰 친구가 조이였다.
조이와 로버트는 왕국 출신 같고, 다니엘은 어디 영국? 에바는 혼혈 같았다.
“드실래요?”
“뭔데?”
“먹어 보면 알아요.”
조이가 바나나 우유의 비닐 위를 손으로 훑었다.
사악- 하며 불꽃이 일더니 비닐이 찢어져 흩어졌다.
“와.”
감탄해서 말하자.
“멍청한 원숭이, 초능력 처음 봐?”
왕자 개나리가 말했다.
“아닙니다.”
능력이 발현되는 순간, 단번에 그 능력을 파악했다.
발화 초능, 그중에서도 열화 능력이다.
불을 만들어 쏘아내는 게 아니라 한순간 신체 일부에 온도를 급격하게 늘리는 능력자다.
조금 놀랐다.
처음 봐서 놀란 건 아니고.
그 컨트롤 능력에 놀랐다.
비닐 외 플라스틱 부분이 하나도 안 녹았다.
껍질이 조금 눌어붙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딱 필요한 만큼만 열기를 계산해서 뽑아냈을 뿐 아니라, 능력을 발현하고 거두는 속도 또한 놀라웠다.
서글서글 웃지만, 이 사람이 협회 소속이라면 꽤 상위의 능력자일 것이다.
컨트롤 능력은 재능의 영역이 아니라 노력의 영역이니, 그만큼 피, 땀, 눈물을 쏟았을 테고.
“달아!”
달지? 맛있지?
“맛있어.”
조이가 감탄했다.
그가 주먹을 내밀었다. 탁하고 부딪치니, 생긋 웃는다. 나도 웃었다.
왕자 성격은 시발 팀장 곱하기 백쯤 되지만, 같이 온 경호원은 아니었다.
난 조이의 베스트 프렌드가 될 준비가 끝났다.
“뎀! 빌어먹을! 멍청이! 이거 너무 맵잖아!”
왕자가 테이블 위에 있던 불닭면 통을 손등으로 후려쳤다. 라면이 엎어지며 식탁 위에 그 내용물을 뿌렸다.
앞에 있던 에바는 잽싸게 피했다. 움직이는 걸 보니 저 여자는 변신족이다.
몸 쓰는 게 보통 이상인걸.
왕자는 날 노려봤다.
“너! 맵다고 얘기했어야지!”
모르고 먹었냐?
스트리밍 앱으로 다 봤고 한국말을 이렇게 잘하는데, 몰랐을 리가 없잖아.
화풀이다.
“미친 한국인! 너 미쳤어! 또라이!”
친숙한 단어가 들렸다.
또라이, 따란따도, 혹시 아까 그 불어도 이런 의미일까.
물어 뭐하랴. 맞겠지.
“우유 있으면 좀 드시죠.”
왕자는 한창 성질을 부리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더럽게 비싼 생수로 입을 헹궜다.
“원래 저래요?”
조이한테 물으니.
“오우, 유. 오늘 왕자님은 천사야. 적어도 물건을 집어 던지진 않잖아?”
평소에 뭘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냐. 저 새끼는.
왕자랑 친해지긴 글렀다.
난 노선을 정했다. 이 네 명과 어울리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적어도 단서라도 나오면 화림 분석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원 병력은 없어도 인프라 지원은 해 준다고 했으니.
그나저나 눈치를 보니까 우리 팀장이랑 김주석 경호팀장님도 다 알고 보낸 것 같은데.
이 치사한 인간들이 말을 안 해 줬네? 돌아가면 봅시다.
“멍청한 한국인!”
“제 이름은 유광익입니다.”
“꽝 멍청이!”
신선한데?
화장실에서 꿱꿱 소리 지르는 왕자를 두고 조이와 다니엘을 바라봤다.
조이는 참으라며 팔을 톡톡 두드려 주고, 다니엘은 날 외면했다.
쟤는 참 성격이 기남이 닮았다.
왕자는 팀장을 닮았고.
“잘 지내 봐요.”
딱 2주, 이 일을 하는 동안 왕자의 안전을 지키며 이곳에 온 목적을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지랄병이 도진 정신병자가 경호 대상이란 점이 꽤 난감하지만.
“꽝청이, 치킨마요를 만들어 봐.”
어쩌겠나.
진짜 왕자를 상대로 일개 요원이 뭘 할 수 있을까.
그저 참을 인을 가슴에 새길 뿐.
난 그리 했다.
“만들 줄 모릅니다. 요리사를 부를까요?”
“됐어. 한국인 요리사 따위. 할 줄 아는 게 뭐야?”
한국인 요리사 따위라고 해 놓고 왜 한국인 경호원한테 요리를 맡겨.
“토마토 파스타요.”
“뎀잇, 한국 요리! 코리안 푸드!”
왕자가 땡깡을 부렸다.
팔을 바둥거렸다.
“왕자님, 진정하세요.”
에바가 다가왔다.
“됐어. 에바는 일 봐. 이 자식한테 시키면 돼.”
“제 일은 왕자님을 지키는 겁니다.”
왕자는 그 말에 고개를 팩 돌렸다.
설마 부끄러운 거냐?
십 세면서 에바, 그러니까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변신족 경호원을 마음에 품은 거야?
이 새끼 과하게 조숙한데?
그리 생각하며 왕자를 보는 데 아주 잠깐이지만, 왕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 즉 불멸자가 아니라면 느끼지도 못할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의 위화감이다.
뭐,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 표정을 보고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으니까.
십 세의 속을 어찌 알리.
특히나 이리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놈의 속을 알 수는 없지.
팀장보다 더한 놈을 만났다.
이건 인생의 도전이었다.
내가 이 자식을 죽이지 않고 복귀하면 내 몸에서 사리가 나오지 않을까?
“이걸 봐, 여기서 할 줄 아는 걸 해.”
왕자가 스트리밍 앱을 켰다. 갖가지 한국 음식이 나왔다.
“치킨 마요 해 보죠.”
“할 줄 알잖아!”
“보고하는 거지, 할 줄 아는 건 아닙니다.”
“그게 그거야! 멍청이, 씹쌔!”
지금 보니까 욕이라고 하는 게 전부 똑같은 거 반복이다.
이건 누가 잘못 가르친 거다.
저 말의 뜻은 알고 하는 걸까?
“씹쌔는 몹시 나쁜 말입니다. 왕자님.”
“알아.”
“사람한테 그런 말을 쓰면 안 되죠.”
“너도 사람이었어?”
이 씹쌔가? 그럼 난 무슨 인공지능 로봇이냐?
“네, 사람입니다.”
“치킨마요나 만들어, 씨입쌔.”
일부러 늘려서 말하는 게 너무 귀여워, 오른쪽 볼에 내 주먹 자국을 남겨 주고 싶었다.
생긴 건 귀여운데 입에서 나오는 건 구정물뿐이라니.
“으음, 으음, 왕자님 그건 나쁜 말이라니까요.”
말하며 검지를 흔들었다.
“와우, 에바, 다니엘, 조이, 이거 죽여 버려.”
뭐야, 진짜? 갑자기?
조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자님, 유는 한국 정부에서 보내 준 요원입니다. 죽이면 국제 문제가 일어날 수 있어요.”
“흥,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다니엘은 창밖만 보다가 왕자를 힐끗 봤다. 말은 없었다.
무게 잡는 게 특기로 보였다.
조이는 초능, 에바는 변신, 로버트는 불멸이다.
불별자와 변신족은 특징이 두드러지는 편이기에 난 다니엘이 초능 특수종이라고 생각했다.
“치킨마요를 대령하라고 머저리.”
그래. 준다 줘.
“머저리도 나쁜 말이죠.”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아아악!”
왕자가 발악했다. 손에 잡히는 모든 걸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난 쏙하고 주방으로 도망쳤다.
뒤따라온 에바가 날 보며 말했다.
“왕자님의 말에 꼬박꼬박 말대답한 사람은 처음 봤어.”
“아, 다 져 드리는데도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음?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뭘 져 줘?”
응? 말싸움을 다 져 줬잖아.
내가 이기기로 마음먹었으면 지금 왕자는 저 큰 눈으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외쳤을 거다.
“난 겨우 십 세야! 십 세라고, 그런데 저 새끼는 나한테 말을 너무 막 하잖아!”
뭐, 우는 꼴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오늘은 첫날이고, 우리는 이게 첫 만남이다.
아무리 왕자라고 해도 나도 일은 해야 하니까.
일방적으로 당하면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왕자를 패 죽일지도 모르잖아?
이건 다 왕자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너 보통이 아니구나.”
에바 너도 보통이 아니네.
눈은 작지만,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어서 굉장히 귀여웠다.
귀여운 얼굴에 몸매는 호리병 그 자체고.
이런 게 바로 아기 얼굴에 성인의 육체인 것이다.
“만나서 반가워요. 유광익입니다.”
새삼 다시 인사를 건넸다.
이상형은 아니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 잘난 척을 하는 건 모든 수컷이 가진 본능이다.
“그래, 난 에바. 내 식대로 인사해도 되지?”
그렇게 말하며, 에바가 날 안다시피 당기고 볼로 내 볼을 비볐다.
“반가워.”
에바, 당신 식대로 인사를 백 번 해도 좋습니다. 허락하지요.
방금 가슴이 살짝 닿았다.
불가항력이었다.
“에바! 에바! 그 머저리를 두고 나와!”
질투에 눈먼 십 세의 목소리였다.
“가 보세요.”
그 뒤, 난 치킨마요 덮밥을 만들었고.
왕자는 먹을 만하진 않지만, 만든 정성이 갸륵하다고 욕과 욕에 욕을 더해 말하며 다 처먹었다.
그렇게 나흘.
난 이곳에서 지내며 위화감을 여든여덟 번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이 일이 내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간다는 걸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