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십 세
“아들 왔어?”
사장님이 날 반겼다.
더럽게 비싸 보이는 소파에 앉은 채였다.
사장의 손가락 사이에 낀 연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 아들 드립이라니.
난 말을 돌렸다.
“좋은 날이죠?”
누가 잠깐을 못 참고 고새 말했을까.
팬더 대리가 보고서에 누락한 딱 그 부분을 말이다.
본부장은 모른다. 그가 알았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테니.
고로 사장에게 직접 말했다는 건데.
뭐, 누가 말한 게 뭐가 중요한가.
지금 사장이 그걸 알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거기서 네가 얻어야 할 것만 생각해.”
아버지의 조언대로다.
난 내가 얻을 것만 생각했다.
마리, 박마리. 그 아이를 죽이지 않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닌가.
염병. 마리, 넌 나중에 이 오빠를 위해 삼천 배쯤 해야 할 거다.
“우중충한데?”
“전 이런 날도 좋더라고요.”
“아들, 긴 세월 우리가 서로를 몰랐는데 날씨 얘기나 해야겠어?”
“그렇죠. 아버지, 왜 이제야 절 찾으셨나요?”
모르겠다. 이제는 뭐,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을 맡길 뿐.
폭풍우가 몰아칠 때, 꼿꼿이 서서 부러지는 나무가 아닌, 낭창낭창 휘어지는 대나무가 되리니.
고로 사장과 장단을 맞추겠다는 거다.
“몰랐거든.”
“그동안 아버지가 뿌린 염문의 씨앗이 이렇게 장성해서 돌아왔습니다.”
큼.
뒤에서 비서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슬쩍 돌아봤는데 금세 무표정이다. 설마 방금 웃은 거야?
다시 사장을 바라봤다.
“내가 그런 걸 뿌렸어?”
“안 뿌렸어요?”
순혈 불멸자이니 잘생긴 동안인데, 한 회사의 사장이니 돈도 많다.
젊었을 적에도 잘 나갔다며.
그럼 염문의 씨앗 좀 뿌렸겠지 뭐.
“나 피임 잘했는데.”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답니다.”
“그런가? 아들. 좀 앉아 볼래? 할 얘기가 많을 텐데?”
“언제부터 얘기할까요? 유년 시절? 아니면 학창 시절?”
“지난주 목요일쯤 얘기가 좋겠는데.”
“아, 다 큰 아들의 비밀을 듣고 싶으시다니. 짓궂군요.”
“내가 좀 그런 편이지.”
사장이 눈웃음을 지었다.
내 마음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
“에, 음, 어디까지 알고 오셨나요?”
“실험체와 존재를 몰랐던 내 아들까지.”
다 들으셨네, 다 들으셨어.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지만, 이걸 말한 새끼 낯짝이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지.
하지만 그 일을 벌인 놈의 죽탱이에 주먹을 꽂는 건 내 자유잖아.
그렇다고 여기다 물어볼 순 없으니,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비싼 소파가 가시방석 같았다.
이럴 때 나는 되뇌곤 한다.
난 산유국의 왕자다.
난 산유국의 왕자다.
난 산유국의 왕자다.
한국에 있는 기업 사장쯤이야.
“꼭 죽여야 하나요?”
이 대화의 핵심은 무엇인가.
실험체다.
그래서 난 과감하게 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 돌파가 답이다. 안 되면 설득해 보고, 그것도 안 되면 숨겨 버리지 뭐.
속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난 산유국의 왕자니까.
“꼭 죽일 필요는 없지.”
사장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불에 탄 담뱃잎의 불쾌한 향기가 공기 중으로 퍼졌다.
“그렇죠?”
말이 통할 줄 알았지.
“맨입으로는 안 되고.”
“그럼요?”
“일 하나 하자.”
“일이야 시키시면 하죠. 제가 사장님 회사의 직원입니다.”
충성심도 높고, 일도 잘해요.
이번에 작전 수행 능력이 기준치를 넘어서 버린 떠오르는 신성이 저랍니다.
그런 눈빛을 쐈다.
“며칠 뒤에 중요한 사람이 한국에 오는데 그 사람 경호 좀 해.”
진짜 별거 아니네. 요인 경호야 파견팀이 아니라 연구 부서 쪽에 있는 경호팀이 주로 하지만, 사람 손이 부족하면 외부 보안팀에서도 곧잘 했다.
아, 그건가?
사장님은 내 편이고 진짜 내 뒷배임을 보여 주기 위한 일종의 쇼?
그냥 해 줄 수는 없으니까 이런 일이라도 하나 맡긴다는 거지?
오케이, 접수 완료.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오시는 분이 돌아가실 때 코리안 판타스틱 원더풀을 외치고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자세한 건 저쪽 무섭게 생긴 아저씨한테 듣고, 아들.”
아들 드립은 그만 듣고 싶다.
“네, 아버지. 저만 믿으세요. 제가 누구 아들인데요.”
그래도 장단은 맞춰야 하는 법이다.
회사 생활 별거 없다.
상사의 아재 개그에 빵빵 터져 주고,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 게 다지.
“가 봐.”
얼른 일어나서 나갔다.
비서가 날 따라왔다.
“밀착 개인 경호입니다. 대상에게 불멸특수대임을 밝혀도 되지만, 별다른 지원은 없을 겁니다.”
“말 편히 하셔도 되는데.”
아까 웃는 것도 봤고.
정확히 말하자면 본 건 아니고 들었지만.
“아니요. 사장님 자제분께 그럴 수는 없죠.”
이거 농담이지?
근데 웃음기 하나 없이 이런 말을 하네?
“하하하.”
웃었다.
회사 생활 별거 없다.
안 웃겨도 웃는 법을 배우면 그만이다.
“경호가 끝이 아닙니다.”
“그럼요?”
“그분이 한국에 온 이유를 밝히십시오. 필요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럼 몰래 데려가서 고문이라도 하라는 소리인가?
박병준 박사를 데려오는 작전은 ‘초청’이라 쓰고 ‘납치’라 읽어야 했다.
그럼 이것도 같은 건가?
“다만.”
걷다 보니 승강기 앞이다.
비서가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요인의 몸이나 정신에 어떤 피해도 줘서 안 됩니다.”
“……갑자기 난도가 확 올라가는 것 같은데요?”
“친화력을 발휘하시죠. 이전에 절 끌어들인 것처럼.”
그리 말하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는데, 진심으로 충고해 주고 싶었다.
차라리 웃지 말아요.
꿈에 나올까 무섭네.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살벌한 웃음이었다.
입꼬리만 올라가고 표정 변화가 없으면 되게 무섭게 보여요. 형.
물론 난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원이기에 속으로만 말했다.
“경호 대상은 언제 오는데요?”
“슬러그 나이프를 선물한 경호 팀장을 찾아가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구나. 선물 받은 건 어떻게 알았는지.
“끝까지 말 높일 거예요?”
전에 없이 말이 많아진 비서다.
이게 보통 재밌는 게 아닌가 보다.
그래도 불편한 건 불편한 거지.
다행히도 비서는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말을 놨다. 이게 본래의 비서 형이지.
“만만히 보지 마라.”
그 말이 끝이었다.
조언치고는 너무 짧았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모든 일에 열과 성을 다할 작정입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죠.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어설프게 할 거면 일을 시작하지 말라고도 했고.
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경호 대상이 오는 건 이틀 뒤였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팀이 경호하고, 이후에는 내가 밀착 경호.
사정상 불멸특수대가 본격적으로 나설 순 없으니, 나는 소위 말하는 비밀 경호가 될 것이다.
그래도 경호 대상은 내 소속을 안다고 하니까.
별일이야 있겠어? 그 사람 지키기 위해서 사병도 데려온다고 하고.
이름 말고 아는 게 없었다.
그렇게 이틀 뒤, 약속된 장소로 향한 나는.
“뭐야? 이 병신 같은 새끼는.”
까만 피부를 가진, 찰진 욕설을 쓰는 꼬마를 만났다.
잘해야 열 살이나 됐을까.
“뭘 봐, 씹쌔야.”
누구냐, 누가 이 아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냐.
발음 한번 제대로 가르쳤네.
자연스레, 난 이 일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말이 떠올렸다.
내 경호 대상은 싹수가 샛노오오오라아아안 어린 개나리였다.
* * *
R&D 부서 소속 호위 3팀, 팀장 김주석.
축능석 사건 이후 나에게 슬러그 나이프를 선물한 사람이다.
“대형 장비는 가져갈 수 없고 너무 눈에 띄는 복장도 불가. 경호 대상의 이름은 알 칼리드 볼리아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어떤 정보도 줄 수 없다.”
“넵.”
브리핑을 들었다. 김주석 팀장의 눈빛이 묘했다.
눈으로 뭔가 말하는 것 같은데.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만만치 않을 거다.”
이때는 몰랐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글록 두 자루와 보위 나이프 두 자루.
다행히 이전 작전에서 선물 받은 코트가 있어서 안심했다.
이걸 뭐라고 했더라.
유니콘? 아니, 그리핀 섬유라는 신소재라고 했었다.
때려 보니 알겠더라. 어지간한 방검방탄복보다 더 단단하고 타격을 막아 주는 베리어도 있었다.
육각결계 또는 헥사곤 필드라는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이런 걸 선물로 주고 말이야.
다음에 일하다가 블루 트윈스 용병 애들 만나면 살살 다뤄 줘야겠다.
하여간 코트와 대강의 무기, 표준 규격 장비인 압축 슈즈와 장갑.
4번 타자나 아다만티움 정글도를 못 가져가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도시 내 경호 임무에서 허리에 기다란 칼과 총을 차고 다닐 수는 없으니.
그래도 슬러거 나이프는 챙겼다.
김주석 팀장이 별거 아닌 물건이라 말하긴 하지만, 휴대성이 좋고 칼날이 터져 나가며 쏘아지는 산탄의 위력은 어지간한 총기 이상이었다.
일회용이 최고의 단점이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무기다.
“저 모르세요?”
제가 바로 불멸특수대의 떠오르는 신성, 유광익입니다.
“세상에는 주먹으로 해결 안 되는 일도 있다.”
뭐지, 뭔가 아는 것 같은데 말은 안 해 주네.
알면 속 시원하게 말이나 해 주지.
사정이 있어 보여서 더는 묻지 않고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야, 너 사장님한테 임무 받았냐?”
“네. 2급 사원 유능한 사원 유광익, 받았습니다.”
팀장이 묻기에 답했다.
“칼리드?”
“아세요?”
“아니, 모르는데.”
아는데, 아는 얼굴인데.
웃는 얼굴을 보니 조금 불길한데.
사수와 팬더 대리는 전혀 모르는 일인 듯했다.
말하는 거 보면 안다.
“그거 끝나면 1급 사원이네. 이러다가 직급으로 정아 잡겠다.”
팬더 대리가 말했다.
“그때가 되면 사수가 아니라 정아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럼 난 네 머리에 총알을 박아 주지.”
웃음기 하나 없는 사수다.
얼음 공주식 농담이었다.
하하 호호 웃고, 작전을 준비하고.
이틀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어 기남이를 놀리며 시간을 보냈다.
귀태 형이 중간에 쫓아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피력했다.
“내가 B 플러스가 돼서 우리 미호랑 한 팀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티오가 없단다.”
우미호는 분석팀이다.
강희모 대리가 나한테 수없이 오라고 한 그 자리는 귀태 형에게 닫힌 문이었다.
“그래?”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날 막아도 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 형, 요새 연극을 많이 보나.
“물러서지 마.”
안 물러서면 우미호가 형 머리에 총알을 꽂겠지.
연극이라면 그것도 신선한 스토리 전개일 듯한데.
그나저나 사장한테 찌른 자식은 누구일까 싶어 찾아봤더니.
강희모 대리였다.
이건 뭐, 선배인데 상사라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대리님이 깃털 같은 신체 기관을 가지신 줄은 몰랐습니다.”
“보고는 의무야.”
“아들인 걸 말하는 것도요?”
“실험체 은닉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옥상에서 단둘이 만났는데도 작게 속삭였다. 생각보다 간이 작군요. 대리님.
“압니다.”
난 더 작게 속삭였다.
누가 알아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이해해 줘서 고맙다.”
네, 대리님.
기남이였으면 두들겨 팼을 테지만, 이건 뭐 손을 댈 수가 있나.
“말한 게 마음에 걸리긴 한다. 다음에 도움 필요하면 말해.”
“그 말 녹음해도 되나요?”
“깃털 같은 입을 가졌지만, 약속은 지킨다.”
강 대리가 농담을 건네며 옥상에서 내려갔다.
나도 할 일이 없으니, 돌아가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지금, 난 알 칼리드 볼리아나란 새끼와 마주하고 있다.
서울 최고의 7성급 호텔, 쉘터 인 피스의 프레지덴셜 스위트 쉘터 룸에서 말이다.
놈이 룸 안의 미팅 테이블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꼬고 까딱거리며 날 지켜본다.
여기에 도착하고 나서야 기본적인 신상 정보를 들었다.
이름은 이미 안다. 그 외 정보만 머리에 넣었다.
이 새끼는, 아니 내 경호 대상은 섬나라의 왕자였다.
동남아시아 너머의 어디라는데, 그게 중요한가.
왕자라는 게 중요하지.
왕이란 작자가 정력가인지 애를 서른다섯 명을 낳았는데.
그중 정실이 아닌 소실, 그러니까 첩의 자식이란다.
나이는 십 세.
십 세다. 십 세.
“똥멍청이야? 그거 하나 숙지하는 데 날 샐 거야?”
특이사항 하나. 영어,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를 모국어만큼 능숙하게 사용한단다.
천재냐?
“아니요. 숙지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자다. 거기에 요주의 인물이고.
기분 내키는 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 옆에 선 금발의 푸른 눈의 미남과 최소 스물 이상의 일개 소대 병력이 이 꼬마애 하나를 지키려고 호텔 내에 있었다.
참으로 대단하고 대단하신 분이다.
참자. 여기서 얘를 패면 국제 문제다.
경호 대상이 나에게 첫 번째 임무를 줬다.
“야, 편의점 가서 불닭면 하나 사 와. 나 그거 먹고 싶다.”
지금 이거 나한테 하는 소리지?
밀착 경호를 해야 하는데, 지금 나보고 편의점 가서 라면 사 오라고 하는 거지?
눈으로 금발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날 외면했다.
그래, 너희도 어지간히 골치가 아프겠지.
염병할.
참 지랄맞은 새끼였다.
속으로 참을 인을 그리자.
십 세, 십 세, 십 세.
이 새끼는 겨우 십 세다. 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