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일신우일신
한때는 흰머리 악마, 현재는 파견 본부장 지위에 있는 남자는 혀를 찼다.
“용병 수십을 그냥 씹어먹었네?”
국내 용병만 있던 것도 아니다.
블루 트윈스 용병 셋.
그들이 최고라고 부를 용병은 아니다.
하지만 PMC 세계에서 저들 셋을 부리려면 최소 억 단위로 돈이 든다.
그런 셋을 혼자 때려잡아?
신입치고는 드물게 규격 외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잘 싸우는 줄은 알았지만, 현장에서 이미 노련한 용병을 씹어먹을 정도다.
이동훈이 이번 작전 보고서를 썼다.
보고서 내용에는 진실만을 담았고.
보고서를 본 본부장은 1년도 되지 않아, 아직 신입 딱지도 떼지 못한 놈의 이력을 샅샅이 살펴야 했다.
혼혈, 아버지 쪽.
남명진 사장의 관심이 지대한 사원.
블랙홀 웨이브 당시, 비약 인간과 둘이서 웨이브를 막음.
공항 파견 근무 당시, 홀로 형태변환자를 쫓아 잡음.
사내 평가 당시, 최고의 신입이라는 정기남을 3초 만에 제압.
그때 신체 평가지를 NS, 규격 외로 떡칠을 했다.
혼혈 중에 가끔 이런 놈이 있긴 했다. 무슨 운을 타고났는지, 순혈보다 더 진한 재능을 보이는 놈.
하지만 유광익은 조금 달랐다.
이런 재능을 가진 놈은 대부분 처음부터 그 재능을 보인다.
그런데.
‘처음에는 안 그랬잖아?’
분명 그랬다. 오티 때와 그 이후에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사장이 유광익을 외부 보안 3팀에 꽂았을 때, 다들 금세 떨어져 나갈 거로 예상했었다.
유광익은 그 예상을 뒤엎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왔고.
본부장은 축능석 사건 보고서를 들춰봤다.
함께 한 호위팀장이 유광익의 평가서를 작성했다.
- 보기 드문 재능의 사원
뛰어난 판단력과 과감한 행동력
심리전이 뛰어남
호위 팀으로 이적 요청
“작전 경험도 겨우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놈한테 심리전?”
그런데 강희모 대리도 같은 말을 했다.
자기도 겪어 봤다.
유광익은 상대 복장을 긁을 줄 아는 놈이었다.
그걸 좋게 말하면 심리전이었다.
더불어 연구 부서에서도 정식으로 유광익을 원한다고 했는데.
이건 이중봉이 요청서를 읽지도 않고 분쇄기에 넣었다.
아무리 본부장이라 해도, 팀원 이적은 팀장의 의견이 중요하다.
하물며 사장이 직접 꽂은 자리다.
누가 건드릴까.
그 뒤, 불멸교 첩자 색출 작전에 지대한 공헌.
그리고 지금. 박병준 박사의 신병을 확보하며 블루 트윈스의 용병 셋을 때려눕혔다.
이게 1년도 안 된 사원의 공적이다.
본부장은 눈과 감이 뛰어났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살아남기도 어려웠을 거다.
광익의 실적, 공헌, 현재를 살핀 본부장은 깨달았다.
‘이 새끼.’
성장한다.
가진 재능과 별개로, 처음과 지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중봉이 잘 가르쳐서?
그래, 잘 가르치긴 하지.
그럼 가르치는 것만 중요할까?
배우는 쪽도 중요하다.
가르치는 것만으로 천재가 태어날 수는 없으니까.
유광익은 팀장에게 배우고 제 사수에게 배우며 실력을 늘렸다.
그게 지금의 결과였다.
이 정도 작전을 수행하면 작전 수행 능력 평가지를 작성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본부장은 유광익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사원, 대리, 과장급은 대부분 그를 좋아하지만.
그 새끼 때문에 회사 입지가 좁아졌다.
불멸교 첩자 사건 당시에 물을 제대로 먹었다.
물론 자기 실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그렇다고 해서 평가지에 사심을 넣을 수는 없다.
그는 본 대로 느낀 대로 적었다.
작전 수행 능력, NS.
규격 외다.
이중봉은 경력직이었다. 하지만 그도 입사한 해에 이만한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유광익은 대형 신입이 아니라, 넘치는 재능의 불멸자로 봐야 옳았다.
거기에 하나 더.
사장을 포함한 고위층만 보는 별도의 보고서에 적었다.
성장 중.
일신우일신이라 했다.
하루하루가 다른, 매번 작전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그런 불멸자였다.
* * *
입사하고 6개월이 지나면, 각 본부에서는 신입 사원의 작전 수행 평가지를 작성했다.
짧은 휴가를 마치고 출근한 인트라넷에 내 평가지도 올라와 있었다.
“NS.”
혀를 한껏 굴려서 읽어 봤다.
“논 스탠다드, 규격 외라는 소리지.”
팬더 대리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규격 외라.”
말을 곱씹었다. 곱씹는 척했다.
“좋아?”
사수가 물었다.
“그냥, 뭐, 적당히요?”
기분이 꽤, 꽤애애애 괜찮은데?
정기남 A, 우미호 A. 김요한 B. 방귀태 B+.
귀태 형 평가가 생각보다 좋지만, 그건 눈에도 안 들어오고.
평가지가 나온 이후로 회사 내에 말들이 떠돌았다.
“정기남이 밀렸다며? 순혈이라면서? 가문의 일원이라며?”
“유광익 걔는 1급 사원 진급 대상자라던데?”
“이 정도면 신입 수준이 아니지 않나?”
난 1급 사원 진급 대상자가 됐다.
공적과 더불어 최고의 재능을 가졌다는 평가와 함께다.
거기에 성격도 좋아요.
“안녕하세요. 대리님 규격 외로 날씨가 좋네요.”
이렇게 옆 팀 대리와도 돈독하고.
“……어, 그래, 날씨 참 화창하네.”
미세먼지가 심해서 뿌연 창밖이 보였다. 햇볕도 없다. 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저 새끼 미친 거지?”
그걸 들은 팀장이 말했다.
“오, 팀장님, 시발을 안 하셨네요. 우리 팀장님은 시발할 때가 엄청 남자다운데, 규격 외 욕쟁이 이런 느낌이거든요.”
“유골함은 가져왔냐?”
팀장이 물었다.
그리고 난 죽기 전에 내뺐다.
덤비면 진짜 죽일 것 같았다.
“사수, 막아 줘요. 동훈 대리님, 제가 죽으면 다잉 메시지로 대리님 이름 씁니다. 막아요, 막아요.”
이렇게 팀장님과 격한 장난을 치고 같은 팀 선배에게 쉬이 부탁할 정도로 팀 내 화합도 중시한다.
봐, 성격 좋잖아.
안 그래도 갈 곳이 있었기에 난 내뺀 채로 그대로 회사 내를 돌았다.
“화창한 오후지?”
“구름이 해 가렸어.”
마침, 승강기에서 내린 미호가 보이기에 인사를 건넸다.
“내 마음이 화창하면 세상도 화창한 법이지. 넌 너무 블루야, 우울해. 세상을 좀 밝게 보도록 해. 에이 우미호.”
우미호는 에이다. 그리고 난 NS지.
“업무에 방해되니까 저기 가서 죽어 버려.”
정다운 인사다.
“그래, 에이 우미호.”
내 목표는 우미호가 아니었다.
진짜 목표는 이 너머에 있지.
“오만하고 건방져.”
평소와 똑같이 차디찬 말투로 날 평가한 미호를 떠나보내고 자박자박 걸었다.
걸음에는 힘을, 팔은 적당한 진자 운동을.
눈은 바로 뜨고 마주치는 대리님 또는 과장님께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오, 유광익이, 무슨 일이야? 이제 1팀으로 오는 거야?”
보안 1팀 대리 이창용이다. 꽤 서글서글한 혼혈 불멸자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 그럴 만도 하지.
화림 내에서는 은근히 혼혈과 순혈의 파벌이 갈려 있고,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물론 순혈이 혼혈을 무시한다는 거다.
그런데 혼혈 중에서 순혈을 씹어먹는 존재가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내가 보기에도 이런 순혈과 혼혈이 갈리는 현상은 안 좋다.
사장님은 날 자신의 사람으로 뒀다.
그 이유가 바로 ‘화합’을 위해서였다.
화합의 첫 번째 단계가 뭘까.
난 곰곰이 고민했고 결론을 내렸다.
일단 과거의 잘못된 관습을 부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순혈이 혼혈을 무시해서 문제라면 일단 그런 개념 자체를 리버스해 버리는 거지.
그러므로 난 악의가 있다거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결같이 싸가지 없게 굴어서 원한이 쌓여서 이러는 게 아니다.
“3급 에이 정기남 사원.”
기남은 앉아 있었다. 날 보고도 못 본체했다.
자존심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자리를 지키네.
나라면 당장 궁둥이를 떼고 자리를 비켰을 텐데.
“평가지는 봤나, 친구?”
“누가 네 친구냐?”
눈도 안 돌리고 말하네.
“아, 실수. 친구라니. 과했네. 처음부터 다시 할게.”
숨을 고르고 다시 시작했다.
“3급 사원 에이 정기남 사원?”
“꺼져.”
“평가지는 봤나? 룸메이트?”
이건 부인할 수 없지. 우리가 같은 방을 쓴다는 건 물리적인 사실이니까.
“꺼지라고.”
기남이 날 노려봤다. 으음. 나 말고 누가 먼저 놀렸나?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뿔이 나 있어?
잔뜩 화가 난 고슴도치를 보는 기분이 들었기에.
“NS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더 놀렸다.
“시발.”
기남이 욕설을 뱉었다.
“우리 팀장님한테 안 좋은 걸 배웠구나. 너희 기남이.”
말하며 손을 슬쩍 뻗자, 자식이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급히 일어나는 바람에 책상 위에 있던 서류 몇 장이 공중에 떴다가 흐트러지며 떨어졌다.
“악수나 하자는 건데, 왜 그러냐.”
이게 바로 반복 학습 효과라는 거다.
파블로프 개의 이론과 같다.
아침마다 나한테 맞고 졸리고 쥐어 터진 기억은 곧 경험으로 육체에 남았으니.
“너무 쫄고 그러지 마라. 내가 만날 너 패는 거 같잖아.”
그 말에 누가 킥킥하고 웃었다.
혼혈 불멸자라는 것에 내 왼 손목을 걸지.
김요한 리포터가 전한 말에 따르면, 정기남 이 새끼는 여기서도 선배고 뭐고 간에 혼혈은 무시하기 일쑤였단다.
자식이. 성격이 안 좋으면 입이라도 닥치지.
혼혈 불멸자 몇은 우리 둘을 재밌게 지켜봤고.
개인주의가 강한 순혈 불멸자는 무시했다.
그리고.
“적당히 해라. 혼혈.”
순혈주의에 물든 불멸자는 이게 아니꼬웠나 보다.
불멸자든 변신족이든, 순혈보다는 혼혈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 순혈을 지키는 것에 혈안이 된 이들도 있었다.
그런 새끼들을 순혈주의라고 부르고.
그것보다 더 나아가면 불멸교 따위에 귀의하는 거다.
순혈 최고! 순혈만이 답이다!
이런 지랄을 하는 거지.
“너 지켜보고 있다. 나대지 마.”
생긴 것만 봐도 알겠다.
순혈 중의 순혈.
우리 팀장이나 정기남만큼 잘생겼다.
이 작자 이름은 뭘까.
명부는 외웠지만, 얼굴과 교차하며 외우지는 않았다.
그래서 얼굴만 본다고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 무섭게 노려보는 걸 보니, 악의가 느껴졌다.
내가 아무리 잘 나가도 입사한 지 6개월.
뭐, 사고 친다고 해서 내 평가가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혈 선배와 척을 질 필요는 없다.
“네네, 슨배님, 명심하겠습니다. 슨배님.”
그래서 정중하게 답했다.
“……미친 새끼군.”
순혈 불멸자 선배가 말했다.
아니, 정중하게 말해도 지랄이네.
“아닙니다. 슨배님, 전 미치지 않았습니다. 슨배님.”
“정기남.”
“네.”
순혈 선배는 날 상대하는 대신 기남을 갈궜다.
“이런 새끼한테 밀리고도 니가 가문의 일원이냐?”
“죄송합니다.”
음? 이런 모습 처음이다.
기남이가 이렇게 기는 건 처음 봤다.
친구야, 룸메이트야. 안 어울리게 왜 그래.
평소처럼 냉소를 지으라고.
아니면 부들부들 떨든지.
그런데, 둘 다 안 하고 얌전히 듣기만 한다.
아버지가 아끼는 도자기를 깨 먹고 얌전히 손을 든 아이가 떠오르는 그런 태도로 말이다.
“너, 조심해라. 그리고 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쓸모없는 새끼.”
순혈 선배는 나와 기남에게 번갈아 말하곤 몸을 홱 돌렸다.
난 슬쩍 몸을 옆으로 빼며 구경하던 이창용 대리한테 물었다.
“누구예요?”
“정호남.”
정호남? 이름은 기억난다. 출장 전문 최연소 과장.
딱 보니 순혈이고, 기남이랑 이름이 한 자 빼고 똑같네.
“정기남이랑 형제.”
와, 시발, 깜짝이야.
형제였어? 근데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넌 왜 기가 팍 죽어서 그러고 있고.
기남을 보니 괜히 안쓰러웠다.
그래서 다가가 한마디 했다.
“힘내, 자식아.”
“죽여 버린다.”
아니, 위로했는데 왜 살의를 보이냐고.
덤비는 기남을 때려눕히려는데 주변에서 말려서 우리를 뜯어 놨다.
사람이 배려를 모른다. 이렇게 걱정해 줘도 지랄이다.
어쩔 수 없다. 성격이 저 모양인 놈이니, 대인군자답게 내가 이해해야지.
“2급 사원, 에이 정기남.”
난 대인군자답게 멀어지며 끝까지 조잘거렸다.
기남의 이마에 핏대가 선 걸 보고 여직원 하나가 “저래도 잘 생겼어”라고 중얼거리기도 했고.
그럼 난? 날 보는 여직원은 몇 없었다.
그나마 한 명이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얼굴은 아니지만, 능력은 좋으니까.”
이런 미친 사람을 봤나.
불멸자 사이에 있으니, 심미안의 기준이 너무 높아졌다.
나도 일반인 사이에 가면 응? 막 연예인 하라는 소리 듣고 그런다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테안경의 사장님 비서를 봤다.
“어, 비서 형.”
친숙하고 격의 없이 인사하자.
비서 형이 다가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사장님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십니다.”
아, 아, 아.
그새 또 그걸 누가 쪼르르 가서 말했냐?
“가시죠?”
비서님이 말했다.
“넵.”
난 얌전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