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91화 (91/488)

91. 납치, 약물, 임신.

기억나는 건 몇 개 없다.

눈을 뜨기 힘든 밝은 불빛.

몸 여기저기에 꽂힌 관.

그 안을 파고드는 파란 액체.

살을 찢는 고통과 뼈가 부서지는 통증.

아프고, 아팠고, 아플 거라는 것만 알 뿐이었다.

나이, 이름, 성별도 모른 채 그저 실험실의 실험체가 된 나날들은 아이에게 본능을 제외한 모든 것을 앗아갔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마리다. 내 성을 따서 박마리라고 하자.”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 박사는 자신의 팔에 주사기를 꽂던 사람 중 하나였다.

아픔을 주던 사람이 말한다.

“이렇게 살게 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의 눈이 보인다. 감정을 느끼지 못했기에 그게 어떤 눈인지 몰랐다.

전부 찢기고 부서진 기억의 조각 사이에서 박마리는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렸었다.

노랗고 단단한 덩어리, 한 입 깨물면 상큼하고 달콤한 향이 코를 채우고 혀를 자극했다.

아삭하고 부드러우며 입에 넣으면 곧바로 녹아 버리는 그 맛.

언제 먹어 봤지? 왜 그 맛은 기억이 날까.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대로 죽을 것이다.

언젠가는 죽겠지.

그런데도 그 맛은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 덩어리가 너무 먹고 싶었다.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박마리는 모른다.

눈 떠보니 창살이 보였고.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남자가 있었다.

“넌 이제부터 내 딸이다.”

라고 말하는.

본능에 따라 그 남자를 물어뜯고 찢어발기려 했다.

실패했다.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저, 입에 넣으면 녹아 버리는 그 맛뿐.

그리고 지금.

박마리는 본능에 따라 머리를 수그렸다.

두 명의 개체, 보는 순간 본능이 말했다.

‘덤비면 죽어.’

박마리는 머리를 땅에 박고 틈을 노렸다.

상대가 방심하면 본능을 끄집어내 물어뜯을 참이었다.

* * *

오면서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버지, 아니 아빠. 이제는 말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뭘?”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엄마한테요.”

“그러니까 뭘.”

“우리가 불멸자라는 거요.”

타닥타닥타다다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그동안 난 불편했다.

왜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에서 외칠 수밖에 없었는지, 요즘 들어 그를 이해하게 됐다.

평생을 피노키오로 살 수는 없다.

밝힐 건 밝혀야지.

아버지가 허락하고 어머니에게 불멸자라고 말하면, 어머니에게도 말할 생각이었다.

우리가 변신족이라는 걸 밝히자고.

이 아이가 시발점이 됐지만, 어쨌든 이제는 말하고 싶다.

“아들.”

“네.”

“약 먹었냐?”

“아니요. 완벽히 제정신입니다.”

사실 완벽하진 않아요. 제 뒤에는 무거운 책임이라는, 변신족 실험체로 추정되는 애가 있거든요.

“자, 약을 한 것도 아니고 어디 아픈 것도 아니라면, 위협을 당한다고 이런 얘기를 할 이유도 없고. 그럼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아빠가 말하지 않았니? 이거 엄마가 알면 이혼당할지도 모른다고.”

“선배님, 이혼해요? 그럼 저한테 먼저 알려 주세요.”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가 말했다.

“남의 통화 엿듣지 마.”

아빠가 화를 냈다.

“엄마는 이해해 주실 거예요.”

사실 엄마는 변신족이거든요.

“때가 되면 말해야겠지. 하지만 그게 요즘처럼 엄마가 저기압일 때는 아니라고 본다.”

이건 아버지 말이 맞긴 하다.

근데, 그렇게 저기압이 된 건 내가 집을 비우고 아버지의 출장도 잦아서 그런 건데.

“말하면 안 될까요?”

다시 물었다.

“응. 안 돼. 바쁘다.”

전화가 끊겼다.

좋아, 플랜 B다.

아버지가 안 되면 어머니의 비밀을 먼저 밝히자고 설득하는 거다.

일단 애부터 들이밀고 설득해 보자. 애를 외면하지는 않으실 거다.

어릴 때부터 나에게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분이지 않은가.

변신족 각성 이후에도 수없이 말했었다.

지나가다가 본능에 미친 변신족을 보면 기절이라도 시켜 주라고.

어디 잡혀가게 두지 말고, 아량을 베풀라고.

물론 ‘감당할 수 있을 때만’이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일단 마리 몸에 칭칭 감긴 끈은 풀어 놓자.

이대로 집에 가면 내가 잡아 온 것 같잖아.

* * *

“납치?”

어머니가 물었다.

“아뇨.”

“약물?”

“에이, 진짜 아니죠.”

“임신?”

“절대로 아닙니다.”

네버, 내 이상형과 거리가 멀다고요.

“변신족 본능 터져서 기억 상실?”

소설은 팬더 대리보다 우리 어머니가 더 잘 쓰시는 것 같다.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먹은 밥알 개수를 셀 수도 있습니다.”

안 먹었다. 그러므로 답은 제로다.

그래서 지금 몹시 배가 고프고.

“지나가다가 구했는데, 애 상태가 좀 안 좋아서요. 경찰서에 데려가려고 했더니 보시다시피…….”

자꾸 덤빈다. 그 덤비는 주먹질 정도가 상당히 아프기도 하고.

“그렇다고 집에 데려와?”

“경찰서로 갈까요? 근데 애가 뭘 잘 못 먹었는지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여서요.”

꼬르륵.

나이스다. 마리의 위장이 울었다.

잘했다. 마리 위장아.

어머니는 불쌍한 강아지나 고양이를 쉬이 지나치지 못했다.

같이 산을 탈 때 멧돼지가 나타나도, 불쌍하다며 죽이지 않고 살려서 보내 주시기도 했다.

“크릉.”

마리의 전신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머리는 며칠을 못 감았는지, 기름기가 떨어지다 못해 굳었다.

몸에는 땟자국이 가득하다.

바짝 말라서 갈비뼈가 드러나 보였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몸이다.

팬더 대리는 정신 영역이 무너졌다는 둥 어렵게 말했지만, 쉽게 말하면 정신줄도 반쯤 놨다.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놔두면 사람 심장 몇 개는 끄집어내겠더라고요. 며칠만 봐주시면 어디 시설에라도 신청해서 보낼게요. 며칠만 좀 봐주세요.”

어릴 때 고양이를 키우는 수법과 같다.

처음부터 ‘키워 주세요.’ 하면 안 된다. 일단 데리고 온 다음, 눈에 밟히게 두면 된다.

지금은 말도 못 하고 너무 공격적이다. 그래서 시설에 보내기도 곤란하다.

이유가 적절하지 않나.

“일단 좀 씻기고 생각해 보는 게 낫겠는데?”

과외 선생이 나섰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거 아시죠?

“그리고 엄마.”

슬쩍 다가가며 눈을 깜빡였다.

“우리 이제 아빠한테 말하는 게 어떨까요?”

“뭘?”

“가족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뭘?”

“변신족인 거요.”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광익아.”

“네.”

“엄마랑 살 건지, 아빠랑 살 건지는 정하고 말하는 거지?”

“너무 극단적이신 거 아닙니까.”

“정하고 다시 오렴.”

아니, 어쩜 두 분 반응이 이렇게 똑같을까.

밝히면 곧바로 이혼인가.

특수종이랑 결혼하면 뭐, 누가 잡아가기라도 한다나?

포기다. 단호하다. 어설픈 설득은 반발심만 키울 뿐.

그럼 다음은? 부모님의 비밀을 밝히지 못했다면 문제가 남는다.

“그럼 애를 집에 두지는 못하겠네요.”

누가 봐도 일반 사람은 아니다.

“네 아빠가 보면 기겁하겠지.”

어쩐다. 근처 원룸이라도 빌릴까.

하고 보는데, 과외 선생님이 욕조에 물을 받고 나오는 게 보였다.

과외 선생님, 어머니의 친구이며 건물주.

정보가 머리를 스쳤다.

“선생님. 남는 방 없나요?”

대뜸 물었다. 옆에서 어머니가 피식 하고 웃는다.

“나한테 뭐 맡겨 놨니?”

맡겨 놓은 건 없지.

머리를 팽팽 굴렸다.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는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알아야 한다.

난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종합했고, 판단했다.

무슨 말을 하면 방 한 칸 내주시려나.

변신족은 본능을 조절하는 게 평생의 숙제다. 그리고 선생님은 변신족이며 어머니와 친구지만, 싱글이다.

고로 그녀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반쯤은 찍는 각오로 말했다.

“소개팅 안 하실래요?”

“어지간한 남자로 내 눈에 찰 리는 없는데. 그리고 난 애 낳을 생각 없고, 결혼할 생각도 없어.”

“그래도 연애는 하면서 살아야죠.”

“맞는 말이네. 남자 좀 만나, 이년아.”

어머니가 거들었다.

“콜.”

건물주가 허락하셨나니, 이 땅에 우리 머물 곳이 생겼노라.

이게 먹히네.

뭐, 선생님도 일단 애가 불쌍해서 받아 준 거다. 소개팅은 핑계겠지.

“일단 씻기기부터 하자. 머리까지 지끈거린다.”

그 말과 함께 어머니가 마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머니는 애를 씻겼고, 선생님이 그걸 도왔다.

가끔 마리가 발작하듯 침을 흘렸지만, 덤비진 못했다.

물을 끼얹자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는데, 어머니가 쳐 내고 선생님이 목덜미를 눌러 욕조에 처박았다.

말로 하니 과격하게 느껴지지만, 일련의 행동에 어떠한 타격도 없었다.

그저 자연스러울 뿐.

“열여덟쯤 됐나 본데.”

“각성한 지는 반년도 안 된 것 같고. 혼혈이네.”

“씹어먹을 새끼들이 애를 버렸나 보네, 근데 애가 어디서 뒹굴면 이렇게 되니?”

“들을라.”

“말을 못 하는 게 구강 구조의 문제가 아니잖아. 안 배운 거야.”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으르렁거렸다.

보통 심통이 난 게 아닌 듯했다.

그걸 보며 내가 말했다.

“엄마, 주말까지 쉬었다가 갈게요.”

오랜만에 온 참이다. 적적한 어머니를 위하여 아들 노릇을 할 차례고.

“그러든지.”

어머니는 시큰둥하게 답하고 애를 씻기는 데 열중했다.

“계속 볼 거니? 관음증 있니?”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 삐쩍 곯은 몸, 뭐 볼 게 있다고.

어쨌든 나도 대강 옷을 갈아입었고.

그사이 애를 씻긴 어머니가 대충 자신의 옷을 마리에게 입혔다.

헐렁했다.

난 그사이에 냉장고를 뒤지다가 냉동고를 열었다.

골라 먹는 아이스크림,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종류로 파인트가 있었다.

잽싸게 집어서 꺼내는데.

훅.

누가 옆에서 손을 뻗는다.

이 새끼가?

난 반사적으로 몸을 틀고 손날로 쳐 냈다.

그대로 뒤로 두 걸음.

그러자, 네 발로 식탁 위에 오른 마리가 크르릉거리며 침을 흘렸다.

“야, 은혜도 모르고 덤빌래?”

“카악.”

그녀의 눈이 뚫어지듯 내 손을 노려봤다.

정확히는 내가 든 아이스크림을.

“유광익. 그거 내려놔.”

어머니가 날 불렀다.

“네?”

아니, 어머니 저 버르장머리 없는 애를 말려야죠.

“안 내려놔?”

손은 왜 드시나요. 타격 폼은 왜 잡으시나요.

“전 오랜만에 온 거고, 이건 제 최애 아이스크림인데요.”

“누가 너 먹으라고 사 놨대?”

얘를 데려올 걸 예상하고 사 온 건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직접 내 품에 있는 동그랗고 어여쁜 아이스크림 통을 빼앗아서 애한테 줬다.

마리는 손으로 뚜껑을 찢고 주둥이를 처박았다.

어이쿠, 그렇게 먹으면 대가리 깨져요. 이 친구야.

아니나 다를까, 애가 한참 먹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을 흘렸다.

“히잉, 하으응.”

어머니가 그런 마리의 배나 등, 팔, 다리 등을 주물럭거렸다.

“어디 이상은 없네.”

“하여간.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애는 왜 낳아.”

선생님은 혐오감을 보였다가 마리가 겁을 먹자 두 손을 탁탁 털었다.

“저녁 되기 전에 데려가야지? 난 방이나 하나 봐 둘게. 그, 말 안 할 거지?”

뭔가 말하려다가 만 것 같은데.

“안 해. 내가 소일거리 삼아 키우지 뭐.”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마리한테 천천히 먹는 법을 가르쳤다.

나한테 할 때와 같다.

다시 머리를 박으려는 순간, 머리끄덩이를 잡은 채로 살기를 뿜는다.

그리고 나한테 수저를 가져오라고 한 뒤.

한 스푼씩 천천히 떠서 먹인다.

과격하긴 한데, 뭐랄까.

자애가 넘친다.

살기와 자애가 한 번에 뿜어져 나온다.

이래서 내가 어머니를 떠올린 거다.

박력 넘치는 마더 테레사.

변신족 마더 테레사.

“후.”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비밀은 말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애는 챙겼다.

요즈음 어머니가 많이 적적하신 듯하여, 고양이 한 마리 키우는 건 어떨까 하는 와중에 덩치 큰 실험체를 키우게 되긴 했지만.

뭐, 어떤가.

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이제 나도 본가에 자주 와야겠다.

애를 어머니한테만 맡길 수는 없다.

박병준 그 모지리 박사한테도 마리를 보여 줘야 하니까.

그나저나, 왜 이렇게 졸린 지.

생각해 보면 제대로 먹고 자는 대신 움직이기 바빴다.

피로가 쌓일 만도 하지.

내가 아무리 변신족으로서도 훌륭한 육체를 지녔다고 해도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며 싸우는 건 당연히 힘들다.

언제부터 안 잤더라.

강 대리랑 먼저 출발해서 산 타고, 나머지 팀원 만나고.

이후 팀장이 감각의 문 여는 법을 알려 주면서 그걸 몇 번이고 반복하게 했다.

솔직히 그때 잠깐 혀를 내둘렀다. 그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중간에 한번 낮잠 잔 거 빼고는 안 잤잖아.

눈이 슬금슬금 감겼다.

배도 고프긴 한데, 진짜 졸려.

침대로 곧바로 다이빙하고 싶다.

“옳지. 잘한다.”

어머니가 마리를 챙기며 미소를 보였다.

통화할 때 느꼈던 우울감 따윈 한순간에 사라진 것 같다.

눈을 감았다.

찰싹!

그리고 곧바로 떴다.

등에 누가 불을 붙였다.

“들어가서 자.”

어머니가 등짝 스매시를 날렸다.

“넵.”

곧장 일어나서 침대로 향했다.

아까 상상한 대로 침대에 다이빙하고, 난 무려 아홉 시간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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