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89화 (89/488)

89. 삼인성호

“제발.”

박사가 애원한다.

“안 됩니다.”

강희모 대리가 고개를 가로젓고 말을 이었다.

“허가받지 않은 실험체는 폐기 대상입니다.”

회사 내규가 그렇고 정부가 만든 법이 그렇다.

모든 실험체는 위험을 내포한다. 이전에 자기 몸을 폭발시키는 그런 초능 특수종도 있었다지?

그걸 테러 단체가 무기로 썼고.

그때 동원된 애들이 이제 막 열 살이 된 애들이라고 했던가.

그 이후로 올드 포스도 엑스큐라시도 협회도 전부 합심해서 만든 법이다.

실험체는 폐기라는 것.

“그냥 아이요. 아무것도 못 하는.”

때마침, 면역 반응 이상에 비타민 부족, 정신 영역이 망가진 애가 눈을 떴다.

번쩍.

눈이 새빨갛다.

충혈된 눈이 아니라 본래 동공의 색이 그렇다.

“크으으.”

사수에게 붙잡힌 아이가 몸을 비튼다. 묶인 줄 때문에 사지가 자유롭지 못한대도 바둥거리며 몸을 틀었다.

사수가 아이를 내려놨다.

퍽 하고 담요째로 바닥에 떨어진 소녀가 울음을 토했다.

“하아아악!”

느껴지는 감정은 경계심과 공포심.

주변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건 적의다.

“마리야, 마리야.”

박사가 말하며 아이한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딱하고 애가 박사의 손을 물려고 했다.

팬더 대리가 박사의 목덜미를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손가락 몇 개쯤은 헌납했겠는걸.

거, 사납네.

아무것도 못 하는 아이라면서요, 박사님.

“카하아악!”

학대받은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다.

“팀장님, 여기서 폐기하는 게 낫습니다.”

강 대리가 소총을 휘릭 돌려 잡더니 총구를 애 머리에 겨눴다.

강 대리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진짜 죽이게요?”

내가 물었다.

“놔두면 실험체로 비참한 삶을 연명할 뿐이다.”

강 대리가 말했다.

실험체와 폐기.

꼭 선택지가 두 개뿐일까.

그래도 이건 좀.

정말 저 애를 죽이자고?

반항할 의도는 다분하지만, 정작 그럴 힘은 없는 아이.

실험체라지만, 살아서 움직이는 아이.

잘해야 스물도 되지 않은 그런 아이.

그런 애의 머리에 총알을 꽂겠단다.

왜?

그게 회사의 규정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정한 법이라서?

“진심입니까?”

다시 물었다.

이게 바로 어머니가 말씀하신 변신족이 가진 단순함의 폐해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카하아악!”

아이가 저리 비명을 질러대고, 자칭 아버지의 손가락을 이빨로 뚝 끊어먹으려 했다 해도.

그게 죽어야만 하는 이유인가.

아니지, 실험체라서 죽어야 한다고 한다.

실험체가 뭔데, 그게 뭐 마법의 연금술인가.

양손을 짝 마주치고 인간 연성을 하면 태어나는 그런 존재냐고.

뭐, 대충 호문쿨루스라고 이름 붙을 그런 애들이야? 아니잖아.

그저 운이 나빠 사설 실험에 이용된 아이잖아.

그러니까 쟤도 살아있는 거잖아.

“살리죠.”

내가 말했다.

“나서지 마라. 멍청아.”

기남이 드물게 나에게 조언을 건넸다.

물론 난 들은 척도 안 했다.

“우리 다섯만 입 다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 박사님도 전적으로 일을 도와주실 거고, 그렇죠?”

말하며 윙크했다.

찡긋.

자, 이번에도 내 얼굴을 보고 재수 없는 낯짝이라고 하려나.

강 대리도 진심은 아닐 거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는 시발 팀장, 팬더 대리, 사수가 있다.

이 셋이 정말 이 아이를 죽이자고는 안 할 거다. 그럴 리가 없다.

“어, 어, 그렇지. 그렇게 할 거요. 최선을 다해 도울 겁니다.”

박사가 말하고 난 숨도 안 쉬고 말을 이었다.

“반대로 쟤를 죽이면 박사가 협조할까요? 그건 무리죠. 보세요. 다 큰 어른이 질질 짜고 생난리를 치잖아요. 전 실제로 중년 남자가 저렇게 우는 걸 처음 봤다고요. 대리님, 총 내려놓으세요. 애가 겁먹었네. 합리적으로 해결하자는 거죠. 합리적으로.”

“실험체를 빼돌리는 건 중죄다. 유광익.”

기남이 말했다.

“야, 악법도 법이다. 이거냐?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른 뭐 그런 거 있잖아.”

“어이, 뼝아리. 이 아이를 살리면 책임이란 걸 져야 된다.”

시발 팀장이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후, 이 개새끼들.”

팬더 대리가 몹시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아이를 실험에 쓴 모든 연구자를 욕하는 거겠지.

대리가 박사를 바라봤다. 그 눈에 어린 건 살기다.

“진짜 죽이게요?”

이 사람들이 장난치나.

슬쩍 움직여 애 앞을 막았다.

뒤에서 카학, 하악 따위 소리를 내지만, 아, 몰라.

이건 변신족의 단순함이 가져다준 일이라고 치자.

난 이걸 용납 못 하겠다.

백 번 선택하라고 해도, 매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의지를 보이는 건 눈빛.

신념을 보이는 건 행동.

입은 거들 뿐이다.

“가려거든 날 밟고 가는 겁니다.”

내가 말했다.

아, 시발, 그래. 몰라.

팀장 얼굴에 언젠가 발자국 한 번 남길 작정이었다.

그게 오늘인가 보지 뭐.

팀장이 입술만 달싹였다. 말없이 입 모양만으로 말을 전한다.

나만 볼 수 있었다.

“작은 일을 덮으려면 그보다 더 큰 일을 터트려라. 그러니까 니가 책임져.”

뭔 소리야.

“야, 강희모.”

팀장이 입을 열었다.

“네, 대리 강희모.”

“얘가 책임진대.”

“……네?”

응? 뭘? 갑자기?

뭔 소리야, 이 미친 양반아.

팀장이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켰다.

“얘가 책임진다니까 넘어가자고.”

“팀장님,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팀장의 손짓이 보였다. 외부 보안 3팀만 쓰는 수신호다.

거들어.

신호는 분명했고, 그걸 본 팬더 대리는 흥분하는 대신 입을 털기 시작했다.

“왜 안 돼요? 돼요. 광익이 뒤에 누가 있는지 모릅니까?”

내 뒤에 누가 있는데?

뒤를 돌아봤다.

박병준 박사가 있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눈만 껌뻑인다. 저 작자가 힘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남명진이라면 실험체 하나 정도는 무마해 준다.”

팀장이 마침표를 찍었다.

남명진이 누구더라. 이름이 무척 익숙한데.

“광익이가 사장님의 사생아라도 된답니까?”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며 기남이 고개를 저었다.

맞아, 남명진 사장, 화림의 사장님 이름 되겠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더니.

우리 팀장 새끼, 거침없이 사장 이름을 불러 젖히네.

“팀장님, 광익이가 정말 사장님의 숨겨 둔 자식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문책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강 대리가 다시 총구를 들며 말했다.

강희모 대리도 정기남도 쉬이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쿡.

뒤에서 사수가 날 찔렀다.

그리고 수신호를 보냈다.

의미는.

‘그렇다고 해.’

뭘? 대체 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심하지 않나.

팀장과 팬더 대리가 슬쩍 날 바라봤다.

어, 진짜? 진짜 하라고?

이 미친 양반들. 진짜, 왜 내가 이 팀에 남아서.

분석팀 갈걸, 감사팀 갈걸, 다른 팀 갈걸.

근데 진짜 하라고? 이 양반들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걸 한다고 강 대리가 그냥 넘어가겠어? 차라리 때려눕혀서 단기 기억 상실증을 일으키는 게 낫지.

뭘 진짜 되지도 않은 소리를.

그래, 뭐, 분위기 전환이라도 하려나 보다.

농담 몇 마디에 일단 분위기 풀 생각이겠지.

그래서 했다.

“맞습니다. 사장님이 제 아버지입니다.”

농담이었다.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는데.

“……응?”

강희모 대리의 눈알이 붕어처럼 변했다. 뭘 이렇게 놀라.

입을 왜 뻐끔거려요. 대리님.

농담이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기남은 곧바로 부인했지만, 볼이 파르르 떨렸다.

“기밀이다.”

팀장이 말했다.

“왜 사장이 쟤를 특별대우했을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지.”

팬더 대리가 말했다.

“가장 빨리 진급했고, 거기에 사장님 입김이 들어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사수가 말했다.

삼인성호라 했다.

사람 셋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팀원 셋은 없는 호랑이 대신 나에게 두 번째 아버지를 만들어 줬다.

근데 이걸 믿어?

강 대리와 기남의 동공이 요동쳤다.

허, 이걸 믿는다고?

그제야 팀장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작은 일은 큰일로 덮는다.

실험체 하나보다, 사장의 숨겨 둔 자식이 훠어어어얼씬 큰일이란 거다.

적어도 이 둘에게는 말이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다.

내가 덧붙였다.

“난 혼혈이야. 그런데 내 능력이 어디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어? 다 영재 교육 덕분이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날 이렇게 키웠지.”

사실은 열여덟 살에 변신족으로 각성했고.

스물에 불멸자 각성한 뒤, 자력으로 한 일이다.

“맞다고. 우리 아빠가 남명진이야.”

아, 몰라 될 대로 돼라. 어떻게든 되겠지.

난 우겼고.

설마 이런 일로 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한 강 대리와 기남은 속았다.

하, 거, 믿네. 시발.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소자 잠시 두 아비를 모셔야겠습니다.

이거 나중에 진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알면 난리 나겠는걸.

사장 귀에 들어가도 상황은 미쳐 돌아가겠지.

하하하하, 시발.

이게 뭐람.

“사장님한테, 보고는 할 겁니다.”

강 대리가 뚝뚝 끊기는 말투로 말했다.

뭘? 내가 사생아라서 넘어갔다고?

“이 얘기는 빼고 하는 게 좋을 거야.”

팀장이 답했다. 사생아 얘기는 빼라는 거다.

강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안 걸리면 죄가 아닌 거지? 맞지?

애부터 살리자.

이제 박사를 데리고 복귀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저 애는 어쩐다. 팀장이 데려가려나.

“골치 아프네요.”

팬더 대리가 그 아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난 반쯤 진이 빠져서 영혼 없이 되물었다.

“이 아이, 누가 데려가지?”

누구긴, 자칭 아버지지.

눈이 박사에게 향했다.

“저 사람이 데려가면 이틀도 안 돼서 변사체가 하나 생기겠지. 실험체의 위험성이 뉴스에도 나오고. 아, 거기에 우리가 놓아 준 실험체란 정보가 나올 수도 있겠네.”

팬더 대리의 상황 파악 능력은 참으로 뛰어났다.

그렇네.

“그럼요?”

누가 데려가냐.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사수가 말했다.

“그, 블랙마켓 쪽에 보육원 같은 건 없나요?”

암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 사람도 대신 키워 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난 그런 암시장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지만, 사수는 알겠지.

“맡아 줄 사람은 있지. 저 애가 멀쩡하게 자랄지는 모르겠지만.”

“책임지지 못할 일은 나서는 게 아니라고 했지.”

팀장이 덧붙였다.

‘책임’이란 두 글자가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구하긴 했지만, 이대로 놔두고 가야 한다면, 이게 과연 구했다는 말을 쓸 수 있는 걸까.

“힘으로 쟤를 컨트롤할 수 있고, 기본 예의와 언어 등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걸 가르쳐 줄 만한 사람. 그러면서도 실험체라는 것과 상관없이 아이를 대해 줄 사람. 박사를 생각하면 멀리는 못 보낼 것 같으니, 수도권에 있어야 하고. 변신족 마더 테레사라도 구해야 할 판이구나.”

팬더 대리가 혀를 차며 말했다.

힘으로 실험체를 컨트롤할 수 있고, 박마리라는 아이가 하나의 인격체가 되도록 교육도 해야 한다.

변신족과 마더 테레사라니.

이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다. 없는데.

이 순간에 왜 엄마가 떠오를까.

근데 지금 얘를 데려가면 아버지한테는 뭐라고 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고민해 봤자 답은 없다.

그래, 언제까지 비밀을 안고 살겠나.

이 기회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비밀을 서로 오픈하는 거다.

그럼 된다.

요새 많이 적적하셔서 우울하신 어머니에게도 손 많이 가는 애를 맡기면 윈윈 아닌가.

시발, 솔직히 윈윈은 아닐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당장은 수가 없잖아.

사옥에 데려다가 몰래 키우면 어떨까?

우리 기남이 덕분에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감사팀이 들이닥친다는 것에 내 돈 전부와 왼 손목을 걸 수 있었다.

내가 부린 고집이자, 내 책임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대리님, 만약에 정말 갈 곳이 없으면 쟤는 어떻게 해요?”

변신족 실험체로 보이긴 하는데.

“어디 산에 버리고 잘 살아남길 바라야지.”

아니, 그게 사람으로서 할 말이요?

“회사로 데려가면 폐기할 거고 잘해도 비공식 실험체인데, 그것보다는 백 배 낫다.”

팬더 대리가 덧붙였다.

내가 어릴 때 맨 처음 기른 고양이는 내가 길에서 주워온 친구였다.

우리는 보통 유기견과 유기묘를 데려다가 키웠었다.

그것보다 조금 크긴 하지만.

이해해 주시겠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누구?”

사수가 물었다.

“저 생각보다 발 넓습니다.”

“그래서 누구?”

팬더 대리가 물었다.

변신족인 엄마를 말할 순 없으니, “불멸자 중에 산에 살고 계시는 분이 있어요.” 하고 말했다.

그런 사람 꽤 있다. 도시의 번잡스러움을 싫어하는 은둔형 불멸자들.

그중에 하나를 내가 안다고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기왕 산에 버릴 거 아는 사람이 있는 곳에 둬야 할 거 아닌가.

실제로는 도심 한복판에서 살 확률이 높겠지만.

“불멸자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울지도 모른다.”

팬더 대리가 걱정했다.

아니요, 이십 년 경험을 담아 말하건대.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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