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되게 안 닮았네요
“전부 내 시야 안에 있는 게 좋아. 아니면 방아쇠를 당겨 버릴 테니까.”
인질범이 말했다.
보통 인질범은 아니었다.
저 작자의 이름은 박병준.
현재 일어난 이상 현상 ‘겹문’의 연구자이자, 이번 우리 미션의 목표물이며 현재는 ‘인질범’에 ‘인질’까지 1인 2역 중이시다.
제 머리에 38구경 리볼버를 겨눈 박사를 보며 난 생각했다.
저래서 다들 박사 박사 하는구나.
봐, 머리가 비상하잖아.
제 머리에 총을 겨누다니, 신선하다.
“진정하시고.”
팬더 대리가 양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싸울 의지가 없음을 내보이는 전 세계 공통 제스처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
박사는 팬더 대리 뒤를 보고 말했다.
공명심과 출세 욕구로 점철된 동기, 정기남 개나리께서 슬쩍 움직이다가 걸렸다.
자식아, 가만히 있어. 인질범과 인질이 너무 근접한 위치다.
화림에서 안 배웠냐?
질문 하나, 인질을 살리고 인질범을 사살할 수 있는가?
없다.
인질의 부상을 유도해, 인질범을 사살할 수 있는가?
이건 될 것 같기도 한데, 확률이 낮다.
일단 살리긴 해야 하니까.
우리의 목표물은 살아 있는 박사지, 죽은 사람이 아니다.
뭐, 애초에 죽이기로 했으면 이따위 어설픈 별장 요새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뒤로 몰래 가서 멱만 따면 될 일인걸.
본래 공격수보다 수비수가 불리한 법이고.
지키는 사람보다 탈취하는 사람이 유리한 법이다.
자, 그럼 진짜 어쩐다.
난 박사에 대해 알고 있는 걸 곱씹었다.
나이 마흔셋,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따고 연구원으로 취직.
그 뒤, 홀몸으로 여러 방면에서 연구 활동.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친구 없고 애인 없고 사교성 제로에 사회성도 없을 거다.
처음에는 정중한 초청이었는데, 거절.
한국에 들어온 뒤로는 이곳에 칩거.
그리고 현재다.
무엇이 저 작자를 이렇게까지 만드는가.
제 목숨 걸어가며 왜 버티는 거냐.
그만큼 대단한 비밀을 갖고 있어서?
그건 아닐 텐데.
그만한 사람이었으면 여기저기서 다 이 작자를 데려오려고 했을 거다.
본부장이 반쯤 엿 먹으라고 소수 인원을 추려서 보낸 작전.
즉, 성공하지 않아도 큰 타격은 없다는 거다.
데리고 오면 좋고 안 되면 다른 수단을 쓰면 되는 그런 미션.
그러므로 내린 결론.
박병준 박사가 아는 정보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대단했다면 여기에 엑스큐라시의 전투원이나 협회의 상위 초능력자가 몇 명쯤 있었을 테지.
아니, 우리가 데려가서 고문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문 좀 구하겠다는 건데.
슬쩍 사수를 바라봤다.
사수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팀장도 꼼짝도 안 했다. 대신 강 대리가 나섰다.
그가 바로 분석팀의 에이스다.
“자문 위원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걸 총과 칼로 하나? 폭력과 압제로 시민을 억압하는 게 불멸특수대가 할 일인가?”
쉬지도 않고 쏘아대는 말이 촌철살인이다.
거, 단어 한번 고급스럽네.
강 대리가 말문이 막혔다. 분석팀의 에이스는 정보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지.
말발이 뛰어난 건 아니다.
이전 공항 작전 당시, 브리핑할 때도 느꼈는데, 강 대리님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기남이 깝죽거리는 것도 그냥 놔뒀지.
나였으면 죽탱이를 쳐 돌렸을 텐데.
하여간 사람이 너무 좋아도 탈이다.
이거 어쩔 수가 없네.
팀장한테 맡기면 욕이나 뱉을 테고.
그러다가 저 양반이 진짜 욱해서 방아쇠라도 당기면 일이 복잡하다.
그럼 사수가 나선다?
대화가 제대로 통할 리 없다.
팬더 대리도 나쁘진 않지만, 뒤에서 정기남이 한 걸음 나서는 바람에 인질범이 그를 경계했다.
교섭가는 인질범과 친해질 필요가 있다.
고로 여기서는 화림 내 최고의 교섭가이자, 사람과 사람을 잇는 친화력만으로 사장에게 발탁 받은 불멸특수대의 떠오르는 샛별이 나설 때다.
“공문을 보내니 무시하셨고, 사람을 보내니 듣질 않으셔서, 강력하게 의견을 주장한 거죠.”
생긋 미소를 보였다.
내가 불멸 혼혈 제일 미남이라고.
서울에서 방귀태와 김요한이 ‘개소리’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리는 듯했지만, 무시다.
“재수 없는 낯짝.”
박사가 말했다.
저기요, 초면에 그렇게 말하면 여린 가슴에 상처받죠.
“기남아, 얼굴 저리 치워라. 네 얼굴에 심기가 불편하시단다.”
날 보는 듯하지만, 분명 정기남을 보고 한 말일 거다. 나 같이 수더분하고 친근한 얼굴에 저렇게 말할 리가 없잖아.
“불멸특수대에서 이제 개그맨도 뽑나?”
박사가 물었다.
“뽑아요?”
내가 조용히 속삭이듯 물었다.
팬더 대리가 고개를 저어줬다.
“안 뽑는데요.”
“너 뭐야?”
“유광익이요.”
“그게 뭔데?”
“이름인데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답했다.
이건 근데 내가 생각한 네고시에이터와는 좀 다른데.
아빠랑 같이 본 영화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원하는 걸 말해, 무슨 문제가 있지? 좋아, 요구 사항을 들어 보지.”
“십 년 전 헤어진 첫사랑을 데려와, 그럼 얘기를 시작하지.”
보통 이런 거잖아. 진지하게 물으면 말도 안 되는 요구 조건을 말하는 거.
거기서 다시 합의점을 찾는 건데.
이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슬쩍 눈치를 보니, 마침 팬더 대리가 날 힐끗 봤다.
‘빠질까요?’
눈으로 물었다.
‘아니.’
팬더 대리도 눈으로 답했다.
동공이 좌우로 휙휙 돌아가는데 매우 훌륭한 기술이다.
사수를 봤다.
혀로 입술에 침을 발랐다.
현재 위치 고수, 라는 신호다.
계속하란 소리다.
팀장은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 별장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노을이 지고 있기에, 그 안은 어두컴컴하다. 저긴 왜 노려보나.
거참, 이거 어쩔 수가 없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말씀하셨다.
“대범할 때는 대범하게 해.”
어차피 시작한 일.
“너 또라이지?”
“일부 몰지각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프로메테우스의 따란따도와 화림에 이중봉 팀장이란 새끼가 그렇지요.
“후, 여기서 시선 끌고 내 뒤통수칠 생각이냐? 너희 중 하나라도 내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난 죽는다.”
“요구 조건을 들어주려고 하는 건데요?”
“개소리.”
“진짜입니다.”
진심을 담아 말했다.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된 새끼.”
거짓, 기만, 점철.
보통 저런 걸 입 밖으로 말하나.
근데 욕은 아닌데, 이상하게 되게 불쾌하다.
“원하는 걸 말씀해 보시죠.”
박사는 몇 번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전부 물러가라. 그리고 다시는 날 찾지 마.”
아니, 이 사람아. 어디까지나 받아들일 수 있는 걸 말해야지.
“안 돼요.”
“젠장할, 날 가만히 내버려 둬.”
왜 갑자기 울먹거리냐.
늙은 남자가 우는 걸 보고 싶진 않다. 박사는 한강 다리 위에서 이제 곧 죽을 거라고 외치는 사람처럼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였다.
이쯤 하면 된 것 같은데.
감정이 흔들리고 이지(理智)가 흐려진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특수종, 그것도 불멸특수대 요원 다섯이 자리에 있다.
누군가는 시야 밖에서 그를 제압할 수 있단 소리다.
전부 그걸 위한 준비였다.
팬더 대리가 말을 걸고.
기남이가 시선을 끌고.
사수와 강 대리가 박사의 시야에 잡히는 동안, 내가 나서서 되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이제 남은 건 팀장뿐.
왼쪽으로 몇 걸음만 움직인 뒤, 총으로 손등에 구멍을 뚫어도 좋고.
기척 없이 다가가 제압해도 좋다.
방법은 많았다.
그리고 팀장은.
“뭘 숨기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일은 안 하고 입을 털었다.
시발 팀장님? 시발, 지금 뭐하심?
한마음 한뜻으로 일을 하는데, 왜 혼자 다른 경로로 가시나.
“솔직히 까는 게 나을 텐데.”
이어진 팀장의 말에 박사가 손을 파르르 떨었다.
박사의 시선이 팀장에게 향했다. 고작 1초 남짓이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기척을 죽이고 소리를 죽인다.
나에게 주의를 집중하지 못한 박사의 앞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다시 시선이 나에게 돌아오기 직전.
우득.
손목을 잡아 꺾자, 툭 하고 권총이 떨어졌다.
“악.”
박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많이 아프겠지. 그래도 부러뜨리진 않았는데.
“괜찮아요?”
정중히 물었다.
“괜찮겠냐!”
박사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럼 놔두라고 자기를 향해 총구를 들이댄 사람한테 뭘 어떻게 더 해 줄까.
“다시 진입한다.”
뒤에서 팀장이 말했다.
“안 돼!”
박사가 외쳤다.
팀장은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팬더 대리가 혀를 차며 뒤따랐고.
사수는 말없이 걸었다.
난 권총을 다른 손으로 줍고 손목을 놓아주며 박사에게 말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법입니다. 포기란 배추를 세는 단위일 뿐.”
대충 힘내라는 말을 하니.
“또라이 새끼가.”
박사가 중얼거렸다.
거, 사람이 배려를 받을 줄 모르네.
어쨌든 그리 타박타박 걸어가니, 뒤에서 박사가 다리를 질질 끌며 쫓아왔다.
안에는 펜션 내부에서 보기 힘든 구조물이 보였다.
철창?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미니 감옥이 펜션 거실 구석에 버젓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잡힌 녀석도 보였고.
발가벗은 몸, 봉긋이 솟은 가슴.
몸 곳곳에 난 붉은 자국.
야동에서나 볼 법한 재갈이 입에 물려 있고.
몸은 은회색의 단단한 줄로 묶여 있다.
슬쩍 봐도 열다섯? 여섯?
작은 체구의 여자가 구석에 쓰러져 신음하듯 숨만 토하고 있었다.
미약한 숨소리, 작게 들썩이는 가슴.
빠직,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뒤로 돌아 주먹을 뻗었다.
탁하고 누가 팔뚝을 감아서 막지 않았으면 그대로 박사의 머리통에 주먹이 꽂혔을 거다.
그럼 뇌수, 뼈, 피 따위가 사방을 물들였겠지.
팬더 대리였다.
“죽이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여자를 존중할 줄 모르는 새끼는 개새끼라고.
어머니도 말씀하셨다.
성별을 떠나 사람을 학대하는 새끼는 개새끼라고.
이 새끼는 둘 다다.
죽일 생각이었을까? 모르겠다.
순간 열이 올라온 건 확실하다. 엄마가 조심하라고 하던 변신족의 본능이 이런 식일까.
뒤통수에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숙였다.
훅 하고 주먹이 지나갔다.
“피해?”
“왜요?”
팀장이다.
“흥분하지 마라. 새끼야.”
좋아. 흥분을 가라앉히자.
눈에 여전히 그 처참한 아이가 보였다.
“좋아요. 그럼 머리 말고 팔 두 개, 다리 두 개만 부러뜨리죠.”
진정했다. 이 정도면 괜찮잖아.
“미친놈이.”
팀장이 날 극찬했다.
실제로 주먹을 휘두르진 않았다.
그전에 박사가 먼저 중얼거렸으니까.
“내 딸이야, 애는 그냥 놔둬.”
응? 뭐라고?
“하아.”
뒤에서 팬더 대리가 한숨을 토했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아이란다.
반쯤 죽어가는 여자애와 박사를 번갈아 봤다.
“그만 봐, 이 새끼야.”
팀장이 핀잔을 줬다.
“정아.”
“네.”
사수가 손수 철창문을 반쯤 뜯어내듯 열고 들어가 여자를 안고 나왔다.
강 대리가 주변에 있는 담요를 찾아 건넸다.
철창 안에 있는 모든 건 대부분 찢어져 흩어졌다.
담요나 그릇 조각도 보인다.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저렇게 되냐.
그런데 아이를 안 보여 주려고 자기 머리에 총을 겨눠? 보통 아이가 아니란 말이다.
나보다 팀장이 먼저 생각을 끝냈다.
“실험체?”
박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내 아이는 안 돼. 내가 필요하다면서, 내가 갈 테니, 애는 놔둬.”
“동훈아, 상태.”
“면역 반응 이상, 비타민 부족, 에, 거기에 정신 영역도 무너져 있네요. 당신 용케도 살아남았네.”
마지막은 박사를 향한 말이었다.
“내 아이요”
박사는 그 말만 반복했다.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것 같은데.
상황은 대충 이해했다.
연구원, 독신, 그리고 아이.
철창은 아이가 아니라 아이에게서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
정확히는 박병준 박사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다.
몸에 남은 상처는 자학이었다.
재갈을 물린 건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
그런데.
“되게 안 닮았네요.”
내가 말했다.
아버지라면 뭐 어디 닮은 구석이 있어야지.
뭐, 왜, 다들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아니,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고문관 바라보듯이 보지 말라고.
느낀 대로 말한 것뿐이라고.
“저기 가서 대가리 박고 있어.”
팀장이 말했다.
진짜 대가리를 박진 않았다.
다만, 그만큼 다들 날 흘겨봤을 뿐.
쯧.
특히나 기남이 혀를 차는 건 몹시, 매우 불쾌했다.
자, 그래서 이걸 어쩐다냐.
이 아이는 실험체, 딱 보니까 미완성.
정부가 알면 곧바로 실험실, 또는 연구실행이다.
그럼 저 아이 인생은 끝나겠지.
무엇보다 사적 실험체는 제거 대상이기도 하다.
정부에 아이가 끌려가면 음지의 실험체가 되거나 죽는다.
그걸 알기에 박사는 여기서 버틴 거고.
문제가 꽤 골치 아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