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동대문의 구원자
따란따도 여자 말고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며칠 전, 처음 가 본 여자의 방에서였다.
사수가 저 낯짝을 보면 뭐라고 했더라.
상대하지 말고 냅다 튀라고 했다.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남자다. 사진보다 훨씬 와일드해 보였다.
어깨는 딱 벌어졌고 눈은 부리부리했다.
불멸자에 비하면 한 수 쳐지는 얼굴이지만, 남성미는 물씬 풍겼다.
고로, 저 작자는 변신족이다.
“목적을 잊지 마라.”
남자가 말했다.
묵직한 저음이었다.
생긴 것과 목소리가 딱 맞아떨어졌다.
남성미 하나만 보자면 불멸자보다 낫네.
괜히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폈다.
그나저나 어쩐다.
뒤로 빠질까? 여기서 냅다 뛰면 안 잡히려나?
이전 동대문역 전투에서 배운 걸 써 볼까?
팀장의 기술을 훔쳐 배워서, 이름은 몰라서 나름대로 이름을 붙였다.
기척 흩날리기라고.
“알아.”
여자가 답했다.
“그때는 고마웠습니다.”
날 유인한 남자가 말했다.
수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한 대 후리고 싶었다.
함정으로 끌고 들어와 놓고는 해맑게도 쳐 웃네.
“아들, 기억해. 한 번 속인 놈은 두 번도 속일 수 있어. 그런 놈들은 잘 기억해 둬.”
“왜요?”
“다음에 잡히면 다리 몽둥이를 분지르, 아니, 잘 피해 다니라고.”
도박꾼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감명받으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변신족은 흥분하면 단순해서 잘 속는다는 둥, 넌 그러지 말라는 둥, 영화 한 편에 설교가 반 시간이었다.
네, 어머니.
저 얼굴, 똑똑히 기억했습니다. 넌 최소 사지 한 군데 뽀각이다.
슬쩍 왼발 끝을 틀었다.
의도를 보이며 상대의 반응을 유도하는 수였다.
따란따도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뭐라 말하려 했다.
칼날처럼 갈아 둔 오감이 그녀의 입술 움직임을 읽었다. 열리던 입술이 닫힌다. 그녀는 말을 잇는 대신 날 노려보며 한 걸음 나서려 했고.
뒤에 있던 ‘만나면 피해야 할 자식’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둘 사이에 암묵적인 동의가 오갔다.
퉁.
발로 바닥을 밀어낸다. 허벅지, 종아리, 발끝으로 이어진 힘이 가속을 가져왔다.
훅하고 사물이 밀려났다.
“제 이름은 스…….”
사기꾼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코앞에 내가 다다랐다.
왼손을 뻗는다. 잡아서 당기며 팔을 부러뜨리고 던지려 했다.
사기꾼은 반응하지 못했다.
놀라서 눈만 부릅떴다.
막 팔에 손이 닿는 순간, 난 불길한 예감, 아니, 유형화된 살기를 느끼고 고양이처럼 몸을 날려 벽을 차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짧은 순간, 난 환상을 봤다.
남자의 손이 내 머리를 잡고 팔을 잡아 뜯고 다리를 걷어찬다. 일격에 실린 파괴력이 몸을 터트리고 찢는다. 난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땅에 널브러진다.
“나쁘지 않군.”
남자가 말했다.
“난 몹시 나쁜데.”
내가 답했다.
“이죽거리는 건 본래 그런 것 같고.”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날 위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느껴져 손을 들어 적절히 몸을 감추는 시늉을 했다.
“나 여자 좋아한다.”
내가 말하자, 따란따도가 나섰다.
“주둥이 조심해.”
어떤 언어든지, 일단 욕부터 배우라고 하더니.
저 여자, 주둥이란 말은 되게 또렷하잖아.
“후, 동대문 때도 그랬지만, 놀랍네요. 고작 1년 차 신입 요원인데.”
사기꾼은 식은땀이 났는지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 나도 어느새 뒷머리가 축축했다.
살기 한 번에 식은땀이라니.
어머니가 보셨다면 ‘난 널 그렇게 약하게 키우지 않았다’라고 하실 거다.
야생의 살기, 과외 선생 이후 이렇게 강렬한 건 처음이다.
“돌려 말하지 않겠어. 유광익, 너한테 제안을 하고 싶다.”
따란따도가 말했다.
만나면 피해야 할, 그러니까 기피 대상 1호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분위기가 묘했다.
날 죽이러 온 건 아니고.
잡으러 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이 분위기는 뭔가.
“상황 설명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기꾼이 나섰다.
“제 이름은 스티븐 최입니다. 작지만 알찬 헤드헌팅 전문기업에 종사하고 있죠.”
“경찰이 아니고?”
“그때도 광익 씨 만나러 간 건데, 일이 된통 꼬여 버렸지 뭡니까.”
머쓱한 척하며 뒤통수를 긁으며 말하는데, 이상하게 밉다. 한 대 때리고 싶은 그런 얼굴이다.
슬쩍 다시 자세를 잡으니.
따란따도가 날 노려보며 읊조렸다.
“그만해라.”
“내가 뭘.”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사이 사기꾼 놈이 말했다.
“정식으로 제안하죠. 인재를 원하는 곳이 있고, 인재가 있으면 그걸 연결하는 게 제 일입니다. 불멸특수대 2급 사원 유광익 씨를 소개합니다.”
소개는 무슨.
“일 끝났으면 나와.”
“네네, 제 일은 여기까지죠. 잊지 마세요. 불발이어도 수수료는 나옵니다.”
“돈벌레 자식.”
따란따도가 말했다.
상황은 복잡하지 않았다.
유인은 당했지만, 함정은 아니다.
하긴 여기서 한바탕하긴 얘들도 부담스러울 거다.
화림 본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일이 터지면 불특대 팀이 5분 내로 출동하겠지.
결론, 이들은 정말 스카우트 제안을 하러 왔다.
“유광익, 우리가 누군지는 알지? You know? 이건 정말 나쁘지 않은…….”
“나 좋아하는 여자 있어.”
고백은 하기 전에 거절하는 법이다. 다 듣고 나면 어색해진다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곧 앙칼진 외침이 울렸다.
“시발, 나도 너 싫어!”
내 이름은 구리게 발음하면 시발은 찰지기도 하네.
“그럼 됐네. 끝.”
말과 함께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뒤에 선 남자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이거 기분이 묘하네.
이대로 물러나면 몸이 반으로 쪽 쪼개질 것 같은 기분인걸.
팔짱 낀 채로 노려보기만 하는데 왜 이러는 걸까.
“유형화된 살기가 응축되면 사람도 죽여.”
과외 선생이 말했었다. 난 그걸 실감했다.
피부가 따끔따끔한걸.
“약속은 지키실 거죠?”
사기꾼이 말했다.
끄덕.
기피 대상 1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 나섰다.
“듣고 나서 결정해라.”
이대로 트렁크 입히고 머리에는 몽콘(무에타이 선수가 차는 머리띠), 팔뚝에는 프랏치앗(무에타이 선수가 팔뚝에 감는 띠) 따위를 채워 놓으면 무에타이 챔피언처럼 보일 것 같다.
제안이라며, 안 들으면 지금 당장 날 죽일 기세잖아.
“육체적 위협은 없을 겁니다.”
사기꾼이 말했다. 저 작자는 나한테 영원히 사기꾼이다. 평생 변하지 않을 거다.
“왜요?”
“약속했거든요.”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 아닐까.
특히나 테러 단체의 간부에게 약속이란 두 글자가 얼마나 대단할까.
“우리와 함께하면 높은 지위를 약속하겠다.”
“니 위로?”
따란따도가 말하기에 답하니까.
“캬앗! 그럴 리가 없잖아!”
흥분한다.
“당신 지위가 뭔데?”
“알 거 없어.”
쩝. 떠보는데 말은 안 해 주네.
“그럼 뭐, 돈은 많이 주나?”
“갑부가 부럽지 않을 거다.”
“여자는? 나 여자 좋아하는데.”
“그것도 원하는 만큼.”
경멸 어린 표정으로 답하는 게 꽤 귀엽다.
“집은? 나 펜트하우스 아니면 잠이 안 오는데.”
“맨해튼? 강남? 원하는 곳 어디든.”
“복지는? 내가 또 휴일을 끔찍이 챙긴단 말이야. 쉬는 날 할 것도 많고.”
“프로메테우스의 간부가 되면 네 상상 이상의 삶이 펼칠 것이다.”
“좋아. 거절.”
참 대단한 자식들이긴 하네.
생각해 보면 내가 바로 프로메테우스가 가진 양지의 사업체를 뒤집어엎은 주범 중 하나인데, 스카우트 제의를 한다니.
이런 발상 자체가 대단하다.
“잘 생각해. 후회할 거다.”
따란따도가 말했다.
“안 해.”
“후회할 거다.”
“당신이 조금만 내 타입이었으면 고민했을 텐데, 너무 별로야.”
말하니, 발끈한 따란따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기피 대상 1호가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이게 마지막이다.”
그거로 끝이었다.
이들은 유유히 물러갔다.
처음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몸을 숨기고, 깜빡이는 가로등을 배경으로 사라졌다.
스티븐 최라도 잡으려 했는데, 그도 어느 샌가 자리를 비웠다.
거참, 능력이 너무 출중해도 난리야.
적이라 할 수 있는 집단에서도 이렇게 탐내다니.
내 매력이 문제일까.
* * *
가게로 돌아가니, 요한과 귀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떠들 일은 아니었다. 아니, 요한에게 말하기가 싫었다.
이런 일은 직접 말해야 맛이지.
내일은 다시 출근이었다.
집에 돌아가서 꿈도 안 꾸고 숙면을 취했다.
“이건 좋네.”
내 샤워 타월을 찢은 정기남은 일회용 고급 타월을 썼다.
각 잡고 수납한 물건 전부 고오오급이다.
난 그걸 하나씩 꺼내 썼다.
“룰루랄라.”
기남은 샴푸도 고급이었다.
자식이 돈 벌어서 다 여기다 쓰나.
다 씻고 알몸으로 나왔다.
“내 거 썼지?”
기남이다.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야, 너 변태 같아. 샤워 끝나는 거 기다리면서 그러는 거 아니다.”
“이 개자식.”
자식이, 너무 쉽게 흥분한다.
요원은 냉정함이 첫째인데.
달려드는 기남의 주먹을 피하고 수건으로 주먹을 돌돌 말았다.
얍, 수건 글러브.
뻥.
스트레이트가 기남의 턱주가리에 꽂혔다.
“또 당할 줄 알았냐?”
의기양양하네. 기남이 내 수건 펀치를 양 손바닥으로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그래, 한 방 막은 거 칭찬해.
난 발을 걸었고 균형을 잃은 기남의 목울대를 손날로 후렸다.
“꺽!”
반응할 수조차 없는 신속한 연계기다.
컥컥거리는 기남의 경동맥을 팔뚝으로 감싸며 백 포지션을 잡고 발로는 허벅지를 안았다.
매미권이다.
“누가 보면 오해하겠네.”
알몸으로 다른 남자를 안고 있다니, 이거 참.
기남은 버둥거리다 고이 잠들었다.
난 친절하게 포스트잇에 메모를 남겼다.
(지각하지 말고. 우리 기남이.)
옷을 입고 출근길에 나섰다.
날은 조금씩 더워졌지만, 새벽 공기는 언제나 상쾌했다.
출근길이 도보 5분 거리, 사옥 최고다.
오늘은 내가 처음이었다.
사수도 아직 안 왔다.
이른 아침 출근은 언제나 행복한 법이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캐주얼 흰 셔츠에 연 청바지, 오늘은 기운이 좋았다.
맑은 햇살을 감상하는 사이 사수가 출근했다.
“일찍 왔네.”
“네.”
“좋은 일 있어?”
“좋은 일은 아니고 어제 참, 아니다. 이따가 다 오면 할게요.”
‘나 할 말이 있어요’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앉았다.
사수는 딱히 호기심을 표하지 않았다.
두꺼운 파티션 너머의 동료도 출근을 시작했다.
“오, 동대문의 구원자.”
“네?”
“몰라? 너 그날 이후로 붙은 별명인데.”
옆 팀 대리다.
사람 말보다 빠른 뉴스는 없다고 했던가.
그날 있었던 일은 빠르게 퍼졌다.
그 입 싼 요한이 말해 주지 않아서 몰랐다. 한방 쓰는 정기남은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생명체였고.
띠딩.
메신저가 울렸다. 요한이었다.
[김요한] 놀랐냐? 동대문의 구원자 나리,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오, 동원자.”
누군가는 줄임말로 날 부르기도 했다.
“쑥스럽네요.”
난 어깨를 딱 편 채로 겸양을 보였다.
사람이 겸손을 모르면 오만해 보이기 마련이다.
“쑥스러운 거 맞아?”
출근한 팬더 대리가 피식 웃었다.
나흘 만에 보는 얼굴이다.
반가웠다.
특히 오늘은 더욱더.
“팀장님은 출근하는 법 까먹으셨답니까?”
“이 새끼야, 돌아서기만 하면 뒷말이냐?”
“아닌데, 정면에서 했는데요.”
저 뒤에서 오는 거 다 봤다.
팀장도 출근했다.
“너 죽이기 전에는 나도 안 그만두지.”
저런 말을 진지하게 하니까 농담 같지가 않네.
“동대문의 구원자? 웃기고 자빠지셨네. 구원자가 다 얼어 뒈졌냐? 시발.”
그래,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섭섭하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난 무게를 잡고 말했다.
이제 말할 때다. 이것 때문에 요한에게도 말 안 했다.
“어이가 없더군요.”
보안 3팀 전원이 날 바라봤다. 옆 팀에서도 귀를 기울였다.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시발, 뜸 들이는 거 재수 없네.”
팀장이 끼어들었다. 하여간 초를 쳐요.
“프로메테우스, 거기서 저한테 일자리를 권하더군요.”
어때 놀랐지? 적조차 인정한 남자, 유광익.
동대문의 구원자 유광익.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남자 유광익.
그 남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