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할 말이 있어
“앉아.”
사수의 집은 단출했다.
거실에 소파 하나, 거실에는 커튼 대신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두근대는 심장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사수는 외투만 벗고 싱크대로 향했다.
손 씻고 멍하니 기다리니, 사수가 덜그럭거리며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런 사수를 보며 난 생각했다.
이건 정말 그린 라이트인가.
밥 먹고 와인 한 잔 마시면서 그윽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그런 타이밍인가.
그런 것치고는 사수는 지나치게 담백했다.
날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일이니까 한다. 필요하니까 한다. 그런 의지가 어깨너머로 느껴졌다.
곧 식사 준비가 끝났다.
송송 썬 토마토와 갖가지 채소가 섞인 샐러드.
구운 소고기와 잡곡 즉석밥.
“잘 먹겠습니다.”
먹었다. 씹고 삼켰다.
우적, 쯥.
드레싱 없는 샐러드를 먹으니 염소가 된 기분이었다.
고기는 퍽퍽했다. 굽는 방법도 문제지만, 소금기가 없다.
김치도 없다. 단무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사수.”
“왜?”
“매일 이렇게 먹습니까?”
진지하게 물었다.
이건 소고기에 대한 배반이다. 짠맛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샐러드도 이것보다 열 배는 맛있게 먹을 수 있잖아.
“문제 있어?”
“조오오오오오금 싱겁네요.”
검지와 엄지를 붙이며 말했다.
“염분은 이 정도로 충분해.”
사수가 말했다.
건강식이다. 먹으면 건강해지는 기분이 드니까 좋은 거다. 세뇌 후 다시 씹었다.
무표정으로 우적우적 씹으니 사수가 말을 덧붙였다.
“몸에 좋아.”
난 사수를 빤히 바라봤다.
평소의 사수를 봤을 때, 이 표정은 부끄러움이다.
난 짓궂은 성격이 아니지만, 이런 표정의 사수를 보니, 절로 입이 움직였다.
“입에는 안 좋네요.”
“고농도의 염분은 건강하지 않아.”
핑계처럼 들렸다.
“음메에.”
염소가 된 기분에 말하니.
번뜩.
사수가 노려보며 말했다.
“그냥 처먹어.”
네.
말없이 먹었다. 그래도 배는 찼다.
다 먹고 싱크대에 그릇을 옮겼다.
그릇을 대충 닦고 행군 사수가 소파에 앉은 나에게 다가왔다.
“할 말이 있어.”
두근.
다시 심장이 나댔다.
생각해 보라. 사수는 나와 염색체가 다르다. 여자가 혼자 사는 집에 남자를 부른 이유가 뭘까.
너무 뻔하다.
“잠깐만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사수는 기다리지 않았다.
“방으로 가자.”
너무 빨랐다. 진도가 너무 격하다.
“아니요. 안 됩니다.”
난 욕망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상형이 있습니다.”
참하고 섹시하고 낮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요부, 몸매도 중요하고 볼살은 조금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사수도 예쁘다. 몸매도 좋다. 근육이 붙은 몸은 탄력도 넘쳤다.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사수가 예쁘긴 하지만…….”
“따라와.”
사수는 상큼하게 내 말을 자르고 방으로 향했다.
아니, 진짜 이건 아니라니까.
고민했다.
이대로 내가 나가면 사수가 얼마나 무안할까.
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이다.
신중해야 한다. 한 번의 선택이 많은 걸 바꿀 것이다.
고민 끝에 발걸음을 옮겼다.
난 여기서 정조를 잃지 않을 것이다. 굳게 다짐하고 방으로 향했다.
반쯤 열린 방으로 들어가니, 건조한 풍경이 보였다.
예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음.”
절로 짧은 신음이 나왔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사진, 그 위에 붙은 갖가지 메모와 종이가 보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런 관계도다.
침대나 의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조함 속에서 역사가 이뤄질 순 없을 것이다.
“이게 뭡니까?”
“현재까지 밝혀진 프로메테우스 일원.”
묵묵히 사수를 바라봤다.
나대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호수 깊은 곳에 빠진 돌처럼 차분해졌다.
“뭘 기대한 거야?”
사수가 물었다.
“아무것도요.”
발뺌하자, 사수가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이번 일로 그쪽에서 너를 노릴지도 몰라. 조심해야 할 거야. 특히, 이 셋.”
사수가 말하며 세 장의 사진을 가리켰다.
“누군데요?”
“마주치면 피해야 할 사람.”
한 명은 말쑥한 정장 차림의 잘생긴 남자.
다른 하나는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남자.
마지막 하나는 빨간 입술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사수의 눈을 바라봤다.
타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왜요?”
함축된 질문이다. 왜 집에 이런 걸 두고 나에게 이런 경고를 하는가.
내 눈에 덩그러니 놓인 액자 하나가 보였다.
그 안에, 지금보다 열 살은 어린 것처럼 보인 사수의 얼굴이 보였다.
해맑게 웃고 있다.
그 뒤로 부모로 보이는 둘이 웃으며 사수의 어깨에 손을 올린 사진이었다.
탁.
내 시선을 느낀 사수가 액자를 눕혔다.
“저 셋뿐 아니라, 그쪽 놈들은 다 조심해야 한다.”
사정이 있다. 뭔가 있었다.
물을까? 아니, 물을 수 없었다.
육감과 직감의 영역에서 난 사수의 상처를 봤다.
그 상처를 억지로 헤집을 순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팀장, 팬더 대리, 사수까지. 셋에 대해 몰랐다.
직장 동료인 그들은 알아도, 인간으로서의 셋은 몰랐다는 거다.
사수는 비약 인간으로 전사적 왕따 취급을 받으면서 왜 이곳에 남았는지.
팬더 대리는 다른 팀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왜 회사에 남았나.
시발 팀장은 왜 가진 능력에 비해 고작 팀장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가.
“이제 가.”
사수가 축객령을 날렸다.
“네.”
언젠가는 말해 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방도 보여 주지 않았겠지.
“광익.”
현관문 앞에 서자, 사수가 날 불렀다.
“난 프로메테우스를 죽여야 해.”
프로메테우스는 테러 단체다. 사람이 아니다.
사수는 말했다.
집단, 단체를 죽여야 한다고.
뒤를 돌아봤다. 사수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 무표정 안에 울먹이는 소녀를 봤다.
두근.
이곳에 들어올 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네, 죽여 버리죠.”
답하고 문을 나섰다.
사수는 날 믿었고, 신뢰했다.
저 방은 그녀의 치부이자, 모든 것이다. 그렇게 느껴졌다.
원한? 복수?
몇 가지 생각이 스쳤고 곧 그 생각을 허공에 날려 버렸다.
알 게 뭔가.
프로메테우스는 악이고, 적이다.
그리고 사수는 사수다.
여자로서 좋아하진 않지만, 난 저 사람이 좋았다.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었다.
“김치 땡기네.”
입안이 텁텁했다. 컵라면에 김치가 당겼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과 맛김치를 샀다.
세상일 어렵게 보면 한없이 어렵다. 반대로 쉽게 생각하면 쉬운 거다.
난 생각의 구조를 단순하게 바꿨다.
일단 프로메테우스가 이 일로 날 노려도 지금 당장은 아닐 것이다.
이 일이 지금 당장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 걱정은 접어 두자.
사수랑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내 보금자리에 도착했을 때다.
현관문 앞에서 난 걸음을 멈췄다.
그래야만 했다.
오감과 육감,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집 안에 누군가 있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생각했다.
뭘까, 프로메테우스의 암살자?
벌써 왔나?
호랑이 가면을 썼지만, 정체를 완벽하게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대는 테러 단체.
물증이 아닌 심증만으로 덤비고도 남을 놈들이다.
최근에 일어난 일, 머니 & 세이브 금고 파괴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불멸특수대고.
하물며 사수는 조금 전 나에게 조심하라고 했다.
긴장감이 심장을 움직였다.
그래도 강제로 침입한 흔적은 없으니.
편의점 봉투를 쥔 채로 도어락 버튼을 누르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퉁.
문이 열렸고, 난 안에 있는 상대를 확인했다.
놈은 덤비지 않았다. 거실 한복판에 서서 현관 앞에 선 날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 어린 감정은 경멸과 불쾌함이다. 더러운 오물을 보는 그런 눈빛이다.
“최악이다.”
놈이 말했다.
내가 할 말이었다.
“니가 왜 여기서 나와?”
“정말 최악이군.”
상대가 말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그것과 별개로 빛이 나는 미모의 남자.
청바지에 맨투맨 티 하나만 걸쳤는데도 방금까지 촬영을 하다 온 모델 같은 외모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날 노려보는 놈.
아는 얼굴이었다.
몇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맞아?”
“빌어먹을 놈.”
저 새끼는 입에서 튀어나오는 게 다 욕인가.
슬슬 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긴 했지.
적의 침입은 없었다.
대신 룸메이트가 생겼다.
“테러범 새끼.”
놈이 말했다.
화림 입사 시험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정겨운 동기였다.
정기남 개나리가 내 룸메이트였다.
“테러범은 누가 테러범이야.”
내가 말했다.
“너.”
기남은 말하고 몸을 팩 돌려 방으로 향했다.
쿵 하고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저 개나리를 나와 한집으로 배정한 건지는 몰라도.
파국을 예감케 하는 일 처리였다.
“컵라면 먹을래?”
그래도 한집에 사는 사이다. 배려 차원에서 말하고 덧붙였다.
“아, 네 건 네가 사 와야 한다. 3급 사원 허약 체질 정기남.”
“닥쳐.”
방문 너머로 괜찮다는 답이 들렸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물을 끓이고 김치를 뜯었다.
후루룩 씹어 삼키고 나니 배가 든든했다.
염분 최고, 소금 최고, 짠맛 최고.
먹고 씻고 쌌다.
푸드드득.
시원하게 한 판 밀어내니.
“죽여 버린다.”
중얼거리는 기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뭐라고? 진급도 못 한 동기의 목소리라 안 들리는데?”
안 들렸다고 정중히 말했다.
곧 방문이 열렸다.
칼을 든 기남이 보였다. 칼날이 푸른 빛이 감도는 게 좋아 보였다.
두 뼘 길이의 중세풍 단검이었다.
화장실 문을 연 채로 놈을 빤히 봤다.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낮은 날 본 기남은 미간을 찌푸리고 코 평수를 벌름거렸다.
저래도 잘 생겼네.
참 신기한 얼굴이야.
“내 눈을 뽑아 버리고 싶군.”
기남은 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뽑아 줄까?”
친절히 제안했다.
쾅!
열린 것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문이 닫혔다.
자식, 좀 예민하네.
난 화장실 문을 닫았다. 싸고 씻고 양치까지 완벽히 끝낸 뒤에, 침대에 누웠다.
요한과 귀태가 함께 있는 단톡방에 톡을 보냈다.
[나] 내 룸메이트 정기남
[싸구려 입 요한] 진짜냐? 너 이제 어쩌냐? 그 자식 좀 예민해야지.
괜찮아. 내가 안 예민해. 괴로운 건 내 쪽이 아닐 것 같은걸.
[방귀방귀태] 우리 미호 오늘 사진
우리 귀태 형은 도촬범으로 진화했구나.
우미호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찍힌 사진이다.
미친 친구 둘과 시시덕거리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잡생각이 사라졌다.
졸렸다.
“잘자, 내 꿈 꿔.”
예민한 룸메이트에게 마지막 인사를 날렸다.
쿵!
놈이 벽을 때렸다.
대답이 참신했다.
눈을 감았다. 요 며칠 일이 참 많았다. 덕분에 꿈이 난잡했다.
꿈에서 사수가 나왔다.
“광익.”
평소와 똑같은 말투로 다가와 내 뺨을 어루만졌다.
손이 따뜻했다.
기남이도 나왔다. 내가 산 집에 월세로 세를 들어왔다.
난 놈을 구박했다.
놈이 빌빌거렸다.
우미호도 나왔다. 얘는 수영복 차림이다. 어느새 주변이 해변이었다.
알찬 꿈을 꾼 뒤 일어나니, 어머니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밥은 먹고 다니니?]
요새 연락이 뜸했지.
네 잘 먹고 다닙니다.
눈을 떴다. 활력이 넘쳤다. 잘 먹고 잘 자면 몸에 힘이 넘치는 법이 아닌가.
“잘 잤다!”
평소와 다르게 세차게 외치고 몸을 일으켰다.
다시 출근할 시간이었다.
* * *
낄낄낄낄.
출근하자마자, 팀장이 날 보고 낄낄 웃었다.
저 양반은 오늘 왜 일찍 나와서 웃음보가 터졌나.
“로또라도 됐어요?”
물었다.
“너 기남이랑 한집이라며?”
팬더도 일찍 왔다. 그가 말했다.
“소문 참 빠르네요.”
“김요한이 왔다 갔다.”
입이 싸다 못해 나풀거리는군, 김요한, 이 새끼.
사수는 관심이 없는지 날 힐끗 보더니, 눈으로 인사만 건넸다.
어제 일이 있었지만, 오늘 보니 평소와 똑같다.
하긴. 사수는 사수다. 변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게 재밌어요?”
팀장에게 물었다.
“어, 완전.”
낄낄대며 웃는 팀장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지만, 지낼 만합니다.”
내가 말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타다다 하고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아침부터 사무실에서 뛰는 거냐.
막 출근한 기남이 나한테 달려오는 게 보였다.
왼쪽 눈가에 시퍼런 멍이 보였다.
“왔어? 친구?”
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놈이 주먹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