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도핑
남명진 사장의 비서는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이 있었다.
긴 세월 살면서 알게 된 취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보고서 사본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사장과 대화를 나눈 유광익이 물었고,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고서를 출력하는 짧은 시간 동안 유광익은 입을 털었다.
“다 들으셨죠? 이게 또 보통 일은 아닌데, 사장님은 왜 그러신데요?”
비서는 말 많은 사람이 싫었다.
그는 어설픈 대화보다 어색한 침묵이 편했다.
“사장님은 아는 거죠? 테러 단체랑 손잡은 놈 아는데 놔두는 거죠?”
비서가 답하지 않았음에도 광익은 계속 말했다. 입을 쉬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랑 손잡은 놈 그냥 알려 주시면 안 되나? 남 사장님 비밀이 많은 타입이죠? 음흉하다고 여기저기 소문내 버려야지.”
다른 사람의 흉을 보는 것도 싫어했다. 다만, 이번만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제 눈앞에서 자신의 상사에 대해 담화하는 건 또 처음이다. 뒤에서 얘기한다고 말하기도 뭐하다.
지금 나누는 대화는 겨우 벽 하나,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사장의 귀에 똑똑히 들어갈 테니까.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유광익 사원과 자신의 나이 차이는 형이라는 글자로 치환될 수 없었다.
비서는 광익의 나이를 알았고 그와 자신의 나이 차가 스무 해가 넘는다는 걸 알았다.
“안 된다.”
비서가 답했다. 답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작은 문제를 깨달았다.
말 많고 자신의 눈앞에서 상사를 비난한다.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한다.
그런데도 유광익이란 인간이 밉지 않았다.
배시시 웃으며 광익이 말했다.
“나중에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사장님은 아니지만, 또 비서님 입장은 다르잖아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물끄러미 보자, 광익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거 다 사장님 잘되라고 하는 거고, 잘되면 좋은 거잖아요? 나서서 문제가 되는 거면 몰래 뒤에서 딱 한 번만 도와주세요. 안 걸리게요.”
광익이 손으로 코밑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왜 싫지 않을까.
비서는 곧 답을 찾았다.
상대는 꾸밈이 없다. 거절당한다 해도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같은 상황이 오면 또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묻겠지.
쓸데없는 기대가 없다. 그저 신뢰만 보였다.
도와 달라, 피해가 없게 하겠다. 날 믿어 달라.
이리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수함, 돌려 말하지 않는 직구.
사회 초년생이라고 해도 쉬이 볼 수 없는 특이한 타입이다.
그거 때문인지, 이상하게 친근함이 든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의 말이 논리적으로 틀리지도 않았다.
이 일이 잘되면 자신이 모시는 상사에게 유리한 상황이 된다.
‘해 줄까?’
한 번쯤은, 남명진 사장이 허락한다면 그래 줘도 괜찮을 것이다.
맹랑하고 순수하며 싫어하는 짓을 골라 하지만 밉지 않은 사원은 진짜로 부탁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보고서를 건네는 순간에 허락하지도 않았지만, 도움을 청했다.
메신저를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유광익] 저 말고 다른 사람 등 한 번만 지켜 주시죠.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무리한 부탁만 아니라면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정말 밉지 않은 친구다. 비서는 그리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사장의 허락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비서는 요청했고 사장은 드물게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말했지. 그거 묘한 놈이라니까.”
비서는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 * *
깜깜하다. 화끈한 열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끔찍한 통증이 그 뒤를 따랐다.
누군가 뼈를 끄집어내 불에 달군 뒤, 다시 내 몸에 꽂아 놓은 기분이었다.
집중하자. 통각을 조절했다.
태어나 처음 폭발에 휘말려 봤다.
그동안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수없이 하며 통증에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었다.
아니다. 더럽게 아프다.
유탄과 차량, 휘발유가 터졌다. 차량 파편은 곧 하나하나가 살상 무기가 됐다.
멀쩡하면 이상한 일이 터였다.
몸을 달군 열기를 잊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불멸자의 가장 큰 무기는 빙심(氷心)이다. 얼음장 같은 차가운 마음이다.
변신족은 육체를 무기로 삼고.
초능 특수종은 감정을 무기로 삼는다.
마법은 지식이 곧 무기고.
불멸자는 냉정함과 오감이 곧 그들의 무기였다.
내가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는 동안, 팀장은 회사 내에서 조사받는다는 핑계로 탱자탱자 놀고 있겠지.
돌아가면 몇 배로 갚아 줄 것이다.
고생했으니 고기를 사 달라 할 것이다.
잡생각, 익숙해지는 통증과 함께 귀에 아련한 비명과 고함이 섞여 들렸다.
먼저 회복된 건 청각이었다.
삐이이 하는 이명이 들리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고막에 받은 충격이 전부 회복되지 않은 거다.
그제야 정신이 어느 정도 제대로 돌아왔다.
나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했더라?
머리를 감쌌다.
멀쩡한 방탄이 없었기에 내 팔과 손을 보호구로 삼았다.
머리를 보호하는 게 최선이라는 판단이었다.
머리를 감싸기 전에, 수류탄 네 개의 핀을 뽑아 전부 차량과 벽 사이에 던졌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코에선 달군 숯 냄새가 났다.
꾹 감았던 눈을 떴다.
세상이 두 쪽이 났다. 한쪽 시야가 어둡고 침침했다.
왼쪽 눈만 시야가 확보됐다.
운 나쁘게 파편 하나가 오른쪽 눈을 파고들었다.
안구와 어깨를 포함한 관절 부위는 재생이 늦다.
아무리 변신족의 몸과 불멸자가 지닌 재생력의 콜라보레이션이 뛰어나도 시간이 필요한 부위였다.
“후.”
숨을 내쉬고 내 몸을 내려다봤다.
목이 칼칼했다.
차가운 얼음물을 마시고 싶었다.
폭발로 인한 열기가 숨골을 타고 넘어간 듯싶었다.
숨을 참았는데도 폭발의 압력이 만든 폐해였다.
오른팔이 없다. 오른쪽 허벅지 아래도 너덜너덜했다.
때려 죽어도 걸을 수 없는 상태다.
몸이 반파됐다.
“미친 새끼가. 너 각성한 지 얼마 안 됐지?”
폭발이 만든 열기와 연기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다.
질린 표정의 PWAT 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불멸이면 진짜 불사인 줄 아냐?”
나도 아닌 거 알거든.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했냐고? 그야 다 계획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벽이 무너졌다. 차량이 폭발했고, 그 시발점은 유탄이었다. 그사이 지향성 폭발력을 위해 수류탄도 까 넣었다.
결론, 머니 & 세이브 건물 옆 벽이 무너졌고 열기가 치솟았다는 거다.
뜨겁고 까칠한 열기가 이 일대를 휘감았다.
“미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사설 경비대장의 목소리다. 무너진 벽은 건물 형태를 바꿨다.
“범인 잡은 거다. 시발, 너 나한테 말 걸지 말라고 했지?”
감히 추측하건대, PWAT 저 양반도 보통 꼴통은 아닐 것이다.
“이 미친 새끼, 어디서 사주받았어?”
경비 대장은 미친 대원과 대화를 포기했다.
대신 날 향해 물었고.
난 그나마 부러진 거로 끝난 왼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호랑이 가면은 무사했다.
“산신령이 노하셨기에 어흥, 내가 왔노라.”
아주 잠시 침묵이 흐르고.
……까드득.
사설 경비대장의 어금니 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현병 있냐?”
PWAT 대장이 물었다.
이 친구 농담을 모르네.
농담 한마디에 눈이 악귀로 변했다.
구마(驅魔)가 필요하다.
날 도와줄 검은 사제는 없었기에, 내가 죽을 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냥 당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그리 생각하고 움직이려는데.
“이거 미친 새끼구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기척 죽이기.
그것도 더없이 깔끔하다. 아무리 내 몸이 반파돼서 감각이 무뎌졌다고 해도, 이 정도 거리를 허용하다니.
내 보폭으로 고작 예닐곱 걸음 뒤였다.
부서진 벽 안쪽에서 머리를 녹색으로 물들인 놈이 나왔다.
얼굴이 곱상했다.
불멸자다. 그것도 보통내기는 아닐 것이다.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야, 그거 내 범인이다.”
PWAT 대장이 말했다.
대장의 뒤로 대원 몇이 붙었다. 저들에게 잡혀가면 감옥행이다.
아무리 불멸특수대라고 해도 이런 사고를 치고 멀쩡할 순 없지.
“뺏어 가 보든가.”
녹색 대가리가 말했다.
반대로, 이쪽에 잡혀가면 최소한 한 달은 고문이다. 세계 최강 마조히스트가 될지도 몰랐다.
녹색 머리의 불멸자는 PWAT 따위 눈에 담지도 않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테러 단체 중 하나다.
실력 있는 놈 몇은 이곳에 배치했을 거고, 그중 하나가 이놈이겠지.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PWAT 대장의 말은 또 무시당했고.
녹색 대가리는 날 바라봤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순간, 뭔가 날아올 것 같은데.
그나저나 둘이 날 두고 다투는 걸 보자니, 인기인의 삶이란 고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두고 그만 싸워, 난 둘 다 싫다고.
“가면 안쪽이 궁금한데.”
터벅터벅. 녹색 대가리가 다가오고.
“저거 뭔데.”
화가 난 PWAT 대장이 소총을 겨누며 옆에 있던 사설 경비대장에게 물었다.
답은 없었다.
“시발, 대답 안 하냐?”
열 받은 PWAT 대장이 묻자.
“말 걸지 말라며.”
사설 경비대장이 픽 웃으며 말했다.
맞는 말이다. 난 그리 생각했다.
그러면서 슬쩍 혀를 움직였다.
폭발 직전에 혀 밑에 감춰 둔 알약이다. 난 캡슐의 감촉을 느끼며 그걸 삼켰다.
누가 보면 침 한 번 꿀꺽 삼킨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내가 삼킨 건 침만은 아니었다.
* * *
협회에서 나온 열화 능력자는 보이시한 이미지의 여자였다.
머리를 짧게 올려 쳐서 잘못 보면 남자로 보일 정도다.
“시작한다.”
성격은 매우 시건방졌다.
오자마자 반말을 찍찍 뱉더니.
“범죄자 나부랭이한테 지시받을 생각은 없어, 할 일만 정리하고 꺼져.”
이리 말했다.
김중고는 짜증이 났지만.
“그럽시다.”
금세 수긍했다.
애초에 이런 일에 흥분해서 길길이 날뛸 정도면 불멸특수대의 정보원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김정아랑 일하는 건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이쪽은 말이라도 하지, 그쪽은 제대로 대답도 안 했다.
김중고는 상대의 태도를 태연하게 받아들였고 제 할 일을 했다.
“이쪽을 녹여 주시면 됩니다.”
깍듯하게 상대를 대하기도 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신이 무시당하면 더 흥분한다.
김중고는 그걸 알았다.
빨갛게 반짝이는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벽에 손을 댔다.
솔직히 김중고는 감탄했다.
성격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음은 알지만.
‘어지간한 프리랜서는 명함도 못 내밀겠는데.’
새로 생긴 불멸자 동생이 말을 잘한 건지.
그게 아니면 이번 일로 사이오닉 협회도 어지간히 짜증이 난 건지.
둘 다일지도 몰랐다.
덕분에 벽을 녹이러 온 열화 능력자는 상당히 뛰어났다.
보통은 훌쩍 넘어서는 수준이었기에 예상 시간보다 벽이 녹는 속도가 빨랐다.
빨갛게 달궈진 콘크리트, 철제를 섞어 만든 곳에 용암이라도 부은 듯 녹은 건물 자재가 흘렀다.
훅 끼치는 열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뜨겁고 화끈하다. 저 여자와 사귀는 남자는 그녀의 열정이 과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해야 할 것이다.
까무러치게 사나운 열기는 호흡을 불편하게 할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앞쪽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니.
이쪽이 걸릴 일이 없다는 거다.
벽에 구멍이 뚫리자, 금고의 뒤통수가 보였다.
앞문이 아닌 뒤쪽, 그러니까 이쪽도 두꺼운 벽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 사설 금고는 내열성보다는 물리적 충격과 타격에 신경 썼다.
금고 벽을 녹일 정도의 열기라면 스프링클러가 터지고 일대에 난리가 날 테니, 당연했다.
물론 이번 경우는 상황이 달랐지만 말이다.
‘먹힌다.’
김중고는 그리 생각했다.
이전 지점은 금고를 태웠다면 이번에는 건물을 터트렸다.
방식은 과격하지만, 발상은 참신했다.
“여기도 녹여 주시죠.”
중고가 깍듯하게 말했다.
“그러지.”
열화 능력자는 두 번째 벽도 녹였다.
금고 뒷벽이었다.
앞쪽은 전장이 됐고, 덕분에 뒤쪽에 일어난 일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앞쪽에 일어난 일을 무시한 채, 벽에 사람 드나들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빨갛게 달궈진 양손을 털며 능력자가 말했다.
“알지? 내가 온 건?”
“없던 일입니다.”
그렇게 협회 능력자가 떠났다.
이제는 기다릴 시간이었다.
약속한 시각까지 딱 15분.
그 사이, 광익이나 우미호 둘 중 하나는 와야 했다.
만약 새로 생긴 불멸자 동생이 제시간에 안 온다면, 김중고는 제 몫만 챙기고 떠날 셈이었다.
세상사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아무리 친구가 좋아도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한 법이다.
* * *
사설 경비대장은 생각했다.
‘저 새끼.’
미쳤다. 미치긴 했는데, 더럽게 잘 싸우기도 했다.
머니 & 세이브는 프로메테우스가 꾸린 양지의 사업체다.
사설 경비대를 전부 프로 수준으로 구성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쭉정이만 있는 건 아닌데, 다 당했다.
제대로 무장한 병력 중 반 이상이 전투 불능이었다.
그게 끝도 아니다.
차량에 분신해서 폭발을 일으켰다.
‘영리하게 미쳤네.’
참신한 평가였다.
영리하게 미쳤고, 프로 수준으로 훈련받은 놈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한 집단의 지휘를 맡는다는 건, 상황을 직시할 줄 안다는 걸 의미한다.
경비대장은 상황을 파악했고 하나의 사실을 발견했다.
놀라울 정도로 눈이 좋은 놈이 하나 더 있다는 것.
저 영리하게 미친 새끼는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듯 필드를 헤집었다.
그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까 조력자가 있다. 사설 경비대장은 개인의 무력이 아니라 머리 굴리는 게 장기였다.
그는 자신의 장기를 발휘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듯 움직였다. 이 일대에 상황을 다 볼 수 있는 곳, 그러면서도 피격 범위를 벗어나는 곳. 나라면 어디에서 상황을 보겠는가.’
최소 셋.
조력자의 숫자를 짐작하고 명령한 칼이 움직였다.
경비대장은 곧 짧은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셋이 하나이니 하나라는 거다.
‘영리하게 미친 게 둘이네.’
경비대장은 생각했고 영리하든, 미쳤든, 그건 이제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이곳, 머니 & 세이브의 사설 경비대에는 프로메테우스의 정예가 둘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테러 단체였고, 현 사회에서 테러 단체는 무력 집단을 말한다.
특수종이라는 개인의 무력이 전체의 무력을 대변하는 시대이니.
당연히 개인의 무력이 뛰어난 이들도 있었고, 일당백 이상의 실력을 갖추기도 했다.
그 둘이 움직였다. 아니, 진즉부터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제는 결과가 눈앞에 보였다.
하나는 눈앞의 호랑이 새끼한테.
다른 하나는 조력자의 위치를 찾아서다.
그러므로 일은 끝났다.
경비대장은 그리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