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62화 (62/488)

62. 형

“지원은 없다.”

“네?”

아임 백 유어 파든?

잘 못 들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내 일.”

사장이 손가락으로 승인된 보고서를 가리켰다.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비공식 작전 승인 보고서가 눈에 들었다.

시력은 정상이다.

그럼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아니다. 사장님의 입이 문제다.

“저 2급 사원입니다.”

“초고속 진급했지. 축하한다.”

“외부 보안 3팀은 현재 일을 못 합니다.”

“그거 때문에 자네가 여기 있는 거고.”

“돈이 있어야 도박판에 앉을 수 있는 법 아닐까요?”

지원 없이 이 일을 혼자 처리하라고 하는 건, 돈 없이 도박판에 앉으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자리에 앉는 순간, 쫓겨나거나, 뒈지게 맞거나.

둘 중 하나겠지.

사장님, 애초에 성공할 가능성 따위는 전혀 안 보신 거라면…….

뭐라고 변명과 핑계라도 댈 참에 그보다 빨리 사장이 말했다.

“기회를 달라며. 그럼 이제는 쇼 미 유어 캐파시리.”

영어 발음 찰지다. 어릴 때부터 조기 유학을 다녀오셨나.

“기회를 활용하는 건 네 몫이다.”

말과 함께 눈짓을 보낸다. 이제 나가보라는 눈짓임을 알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이 일을 어떻게 혼자 해.

애초에 지점 두 군데 털 때도 팀으로 움직였고, 이런저런 지원도 받으면서 한 건데.

이 빌어먹을 사장 놈이.

따지고 싶다. 무척이나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사장의 눈을 보는 순간, 그럴 생각이 싹 사라졌다.

이미 끝난 일, 자기 손을 떠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일.

사장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불멸자의 감각이 그 눈을 읽고 감정을 읽고 의도를 알아챘다.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사장은 지원하지 않는다.

그런 위험부담 따위는 갖지 않는다.

본부장이 오리발을 내민 것과 지금 사장의 태도가 다를 게 뭔가.

다르지, 다르긴 하지.

적어도 사장 놈은 기회라도 줬다.

발 빼고 물러난 새끼랑은 비교하지 말자.

결론은 이거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

말재주로 사람을 농락하는 것도 설득하는 것도, 꽤 자신 있는 편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토론 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고.

하지만 지금 사장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럼, 여기서 내가 할 행동과 말도 하나뿐이다.

없는 자신감이라도 보여 줘야 한다는 거.

“보여 드리죠. 제 능력.”

시작한 일이다. 어떻게든 끝마친다. 반드시 성공한다.

마음을 다잡았다.

“굿 럭.”

등을 돌리니 사장이 말했다.

역시 발음이 좋다.

난 몸을 돌렸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틀 뒤, 내부 재판.

남은 시간은 이제 40시간가량이었다.

* * *

“짓궂으시군요.”

“뭐가?”

남명진 사장은 비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못 할 거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사장은 자단목 테이블 위에 발을 올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거 안 좋은 버릇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상대를 얕보는 거.”

비서는 표정 변화 없이 되물었다.

“제가 말입니까?”

“유광익은 성공해.”

“능력 평가에서 규격 외 등급, 이제까지 보인 작전 수행 능력도 A급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유광익은 아직 벽을 못 넘었으니까요. 머니 & 세이브의 경비대는 아무리 뛰어난 사원이라도 혼자 해결할 수 없습니다.”

확신은 어떤 과정에서 비롯되는가.

그건 정보와 경험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비서의 말은 타당했다.

“애초에 내가 그 친구를 뽑은 이유가 뭘까?”

사장이 물었다.

비서는 생각했다.

사장이 유광익을 눈여겨봤을 때, 그 친구의 신체 능력을 알 순 없었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신체 능력이라는 건 몰랐다.

또한, 그 친구의 작전 수행 능력도 알 수 없었다.

비서는 깨달았다.

지금 자기가 말한 내용은 전부 유광익이 회사에 입사한 뒤 알려진 것이다.

오리엔테이션 당시 유광익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건 알 수 없었다.

비서는 농담을 싫어했다.

그래서 가능성 있는 가설을 세우고 물었다.

“혹시 숨겨진 아들입니까?”

“……농담이라고 듣고 싶은데, 매사에 진지하니, 아니다.”

미리 유광익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는 게 아니라는 거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사장이 몰랐을 리 없다.

숨겨진 아들이라는 표현에 혹 미리 유광익을 알고 있었냐는 질문도 포함이었다.

가장 짧게 농축해서 물은 효율적인 질문이었을 뿐이다.

“왜 성공을 확신하십니까?”

“그 친구, 친한 척을 잘해. 몇 번 더 말하면 나도 모르게 도와줄 뻔했잖아.”

“그건 거짓말이군요.”

사장이 미소와 함께 말했다.

“맞아, 도와줄 생각은 없었지.”

도와줄 수도 없다.

작전 승인이야 이런저런 핑계가 가능하지만, 직접 나서면 얘기가 달라지니까.

“친근함을 표시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비서가 물었다.

“달라지지.”

사장이 답했다.

* * *

건물 밖에 나와서 오후의 햇살을 바라봤다.

이대로 땡땡이친 다음 집에 가서 게임기나 붙잡고, 넋 놓고 놀다가 자고 싶다.

그럼 세상 행복할 텐데.

골치 아픈 일에 해방되고 싶은 욕구는 게으르고 비도덕적이고 책임감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건 본능이다.

물론 난 그럴 수 없었다. 본능이 아니라 이성으로 움직일 때였다.

지원이 없다.

그럼 혼자서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는가?

땡, 불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장은 돕지 않는다.

본래라면 내 팀의 도움을 바라면 되지만, 그 팀은 발이 묶였다.

발만 묶였으면 다행이다. 아예 얼굴도 볼 수 없었다.

하, 정기남 같은 새끼라도 옆에 있길 바랄 순간이 올 줄이야.

탁.

오른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번쩍하고 뭔가 머리를 스쳤다.

내 팀이 묶였다.

그렇다고 화림 전부가 일을 못 하는 건 아니잖아.

공항에서 테러리스트 끄나풀 잡을 때도 강희모 대리와 함께 일을 했다.

그건 뭐 외부 보안 3팀이랑 일한 건가.

‘설득하면.’

다른 팀의 사람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누구를? 아무나 끌어들일 순 없다. 입이 무겁고 지금 필요하며 긴 시간 설득이 필요치 않은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인적 자원이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결심했다.

회사에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내 주변에는 효율적인 일이라면 군말 없이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

거기에 나한테 빚도 있고.

틱. 타다다닥.

사내 메신저를 켜서 타이핑을 두드렸다.

[유광익] 3급 사원 우미호 양, 2급 사원 유광익이 부릅니다

읽었다는 표시가 떴는데 답이 없다.

[유광익] 반항인가?

답이 없다.

[유광익] 이전에 빚진 거 있다고 한 거 기억하지?

[우미호] ?

이 새끼 혹시 우리 팀장 딸 아닌가.

반응 봐라. 아주 빼다 박았네.

우미호는 나에게 빚을 졌다.

오리엔테이션 때 숙면을 도왔고.

공항 사건 때도 내 덕을 봤다.

평소 우미호의 성격을 생각해 봤을 때, 공항 일도 분명 빚이다.

이전에 사장에게 찍혔다는 말을 해 주긴 했지만, 그 한마디로 빚을 갚았다고 할 수는 없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건 속담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미호] 무슨 일?

그제야 제대로 된 답장이 왔다.

[유광익] 옥상으로 따라와, 얘기 좀 하자

[우미호] 갔는데 방귀태가 있다면 둘 다 성희롱으로 고소하겠어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 농담처럼 들리기나 하지.

성희롱으로 고소하겠다고 하니 진심임이 분명했다.

[유광익] 그럴 일 없어

귀태 형은 외근 중이다.

나중에 나와 미호가 옥상에서 밀담을 나눴다는 걸 알면, 날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자리에서 일어나 옥상으로 향했다.

가끔 머리 식히러 올라오는 사람이 있지만, 옥상은 어지간하면 잘 안 온다.

이중봉 팀장과 우리 팀은 애용하지만, 다른 팀은 다들 안락한 흡연실과 휴게실을 썼다.

덕분에 사람은 없었다.

5분도 되지 않아 우미호가 올라왔다.

“바빠.”

용건만 간단히 말하란다.

“빚 갚아라.”

“돈이라도 달라는 거야?”

“아니, 몸으로.”

꿈틀.

우미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 새끼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욕하니까 더 찰지게 들리네.

“그런 의미는 아니고. 나 좀 도와 달라고.”

내가 이런 상황에도 위트를 잃지 않는 건 어머니의 영향일까, 내 천성일까.

하여간 더 장난치다가는 우미호가 내 부탁을 들어주기는커녕 말도 안 듣고 돌아서 내려갈 것 같았다.

난 짧고 굵게 상황을 설명해야 했고, 내가 할 일을 알려 줘야 했다.

“머니 & 세이브 지점, 내가 했어. 본점도 털어야 하는데 같이 하자.”

휭.

바람이 불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우리 둘 사이를 비췄다.

짧은 침묵이 옥상 안을 채웠다.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던 우미호가 입을 열었다.

“미친 새끼가.”

아까는 찰졌는데, 이번에는 진심이 살짝 빠졌다.

말과 함께 머리를 굴리는 중으로 보였다.

빚을 졌다고 해도 내가 아무와 일을 하진 않는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난 우미호란 사람을 봤다.

전투 능력이야 논외로 치더라도, 이 자식 머리가 기가 막히게 돌아간다.

짧은 상황만 보고 앞뒤 상황을 유추하고 추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괜히 셜록 홈스란 별명을 붙인 게 아니다.

이는 곧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과 같았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

난 이 일을 해야만 하므로 어지간한 희생이 있더라도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고로 나에게 필요한 건, 목적 지향적 머리다.

“할래?”

“빚 갚는 것 치고는 과해.”

계산기를 돌린 거였냐.

“미승인 작전은 곧 범죄고.”

우미호가 말을 이었다.

불멸특수대는 준법과 위법을 넘나들 수 있다.

작전 승인서가 있다면 말이다.

난 사장 비서에게 복사를 부탁한 작전 승인서 사본을 꺼냈다.

덕분에 일이 틀어지면 공문서위조라는 죄목까지 붙을지도 모른다.

사장이 오리발 내밀면 끝이니까.

하지만 현재까지는 이 보고서는 사실이다.

“사장님 직속 비공식 작전 승인.”

자, 빚도 갚고 사장에게 좋은 인상도 남길 기회다.

목적 지향적이며 자신의 성공을 위해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우미호 양, 어찌할 텐가.

“인?”

내가 물었다.

우미호는 눈을 세 번 깜빡이고 답했다.

“인. 대신 업무 끝나고.”

“오케이.”

그건 인정이다. 이 일을 동네방네 소문낼 순 없으니까.

무엇보다 방금 보여 주지 않았나.

이 명령서는 비공식 작전 승인서라고.

그 말은 곧 기밀이란 거다.

“지휘는?”

우미호가 물었다.

외부 보안 3팀은 다 묶였다. 그럼 책임자로 다른 팀원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왜 했는지는 알겠다만.

“나.”

옥상 문으로 향하던 우미호가 몸을 멈추고 고개만 돌렸다.

날 바라보고 다시 눈을 세 번 깜빡인다.

“내가 기안자고 승인받았으니까, 내가 책임자라고.”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또 해 줬다.

그 말에 난 처음으로 셜록 홈스 개나리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카지노에서 막 전 재산을 꼬라박은 사람의 표정이 딱 저럴 것이다.

후회막심, 후회막급.

“야, 그건 얼굴로 하는 욕이야.”

“알아들었으면 됐어.”

그 말을 끝으로 우미호가 내려갔다.

다행히 무르자고는 안 하네.

일단 사람 하나는 구했고.

다음은 어디냐.

외근 신청은 하지 않았지만, 밖에서 할 일이 많았다.

신청서 따위 작성할 시간도 아깝다.

난 회사 밖으로 나섰다.

내가 향한 곳은 청량리였다.

정확히는 내가 과외를 받은 곳이다.

이제는 은퇴했고, 정보원으로 입에 풀칠하며 사는 범죄자가 있는 곳이었다.

“또 봅니다.”

“……지점 두 개가 끝이라며? 근데 왜 또 와?”

오십 줄에 들어선 배 통통한, 나이 먹고 몸매 관리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는 전형적인 아재다.

“나랑 일 하나 합시다.”

내부에서 사람을 구했다면 외부에서도 사람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이런 일에 전문가를.

내 말에 전문가 범죄자가 눈을 깜빡이더니 읊조렸다.

“멍?”

이 작자가.

나 불멸자라고 작게 중얼거린다고 안 들리겠냐.

“개소리 아니고.”

내가 말하자.

“그럼 뭔 소리야?”

또 설명이군. 어쩌겠나,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없어도 어벤져스를 만들어야 얘기가 시작되는 것을.

“거, 좀 같이 일 하나 합시다. 섭섭하게는 안 할게.”

간단하게 설명한 뒤, 말을 덧붙였다.

“여기서 내가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

“살인멸구.”

농담 삼아 말했더니.

“빌어먹을, 이래서 내가 정부 새끼들이랑은 일을 안 하지.”

자타공인 불멸특수대 정보원의 말씀이시다.

외부에서 보면 불멸특수대는 정부 사람이고 그만한 권력을 지닌 이들이다.

살인멸구라는 농담이 진담이 되게 할 수 있다는 거다.

억지로 일을 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럼 제대로 일을 하리란 보장이 없잖아.

“형, 좀 도와줘요.”

과외하면서 적당히 안면은 텄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 동생은 아니니.

“형?”

“저보다 동생이에요?”

“그건 아니지.”

황당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그에게 난 적절한 보상을 줄 필요가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정보원으로서 삶이 윤택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낡은 운동화와 색이 바랜 청바지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거기 털면서 챙길 만큼 챙겨 드릴게요. 최소 한 장. 그러니까 제대로 합시다.

한 장이면 천만 원이다.

졸지에 잘 생기고 멋진 불멸특수대 동생이 생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시다. 까짓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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