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49화 (49/488)

49. 세계 평화를 위하여

그렇게 사흘.

올 시간이 됐는데 본대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기다리는 일 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좁은 굴 안이었고 꼭 붙어 지내다 보니 우리 얼음 공주와 없던 정도 생길 판이다.

블랙홀 이후에 꽤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최근에 사옥에 들어간 뒤로는 내 훈련을 봐주기도 했다.

여러모로 고마운 선배다.

그런데 난 김정아란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이 시간이 사실은 우리 둘이 서로를 알아가는 기회가 아닐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다면 일단 그 사람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기다림이 무료하니 시간이나 때울 겸, 선배에 대해 알아갈 겸 물었다.

"선배는 이 일 왜 해요?"

사람은 응당 바라는 게 있는 법이다.

화림에서 시작한 직장 생활은 벌써 3개월이 훌쩍 넘었다.

새해가 밝았고, 난 스물하나가 됐다.

그동안 사내의 사람을 살펴본바.

사람들은 다 목적이 있었다.

자신의 싹수가 노랗다는 걸 알리기 위해 회사에 다니는 정기남부터.

"돈, 진급, 폴쉐."

황금만능주의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합당한 방식이라는 요한도 있으며.

"내 사랑을 위하여."

로맨티스트지만, 짝사랑이기에 더없이 슬픈 남자 귀태도 있고.

팀장은 싸우다가 사명감이라는 말을 내 귀에 외친 적이 있다.

좋게 말해도 될 걸, 꼭 때리면서 말한다.

시발 팀장은 폭력 제일주의가 분명하다. 사실은 사명감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사람을 패고 싶은 게 아닐까.

킹리적갓심이다.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사수가 빤히 날 바라봤다.

"넌?"

그리고 되레 물었다.

질문을 질문으로 받다니, 그건 예의가 아닌데요.

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숨길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숨길 생각도 없었고.

난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설명하려다가 그게 꽤 긴 내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사수의 화법을 빌려 말했다.

그러니까 짧고 간단명료하게.

"세계 평화요."

사수도 자신의 화법 그대로 답해 줬다.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에는 답으로.

"복수."

세계 평화와 복수.

더럽게 안 어울리는 것 같지만.

지금은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있다.

초능 특수종이 설립한 사이오닉 협회가 발견하고 채취한, 축능석이라는 신소재를 탈취하려는 그런 목적 말이다.

생각해 보니, 이거 반쯤은 도둑질 아닌가.

잡생각을 하며 굴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

화림에서 제공하는 우의는 특유의 소재 덕분에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고 부드러웠다.

건조해서 입술이 쩍쩍 갈라지지만, 축축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려고 눈을 감다가 먹먹한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입을 열었다.

"실전, 싸움, 훈련. 그런 게 필요했어요."

그래서 본래 꿈은 군인이었다.

군인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민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직업이다.

그걸 위해 교육과 훈련을 받는 거고.

높은 봉급, 다양한 기회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결국 내가 화림을 택한 이유는 하나다.

이곳에서는 내 몸에 맞는 양질의 훈련을 할 수 있으니까.

꼭 내 몸에 맞는 훈련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불멸의 피를 제대로 쓸 수 있는 훈련이다.

"체력 보존도 일이다."

얼음 사수가 말했다. 차갑지만, 따뜻한 배려의 한마디다.

고작 3개월이라고 할 수 있지만, 눈 감는 시간을 제외하면 종일 붙어 있는 사람이다.

이제는 미묘하게 다른 말투에서 사수의 감정이 보이곤 했다.

시발 팀장이었다면 ‘닥치고 잠이나 쳐 자.’라고 했을 텐데, 좋게 돌려 말해서 체력 보존도 일이라고 해 주지 않나.

난 얌전히 눈을 감았다.

* * *

본대가 오지 않아 불안했는지.

그게 아니라면 사수와 나눈 대화가 원인이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계에서 며칠 지낸 게 이유일지.

"아, 시발 또 이 꿈이네."

꿈속에서 내가 말했다.

휴즈 게이트, 대형 블랙홀이 열린 사건이다.

어릴 때의 난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어쩌다가 이곳에 있는지는 기억에 없다.

갑자기 터진 블랙홀의 징조에 사이렌이 미친 듯이 울렸고.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내 앞을 지킨 등도 보였다.

"괜찮아."

등을 보이는 사람 너머로 휴즈 게이트가 인류의 공포가 된 이유가 보였다.

모든 인베이더는 넘버로 그 특정을 규정한다. 눈먼 개로 시작해서 슬라임, 오크, 도플갱어 등.

수없이 많은 인베이더가 있었다.

그놈들은 흔히 말하길 넘버링이라 했다.

몰개성한 인베이더 무리를 칭하는 용어였다.

인간 중에서도 특출난 재능의 천재가 있는데 인베이더라고 그런 놈들이 없을까.

있었다.

넘버링 중에서 특질을 이어받아 새로운 개체로 진화한 괴물.

그런 이들은 규격 외 인베이더라 해서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네임드다.

미친 사이비 종교 집단 중에는 그 네임드를 신처럼 떠받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 네임드.

"오랜만이네?"

정겹게 인사를 건네 봤다.

꿈속의 괴물이 인사를 받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반복.

찢겨 죽는다. 터져 죽는다. 부서져 죽는다.

인간의 목숨은 파리보다 못했다. 으깨진 두개골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시체.

아이가 죽었고 엄마가 죽었다.

아비가 죽었고 친구가 죽었다.

가족이 죽고 친인이 죽었다.

다 죽었다.

장면이 바뀌고 아버지가 나타났다.

"군인보다는 그에 어울리는 곳으로 가야지."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저 불멸특수대로 날 보냈을 뿐이지. 그냥 저런 말을 들은 기분이다.

"네네, 군인은 제가 일반인이었을 때 꿈이었죠."

그래도 UDT나 특수부대를 염두에 둔 건 꽤 대단한 거 아닌가요?

"시험 봐라."

아버지가 말하고.

"변신족의 육체는 부러지지 않아. 그러니까 좀 맞아도 돼."

어머니가 말한다.

그렇다고 아들을 두들겨 패서 키우는 건 뭔가 육성 방식이 다른 집안과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어머니?

실제로 이렇게 말하면 차이가 다름을 만든다며 대련 시작일 것이다.

그 다름을 내가 바란 거니, 할 말도 없고.

아버지 어머니가 사라지고.

아파트 옆 동 사는 혜민이가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개꿈이 분명했다.

"나랑 결혼해. 애는 셋 정도면 충분하지?"

아니, 넌 내 이상형이랑 거리가 멀다니까.

"그럼 나랑?"

우미호가 튀어나왔다.

염병, 결혼하고 나흘 만에 울화통 터져 죽을 일 있냐?

"그럼 나랑?"

선배다. 얼굴이 적당히 붉게 물든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는 여자는 다 나올 셈인가.

미안하지만, 선배랑 결혼하면 그 삭막함에 제 긍정적이고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혼이 얼진 않을까 합니다.

물론 내 크고 아름다운 혼은 선배의 얼음을 녹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안 돼요. 전 이상형이 있습니다."

꿈에서 말한 것치고는 내 입술이 직접 움직인 기분이었다.

꿈과 현실의 중간쯤, 난 눈을 떴다.

싸늘한 감각이 목 언저리를 스쳤다.

"일어나."

사수의 얼굴이 보였다. 꿈에서와는 정반대의 삭막한 표정이다.

"확인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난 내가 왜 잠에서 깼는지 알았다.

불멸의 예민함은 살아 있는 경보 시스템이나 다름없었다.

보통은 순혈 중에서도 적통의 피를 잇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예민함이지만, 난 정기남을 보고 그걸 쓰는 법을 알았다.

어떻게 이게 되는지 알 게 뭐냐, 그냥 되니까 쓴다.

이계에 사수와 단둘이 있으니, 난 깨어 있을 때나 잘 때나 항상 그 육감을 예민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사수는 예민함 대신 분위기를 감지한 것 같았다.

이런 경험이 출중한 사람의 감이랄까.

물론 그게 불멸자의 감만큼 정확하진 않을 테니, 날 깨운 걸 테고.

난 이미지를 연상했다.

넓게 퍼진 거미줄을 떠올리고 날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트렸다.

자, 이건 뭐냐.

"둘이요."

감각의 예민함이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챘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와 육감의 경고를 종합해서 결론을 낸다.

인베이더가 아니라 사람이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사수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허리춤에서 토카레프를 꺼냈다.

애용하는 총이다.

난 우리 팀 전용 수신호를 보냈다.

소리 내면 안 된다는 표시다.

사수는 장전하려던 손을 멈췄다.

작은 소음도 상대에게는 미리 알려 주는 경보가 될 것이다.

상대가 불멸이라면 조심해야 했다.

기척을 죽일까?

아니지, 사수는 그럴 수 없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팀장은 상황 대부분을 예상했고, 그에 맞춰 움직임과 동선을 짰다.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는 이유는 둘.

본대가 돌아오는 곳이고.

주요 저격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대가 아니라 다른 놈들이 먼저 온다?

우리의 존재를 알아채고?

아니지,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러면 여기에 오는 이유는 뻔했다. 놈들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거다.

인베이더를 기다리는 미친놈들이 아니라면 나와 같은 목적이겠지.

본대를 기다리는 거다.

팀장은 몇 가지 상황을 예상했다.

그거에 팬더 대리는 그 이유를 설명했고.

사이오닉 애들은 너무 늦게 지원 요청을 했다.

불멸특수대는 욕심에 나섰지만,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다.

습격은 불가피하다.

하긴. 그러니까 사이오닉 협회도 손해를 감수하고 불특대를 부른 거겠지만.

소란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래서 필요한 게 뭐다?"

팀장은 이렇게 말하며 변수를 말했다.

사수와 나의 존재 말이다.

그런데 상대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러니까 본대를 습격하려는 놈들도 같은 짓을 하는 거다.

미리 포인트를 잡고 대기하려는 거지.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상황이 몇 장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머리를 스쳤다.

전투가 발생할 것이다. 난 모든 상황을 인식했고 인지했으며 내가 해야 할 일도 알았다.

그림자에 숨으며 사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전투 준비.

밖에서 굴 입구 바로 옆 선 내 모습이 보이진 않으리라.

상대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누가 있다."

말소리가 들리고.

철컥.

사수가 토카레프의 슬라이드 멈치를 당겼다.

찰칵.

작은 소음이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예상할 수 없는 장소, 예상할 수 없는 만남.

상대는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을 보였다.

"천천히 무기 버리고 나와."

한 놈이 굴 안으로 총구를 들이밀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뒤에서 경계했다.

손에 든 건 자동 소총.

얼굴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건 불멸은 아니라는 것.

사수는 순순히 총구를 밑으로 내렸다.

그래도 아직 무기를 버리진 않았다.

"무기 버리라고 했다."

상대가 말했다.

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다.

그동안 실전에서 손발을 많이 맞춰 보진 않았어도 훈련과 단련을 병행한 사이 아닌가.

이심전심이다. 사수는 내 마음을 읽었다.

"누구?"

사수가 무기를 버리지 않고 묻자.

"세 번 같은 말 안 한다."

상대가 답했다.

사수가 토가레프를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는 사이 뒤에 있는 놈이 굴 안을 샅샅이 훑었다.

눈치 있는 놈이라면.

"어디서 나왔냐?"

마크와 휘장이 없더라고 특유의 우의와 가진 장비, 입은 복장을 토대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훈련받은 상대라는 걸 말이다.

"혼자냐?"

앞에서 총구를 든 놈이 묻는 순간, 난 움직였다.

불멸 비전 기척 죽이기가 내 존재감을 숨긴다.

그와 동시에 사수는 금방이라도 덤빌 것처럼 움찔 자세를 바꿨다.

"움직이지 마!"

선두에 있는 놈이 외치고 방아쇠에 손을 올린 순간, 뒤에 있는 놈도 긴장하며 사수의 움직임에 집중했고.

난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단숨에 내달려 정면에 선 놈의 발을 뒤에서 걷어찼다.

"엇!"

놀란 놈이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두!

총구에서 뿜어진 탄환은 그대로 굴 위로 긴 선을 그렸다.

난 균형을 잃은 놈의 멱살을 쥐고 던졌다.

무장과 성인 남성의 무게감이 오른손에 실렸다.

훙 하고 놈의 몸이 날아가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놈이 반사적으로 그 몸을 받아 냈다.

그거로 끝이었다.

둘 앞으로 뛰어나가 왼손으로 보위 나이프를 꺼내 뒷놈의 목에 대고, 오른손으로는 권총을 꺼내 앞 놈의 머리통에 겨눴다.

이 새끼들 헬멧도 안 썼네.

"동작 그만."

내가 말했다.

건조한 먼지 바람 사이로 둘은 눈만 깜빡였다.

순식간에 끝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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