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오해의 밤
어떨까, 다들 정기남의 승리를 점칠까. 그럴지도 모르지.
기척 속이기, 집중된 감각이 개나리의 인기척을 잡아챘다.
요놈 거기 있구나.
허리 반 바퀴를 트는 거로 기남의 주먹을 피한 뒤, 놈의 왼팔을 잡으며 왼발을 앞으로 디뎠다.
스텝 한 번으로 난 기남의 왼쪽에 섰다.
받아라, 개미 펀치.
뻑!
일단 한 방.
"음."
기남이 주둥이를 맞고 두 걸음 주춤하며 물러섰다.
세상에는 처맞는 순간에도 잘생긴 놈이 있었다.
이 새끼가 그랬다.
다가가서 왼발을 가랑이에 넣어 감으며 개나리의 오른발을 걸었다.
반응한 개나리가 발을 들어 피하려 했다. 난 감으려던 발을 반대 방향, 그러니까 바깥쪽으로 걷어찼다.
"이크!"
힘을 쓰며 기합을 내지르니.
쩍.
"끅."
기남의 두 번째 신음이 들렸다.
택견 발차기다. 방금 개발했다.
종아리를 호되게 두들겨 맞은 친구가 뒤로 물러섰다.
어디 가, 친구야.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기남이 팔꿈치를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면도칼 같은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고개를 꺾어서 피하고 클린치하듯 안았다.
"꺼져!"
기남이 무릎을 치켜세우며 날 밀었다.
이 새끼가 지금 어딜 노려.
고간 무릎 치기가 날 노렸다.
난 놈이 치켜세우는 쪽 무릎의 발등을 오른발로 누르고.
놈이 밀어내는 힘을 받아 뒤로 휘청이며 똑같은 궤적으로 팔꿈치를 올려 쳤다.
쩡!
경쾌한 소리가 터졌다.
팔꿈치에 기남의 턱이 걸렸다.
젖혀진 고개 덕분에 턱과 밑으로 이어진 울대가 보였다.
이 새끼는 목울대도 잘생겼다.
너 딱 며칠만 못난이가 되어라.
올려 친 김에 한 방 더.
개미 펀치 나가신다.
허리에 힘을 주고 중심을 잡은 뒤, 왼 주먹을 뻗었다.
주먹이 놈의 턱을 후리고 하늘로 솟았다.
꽝!
턱뼈가 쪼개졌을 것이다. 동시에 앞니 세 개가 깨져서 허공에 흩날렸다.
흩날려라, 이빨 벚꽃.
불멸자이니 평생 앞니가 없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한 일주일은 갈 것이다.
앞니 없는 정기남 대령이요.
"앗, 럭키 펀치가."
때려눕힌 다음 말하니.
"허."
감독관이 혀를 찼다.
불멸자가 모이면 조용하다. 그걸 감안해도 싸늘하고 차가운 침묵이 훈련장에 감돌았다.
이거 참 머쓱하네.
슬금슬금 내 자리로 돌아가자.
침묵의 한쪽을 담당하던 감독관이 늘어뜨렸던 태블릿 PC를 들었다.
평가지에 터치하고 몇 글자, 아니 꽤 긴 문장을 쓴다.
내 대련 평가겠지.
톡톡 하는 터치 소리를 제외하고는, 개미 한 마리 기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가자.
"넌 럭키 펀치가 콤비네이션으로 들어가냐?"
어느새 뒤에 선 요한이 말했다. 그 옆에 선 귀태도 보였다.
"우연이야, 우연, 나 같이 힘없고 능력 없는 혼혈이 어찌 감히 저리 훌륭한 순혈 오브 더 순혈 정기남을 때려눕히겠어?"
"비꼬는 거로는 세계 최강이다."
요한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뭘, 이런 칭찬을.
그런 내 어깨를 귀태가 잡았다.
"설마, 아니지? 그건 아니다."
귀태와 요한은 가장 친한 동기였다.
이 둘은 내가 다음 대련에 누굴 선택했을지 알았다.
"두 번째는 누구 했냐."
귀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면서."
침착하게 답하니.
"감독관님."
귀태가 몸을 돌려 손을 들었다.
감독관이 태블릿 PC를 보다가 고개만 들어 귀태를 봤다.
"지금 당장 유광익과 싸우겠습니다."
"……음?"
감독관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대련 후 침묵이 흐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격이 아무리 더러워도 그동안 정기남을 아무도 무시하지 못했다.
왜? 실력이 좋으니까.
육체 피지컬 따위야 진즉에 내가 따라잡았지만.
그에게는 감각 피지컬이 있었다.
순혈이기에 가진 그 놀라운 재능.
그랬기에, 그는 나한테 이렇게 쓰러지면 안 됐다.
적어도 호각, 그게 아니라도 이리 쉽게 쓰러져선 안 되는데.
앞니가 후두둑 털려서 기절한 채, 널브러져 있다.
근데 저거 누가 좀 치워야 하지 않나.
앞니 사이로 피가 질질 새며 쓰러진 모습을 보니, 아무리 잘생긴 새끼도 치아빨은 무시 못 하는 법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귀태가 나와 싸우겠다고 나선 거다.
"널 눕히고 내 사랑을 지키겠다."
"짝사랑이지."
내가 그의 말을 정정해 줬다.
"닥쳐."
귀태가 진심을 보였다. 척척 걸어 나가더니 기남을 한쪽으로 밀어낸다.
"허락하신 거로 알겠습니다."
당당히 말하는 그를 보며 감독관이 물었다.
"괜찮겠냐?"
"물론입니다."
난 그의 진심을 외면할 수 없었다.
"죽이진 마라. 앞니도 털지 말고."
의리 있는 요한이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섰다.
사랑에 눈먼 죄인이여, 그대 이름은 귀태라.
"각……."
뭐라고 하려고 했을까. 모르겠다.
난 달렸고, 그대로 명치에 주먹 한 방, 몸을 기역 자로 꺾은 귀태의 목을 겨드랑이에 넣고 옥죄면서 경동맥을 압박했다.
딱 11초 걸린 기절이다.
바둥거리는 몸뚱이를 옆으로 치웠다.
"이런 럭키 헤드락이."
말하고 감독관과 눈을 마주했다.
"우미호랑 싸우고 싶습니다."
난 오늘 그 아이의 앞니까지 털어야 시원할 것 같습니다.
진심을 반만 담아 바라봤다.
"그래."
감독관이 답했다.
* * *
"신났네?"
팀장이 말했다.
"질문이신가요?"
되묻자.
"네가 치과의사야? 동기 이빨을 털게?"
"전 3급 사원 유광익입니다."
이제 수습 딱지는 뗐다.
열중쉬어 자세로 공손하게 말했는데도.
"네 앞니도 털어 버릴까?"
팀장은 짜증을 냈다.
이 팀장 새끼는 하루에 네 번 짜증을 내고, 여덟 번 욕을 지껄이며, 여섯 번 지랄했다.
그러므로 이건 덤덤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닙니다."
"그래, 신났으면 됐지. 우리 기남이 앞니 털고, 우리 미호 어금니 쪼개고."
귀태는 기절했는데 귀태 형만 쏙 빠졌다.
그건 팀장의 수비 범위 밖이었나 보다.
3급 사원, 최고점.
회사는 사옥 선택권과 성과급 지급을 약속했으며.
점수에 따라 내 평가가 변했다.
전부 A클래스로 올린 거다.
내부적으로 뭐라고 말이 좀 있긴 한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말단사원이 알 바가 아니었다.
거기에 팀장의 평가도 조금 변했다.
<술 잘 마시는 또라이>
이걸 사원 평가서에 적는 니가 더 또라이.
속으로 답해 주고 오늘의 할 일을 정리하다 보니 하루가 금세 갔다.
보고서와 3급 사원으로서 새로운 보안계약서에 동의.
사내 인트라넷에 3급 사원부터 쓸 수 있는 등급 적용.
진급은 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
월급이 늘었고, 사옥은 당장 다음 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반쯤 고민했다.
집에서 다녀도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니까.
그래도 ‘독립’이라는 두 글자가 날 유혹했다.
룸메이트가 생긴다고는 했다,
1인 1실은 1급 사원부터다.
요한이나 귀태는 안 되려나.
사옥은 성적순이다. 그럼 귀태는 안 될지도 모르겠다.
뭐, 집이 그렇게 멀지 않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요한도 괜찮고, 푸름이도 괜찮고.
잡생각과 보안 프로토콜을 다시 잡는 사이에 하루가 끝났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
난 내 양 주먹을 번갈아 쓰다듬었다.
오늘 수고했다. 보잘것없는 개미 펀치로 그 무서운 순혈 불멸과 오리엔테이션 평가 때 탑을 찍은 혼혈을 때려눕혔으니.
하는 김에 팔을 교차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두드렸다.
수고했다. 유광익.
잘했어.
"반푼이가 미쳤다."
그걸 본 팀장이 한마디 말을 남기고 퇴근했다
뭐라 답할 새도 없었다.
저 양반 싸움만 못 하면 진짜 두들겨 팰 텐데.
드르륵.
"광익아, 이거 어떠냐?"
퇴근 시간인데도 팬더 대리는 나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가 의자를 뒤로 끌고 와 나한테 물었다.
왼손에 찬 번쩍번쩍한 시계가 보였다.
"오, 비싼 시계."
롤렉스다.
"선물 받았다."
팬더 대리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시계를 선물로?
딱 봐도 몇백만 원은 훌쩍 넘을 건데.
"비싸 보이는데요."
"천칠백."
누가 그런 선물을 준단 말인가.
어지간한 국산 중고찻값이다.
그런데 우리 대리님, 금액까지 다 알고 계시네.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
재벌 여자친구라도 생긴 건가. 드디어 팬더 대리에게도 봄이 오는가.
안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코앞이었다.
"나."
"네?"
"내가 나한테 준 선물이야. 연말이잖아."
……곱게 미쳐서 다행이다.
적어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진 않잖아.
"회사원 월급에 좀 과한 거 아닙니까?"
"적금 부었어."
팬더 대리가 어디 강남 건물주라면 그 선물이 참 적절할 수 있지만.
그래, 세상사 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거 아닌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집에 갈 시간이었다.
사수와 눈인사를 하고 회사 건물에서 빠져나가 지하철역까지 걷는 중이었다.
부으응.
대로 옆으로 검정 세단, 그것도 외제 차가 한 대 섰다.
지이잉.
뒷문 창 유리가 내려가며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서 뒤로 넘긴 남자의 옆얼굴이 보였다.
"집에 가는 길이면 타지."
……응? 나 헌팅 당하는 건가.
그것도 남자한테?
얼굴을 보니 불멸이고, 생긴 걸 보니 순혈이다.
다만, 쌍꺼풀이 두껍고 콧대가 높아서 잘 생기긴 했는데 기름기가 가득 묻어나는 외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좌우로 둘러봤다. 딱히 이 작자가 말을 걸 사람은 안 보였다.
"유광익 사원 아닌가?"
"맞는데요."
"나 화림 김동철 이사다."
근데 왜 날.
이거 뭐냐.
같은 회사 사람이었다. 납치나 감금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는 어디까지나 내 의지로 차 문을 열고 타라고 말했다.
문을 열고 탔다.
나란히 앉자.
"담배?"
딸깍.
연초를 모아 둔 케이스를 내미는 그를 보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안 피웁니다."
그가 오른쪽 창문을 내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퐁, 칙.
김동철 이사가 지포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머금고 뿜은 뒤, 말을 이었다.
"내가 일 하나 추진하는 게 있는데."
"네."
"거기에 자리 하나가 비어."
……네?
당황스럽다. 이거 뭐라고 답해야 하나.
"난 그 자리에 우리 유광익 사원이 있었으면 하는데."
무슨 일인지 설명도 안 해 주고?
"아, 네."
부우웅.
차가 도로 위를 달린다. 적당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 음. 제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지금처럼 일하되, 내가 프로젝트 시작하면 자원하면 돼."
"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알고. 고기 좋아하나?"
세상에 고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전 비건이 아닙니다.
"이거 가져가고. 어제 꽤 인상적이었기에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끼이익.
어느새 우리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며 이사님이 준 박스를 손에 쥐었다.
묵직했다.
"회사에서 보지."
지이이잉.
허리를 꺾어 제대로 인사하기도 전에 김동철 이사가 떠났다.
몰래카메라인가.
사원 나부랭이, 이제 막 수습 딱지 뗀 나한테 이사가 왜 선물을 줘.
무슨 일을 같이하자고 하나.
그렇게 집으로 올라가, 어머니께 들고 온 선물 상자를 건넸다.
뜨득.
어머니가 포장을 뜯었다.
나도 옆에서 내용물을 같이 봤다.
붉다. 희다. 아름답다.
한우였다. 그것도 투 뿔 꽃등심.
어림잡아 봐도 다섯 근이 넘는다.
백화점에서 한 점 한 점 예쁘게 발라서 정성을 다해 포장한 그런 꽃등심이었다.
"월급을 먹는 거에 다 쓸 생각이니?"
어머니가 물었다.
"아니요. 선물 받았는데요."
"누가? 팀장이?"
"이사님이요."
"……누구?"
어머니가 고기를 꺼내다가 날 바라봤다.
"에, 제가 한 일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시면서 선물이라고."
"잘했네."
어머니가 말했다. 잘했으니까 줬겠지.
변신족은 단순한 면이 있어서 다른 사람 말을 쉽게 믿는다. 어머니는 내 말을 믿었다.
물론 나도 그렇게 믿었고.
잘했다고 고기를 주네.
"응? 고기네?"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욕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같은 얘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는 불멸자고, 예민한 청각은 이미 모든 사실을 들은 뒤였다.
"뭘 했길래?"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열심히 했는데요."
난 새삼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열심히 하면 이사가 고기도 준다는 거다.
* * *
김동철 이사는 사내 정치 쪽만 보자면 프로 중의 프로였다.
그는 은근한 제안의 고수기도 했다.
본래라면 사원 나부랭이 따위에 자신이 나설 이유가 없다.
밑에 애들 시켜서 자신의 라인에 들어오라고 언질만 줘도 껌뻑 죽는다.
그게 회사고, 그게 권력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나섰다.
전무는 사장이 찍은 사원이라는 점에서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그 친구는 내 사람으로 삼고 싶은데, 안 되나?"
"됩니다."
그 한마디로 끝이었다.
고작 사원 나부랭이다. 자신이 한우도 줬고, 일도 맡길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겠지.
김동철 이사는 줄을 댔고.
그 줄을 타라고 제안한 셈이었다.
김동철 이사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그는 광익이 영리하고 영특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사내 정치에는 무지함을 몰랐다.
광익은 고기는 주니까 받았고.
나중에 일을 같이하자는 말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사니까 당연히 일을 시키겠거니 했다.
오해의 밤은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