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자,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나 심무용, 외부감사 2팀 대리."
상큼하게 웃으며 심무용 대리가 말했다.
이름을 들으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회사 인명부를 괜히 외운 게 아니다.
"농담이다. 위에서 올라오란다."
웃는 낯으로 심 대리가 말했다.
"네, 호출."
순간 심쿵 했네.
감사팀으로 오란 소리가 진짜인 줄 알았다.
"말 잘하고."
김정아 1급 사원의 징계 자리다. 그리고 난 거기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자, 본래라면 같이 징계를 받아야 할 사람이고.
당연히 말을 잘할 거다.
신중하고 정직하게, 최대한 사리에 맞춰 호의적으로 그렇게 말해야지.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
징계 위원회는 처음이다. 사실 이 회사에서 하는 대부분 일은 다 처음이다. 그리고 처음 하는 일은 원래 긴장의 연속인 법이다.
두근두근하며 걷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야, 이중봉, 말 똑바로 안 해?"
"아니, 시발, 내가 거꾸로 말했나."
또라이다.
팀장의 목소리였다.
"야."
불멸이니 소리를 치진 않지만, 그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불멸로 각성한 이후, 난 분위기를 기가 막히게 잘 감지하곤 했다.
지금도 그 직감이 말했다.
내가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개 음경 같은 분위기라고.
"신입 사원 유광익입니다."
문 앞에서 말했다. 지키고 선 직원 하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답했다.
"야, 너희 팀장 왜 저러냐?"
속삭이는 목소리다.
안에는 들리지 않을 듯했다.
나도 모릅니다. 왜 저 새끼가 제 팀장일까요.
뭐라 답하기도 전에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왔어?"
"네, 신입 사원 유광익입니다."
끼익.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섰다.
시선이 모였다.
"그래, 왔네."
모르는 얼굴과 아는 얼굴이 섞여 있었다.
말발굽 모양의 긴 나무 테이블 중앙, 차갑지만 메마르지 않은 사수 김정아가 접이식 철제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평소와 같이 반듯한 옷매무새는 취미가 다림질이 아닌가 의심스럽게 했고 자세도 올곧았다.
아는 얼굴은 라떼 교관과 박다람.
나머지는 아마도 본부장급인 듯했다.
앉아 있는 인원은 총 다섯, 모르는 얼굴은 둘이었다.
앉은 사수를 중심으로 오른쪽, 문에 들어서자마자 맞은 편이다. 내가 아는 세 번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옆으로 반쯤 꺾고 전신에 나 불만 있다고 표시한 채로 앉아 있는 자세라니.
굳이 불멸의 감각이 아니더라도 저 양반의 자세만 보면 그의 심중을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왔냐? 꽝?"
어디서든 자기 페이스 잃지 않는 강단이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지켜야 할 걸 지키지 못하면 그냥 또라이일뿐이다.
우리 팀장은 또라이였다.
"유광익 사원, 하나 물어볼게요."
정면에 앉은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30대 중반.
불멸이니 아마 그보다는 많이 먹었을 거다.
검은 스타킹을 신고 빨간 구두를 신은 여자였다.
옅은 화장에 눈이 크고 한눈에 봐도 화려함이 돋보이는 미녀였다.
불멸의 외모는 역시나 사기다.
"김정아 사원이 강요했나요?"
"아닙니다."
강요는 무슨.
"수습 사원이 사건을 일으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알면서도?"
수습에게 허락된 징계는 퇴사뿐이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습이 뭘 알아서?"
바로 옆에 앉은 머리칼이 흰 남자다.
염색 취향 독특한 양반이네.
"몇 달을 가르쳤는데 알만큼은 알겠지."
야, 팀장아, 너 왜 끼어들어.
옆에서 귀를 파며 팀장이 말했다.
본부장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남녀는 팀장을 무시했다.
"사람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정공법이지.
어찌 됐든 결과론적으로 난 사람을 구했다.
사수는 명령에 불복했지만, 판단은 옳았다. 죽은 사람 없고 웨이브 형태의 블랙홀이 오프닝 됐는데도 손해는 미비하다.
고작 내가 입었던 무장 정도만 망가졌다.
"그래, 사람 구했으면 됐지. 일하다 보면 엉? 사람 구하는 게 중요하지, 뭐가 중요해! 하여간 꽉 막혀서는."
"야, 너 안 닥치냐?"
여자 본부장이 말했다.
"여기가 무슨 공산주의야? 입만 열면 뭐 패기라도 할 기세일세."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절대 혼잣말이 아니다.
"이중봉."
하얀 머리 본부장이 그를 불렀다.
"네? 불렀슴까?"
껄렁하기가 동네 양아치보다 더하구나.
하하하하하하.
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아, 귀 간지러워 누가 내 욕하나."
내가 한다. 내가. 시발, 이중봉 새끼. 사태를 왜 악화시키냐.
"너 나가."
"제 팀원 징계 자리입니다. 팀장은 필수 참석이죠."
"안 나가?"
"네."
"그럼 아가리 싸물어."
"아니, 그러니까 여기가 공산……."
"야."
살 떨리네. 저거 진짜 왜 저러냐.
나도 모르게 팀장을 빤히 바라봤다.
"뭘 봐, 새끼야. 잘생긴 얼굴 처음 보냐?"
팀장이 말했다.
응, 처음 본다. 너처럼 잘생긴 또라이는 처음 봐.
팀장과 흰 머리 본부장과 기 싸움이 시작됐다. 서로 살벌한 눈빛이 오갔다.
이러다가 한 대 치겠네.
"하여간 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함 봐주쇼."
봐주고 싶어도 그럴 마음이 쏙 들어가게 만드는 말투다.
"봐줘? 어떻게?"
여자 본부장이 물었다.
"대충 감봉 몇 달 하고 끝냅시다."
"후우우우우."
여자 본부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날 향해 고갯짓을 보였다.
"나가자."
날 데려온 직원이 팔을 붙들고, 당겼다.
"네."
답하고 나가는 뒤에서 또라이의 한마디가 귀에 꽂혔다.
"이거 뭐, 징계 무서워서 일하겠냐고."
난 묵묵히 회의실을 나왔다.
의외의 모습이긴 했다. 저 팀장이, 어제는 그리 지랄해 놓고 오늘은 저리 나서는 걸 보니.
"이걸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승강기 앞까지 나와 함께 나온 직원이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직원이 날 보더니,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말했다.
그래, 너도 알 건 알아야지. 그런 눈빛이었다.
"팀원을 위해 나서는 건 좋지. 하지만 정도가 있는 거다. 저러면 인사고과가 먹물 부은 한지처럼 될 거다."
엉망이란 소리구나.
그래, 그래서 너무 의외라니까.
제 밥그릇 따위 상관하지 않고 저리 나서는 게.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서 자리에 앉으니, 그사이 팬더 대리가 출근했다.
"분위기 어땠냐?"
개 음경 같았다고 말하면 될까.
"팀장님이 슈퍼 캐리 중이었습니다."
최대한 돌려서 말했다.
그 말에 팬더 대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이렇게만 말했는데 알아듣는다고?
"지랄맞네."
팬더 대리는 그렇게까지 말하고 모니터에 코를 박았고.
잠시 뒤에 팀장과 사수가 내려왔다.
"징계 뭡니까?"
팬더가 물었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30일 동안 작전 참여 불가입니다."
"어? 그럼……."
팬더가 말끝을 흐렸다.
"거기까지."
팀장이 말을 자르고 한숨을 두어 번 내쉬더니 제 자리에 앉았다.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팀장이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제 입으로 그만둔다고 하는 놈치고 그만두는 놈을 본 적이 없다고.
그러니까 팀장이 한 말은 지금부터 더 열심히 회사에서 일하겠다는 다짐과 같았다.
파이팅, 시발 팀장.
"일해."
팀장이 말했고 그걸 끝으로 우리는 각자 업무에 집중했다.
난 오늘의 첫 번째 할 일을 시작했다.
반성문이다.
근데 뭐라고 쓰지, 아까 팀장의 자세를 본받기로 했다.
몇 글자 쓰고 다시 보며 오타를 고친 뒤에 프린트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 자리에 프린트를 올렸다.
"매일 써라."
팀장이 으름장을 놓더니 내 반성문을 읽기 시작했다.
난 눈으로 직접 보진 않고 모니터를 끄고 각도를 조절해 거울삼아 팀장을 살폈다.
반응이 참신했다.
처음에는 어깨를 떨더니, 다음에는 피식 웃는다.
마지막으로 내가 건넨 반성문을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구겼다.
"미쳤냐?"
팀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충실히 답했다.
"그럼 이건 뭔데?"
"반성문이요?"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인데, 그걸 하나하나 지키지 못했네요. 뭐, 어쩌겠습니까. 열심히 일하다가 생긴 일을, 다음에는 조심하겠습니다?"
처음 시작이 저러했지.
"제가 반성문을 처음 써 봐서."
난 변명을 모르는 남자지만, 어째 회사 생활에서 느는 건 핑계뿐인가.
점점 사회에 찌들어 가는 날 관조하게 되니 씁쓸한 마음이 절로 드는구나.
"명문이네. 시발."
팀장이 말했고.
꾹 참던 팬더 대리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맞은 편에 앉은 보안 2팀 대리도 덩달아 풉.
내 사수는 평소와 같이 인형 같은 얼굴로 앉아 있고, 주변에 이 얘기를 들었던 이들은 하나 같이 픽픽 웃음을 보였다.
내가 또 명필이지.
우리 어머니가 한석봉 어머니만큼 칼질은 못 해도, 주먹은 한석봉 어머니보다 이만 배는 잘 쓰신다.
툭하면 체벌로 끝나는 어머니의 교육 방식은 나에게 적당한 두려움을 줬고.
난 뭐든 잘하고 싶은 아이가 됐다.
그래서 글짓기도 곧잘 했지.
어떠냐, 내 엿성문이.
엿 먹어라와 반성문을 합친 김소월도 울고 갈 명필문이다.
"또라이가."
또라이가 날 또라이라 부른다.
묵묵히 앉으니, 팀장도 씩씩거리다가 더 말하지 않았다.
내일은 무슨 내용을 쓸까. 기대됐다.
당하기만 하다 보니 내가 무슨 지렁인 줄 아나 본데.
내 성격도 우유 부은 카스테라 같진 않다 이거다.
그렇게 또 이런저런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분위기가 칙칙했다.
사수에게 내린 징계가 가벼운 게 아니었나?
눈치를 보면 그런데, 그 내용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사람 약점 가지고."
팀장이 그리 중얼거리긴 했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 턱이 없다.
그러던 중이다.
"야, 꽝."
"네, 신입 사원 김소, 아니 유광익."
내일 쓸 반성문을 생각하다가 개소리를 할 뻔했다.
진달래꽃을 카피해서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심무용이 뭐라고 했다고?"
"……네?"
"심무용 그 개새끼가 뭐라고 했냐고?"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듣는다더니.
누가 말했구나.
"감사팀에 오라고 했습니다. 근데 농담이라고……."
팀장이 내 말을 잘랐다.
"오호, 스카웃 제의를 받으셨다. 시발."
뭐지 불길한데. 많이 불길한데.
타이밍 좋게 그 심 대리가 내 앞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가 지나가며 윙크를 던졌다.
"안녕. 광익이."
텅!
책상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감각을 개방하니.
"이런 개애애애새애애애끼이이이이."
책상을 박차고 욕설을 날리며 날아오른 팀장이 보였다.
말보다 빠른 발이 눈앞을 스쳤다. 노린 건 내가 아니다.
심 대리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
쩍!
그 팔 위로 팀장의 뒤꿈치가 꽂혔다.
"내 저럴 줄 알았다."
팬더 대리가 말하고.
"잘 알면서 왜 그랬을까요."
사수가 중얼거렸다.
"끄억!"
맞은 심 대리가 굴렀다.
"너 한 몇 달 나갔다 오더니 감 잃었냐?"
팀장이 슬리퍼를 옆으로 차내더니 성큼성큼 다가간다.
그걸 본 심 대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윽, 왜, 갑자기 왜."
"이 새끼야 니가 우리 신입한테 감사팀으로 오라고 약 쳤다며?"
"농담한 겁니다."
"농담? 농담? 노오오옹다아암? 그래, 그럼 나도 장난 좀 칠게, 아까 발차기가 너무 가려웠지?"
저기 팀장님, 저 대리님 팔이 부러진 것 같은데요.
"이중봉 팀장님!"
쩌렁쩌렁한 목소리. 불멸 사이에서 이리 소리칠 위인은 흔치 않다.
뒤를 돌아보니 사무실 통로 끝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외부감사 팀장이었다. 이름은 박필로.
나이 서른에 로열 로드라 불리는 감사팀의 팀장이 된 초에이스 불멸자.
"뭐, 왜?"
이쪽은 외부 보안 3팀장 이중봉.
싸움은 잘하는데 성격이 개차반이라 번번이 승진 대상에서 제외되는 또라이.
둘의 눈이 허공에 맞붙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장난."
"장난?"
어, 이거 좀 너무 살벌한데.
"장난 두 번 치면 불멸 잡겠습니다."
"팔뚝 하나 부러진 거로 너무 과한데."
"과하다고요?"
말하며 박필로 팀장이 다가왔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농담 한 번에 무슨 팀장씩이나 되는 분이 이렇게 나섭니까?"
"……농담? 아하, 너도 아는 일이다, 이거지. 그러니까 니가 시킨 거였냐?"
상황 전개가 예상할 수 없게 흘러갔다.
"뭘 시켜요?"
"우리 신입 찔러 보라고?"
"신입이라고 받아 봤자 매일 갈아 버려서 별명이 믹서기인 분이 왜 이러십니까? 그래요, 제가 시켰습니다. 간이나 한번 보라고. 괜히 고생만 하는 3팀에 있을 거면 제가 데려오는 게 저 친구한테도 좋을 거니까요."
"안 돼."
단호하다. 팀장의 말투가 더없이 단호했다.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데 팀장이 말을 이었다.
"저거 내 거야. 갈아서 주스를 만들든, 걸레짝이 되든 내 거라고. 건들지 마. 다른 팀에도 경고한다. 중력제어랑 이번 일로 눈독 들이는 놈들 몇 있지? 시발, 건드려 봐. 나 누군지 알지?"
네, 제가 압니다. 개 또라이요.
"여기가 무슨 공산당입니까?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하지."
박필로 감사팀장이 말했다.
저 말 징계 위원회에서 팀장이 한 말인데.
"광익 씨, 무서워할 거 없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박필로가 나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팀장과 팬더 대리, 김정아를 포함한 주변 직원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하물며 팔이 부러져 낑낑대던 심 대리도 내 선택이 궁금한지 아픔을 잊고 내 입을 주시했다.
자,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할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