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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32화 (32/488)

32. 정말 잘했다.

평범한 회사라면 사칙을 기준으로 다양한 규정이 정해져 있을 거다.

하지만 화림 정보 통신.

불멸특수대라 불리는 곳에는 그런 복잡한 규칙이 필요 없었다.

애초에 군대를 기반으로 한 조직이니.

상명하복과 업무 프로세스, 업무 분할 따위의 몇 가지 규칙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기밀 유지와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건 우선순위 중 우선순위였다.

요약해서 결론만 말하자면.

팀장이 명령했고, 나와 사수는 그걸 대놓고 무시했다.

"지지직?"

회사에 돌아왔고 너덜너덜해진 복장과 총기류를 반납한 직후다.

팀장은 회의실로 나와 사수를 불러 입을 열어 첫 마디를 뱉었다.

"지지지이이익?"

"통신이 갑자기 끊겨서."

조심스레 변명을 뱉었다.

내 본래 변명 따위 하지 않는 상남자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탈출구를 찾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아, 통신이 끊겼구나. 우리 꽝이 통신이 끊겨서 내 명령을 못 들었구나."

"네, 그거죠."

대답하니, 옆에서 사수가 내 손을 잡는다.

하지 말란 뜻인 듯했다.

"아, 시발, 내 이성 통신도 지금 막 지지직 하고 끊겼으면 좋겠다. 그럼 너 피떡으로 만들고 깜빡했다고 할 텐데."

무슨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하고 그러십니까. 팀장님.

그리고 그 눈썹 좀 어떻게 하시고.

눈썹이 막 떨립니다. 팀장님.

"제 잘못입니다."

사수가 말했다.

뒷짐 진 채로 옆에 선 사수를 보니 든든하기 짝이 없다.

그래, 책임자는 내가 아니라고.

"당연한 말을 하냐?"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정아야."

팀장이 감동했다.

"네, 1급 사원 김정아."

화림 내에서는 사원에도 직급이 있다.

3급, 2급, 1급.

수습은 3급 수준도 안 되고.

"너 직급이 뭐였지?"

"1급 사원입니다."

"책임 어떻게 지게? 퇴사하게?"

사수는 입을 다물었다.

"적당히 좀 하자. 징계 위원회 열릴 거다."

통신에서 말할 때만 해도 나와 사수를 잡아 죽일 것 같은 기세였는데.

지금은 또 아니다.

태풍이 한차례 지나가서 고요해진 폐허를 보는 기분이다.

"오늘은 퇴근하고 내일 출근하자마자 감사팀으로 가라. 경위서 정도로는 안 끝난다. 알지?"

"네, 압니다."

사수가 답했다.

생각해 보면 여긴 조직이다. 조직에는 규정과 규율이 있고, 그걸 어겼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여기는 불멸특수대란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 곳이기에 그 대가라는 게 예상보다 클 순 있겠지만, 사람을 구한 일이다.

난 나름 당당했다.

"넌 니가 잘한 것 같지?"

그런 날 보고 팀장이 물었다.

네라고 답하면 때리겠지?

"아닙니다."

"시발."

팀장이 답했다.

"진짜 아닙니다. 잘못한 거 압니다."

"시이발."

팀장이 또 답했다.

이 새끼 뭐라고 말해도 욕만 할 것 같은데.

그래서 나도 입을 다물었다.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팀장이 입을 열며 십여 초간 이어진 침묵을 깼다.

"넌 출근하면 매일 반성문 한 장씩 써서 가져와. 알았냐?"

"……전 징계 위원회 안 갑니까?"

"가고 싶냐?"

아니, 안 가면 좋긴 한데.

그래도 반성문보다는 징계 위원회가 낫지 않을까.

내가 고딩도 아니고 무슨 반성문을 쓴단 말인가.

하물며 고등학교 때도 반성문 같은 거 한 번도 안 써 봤다.

집에서 큰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다면 어머니는 펜보다 강한 주먹으로 응징하셨고, 아버지는 조용히 타이르는 타입이셨다.

학교에서야 나 같은 모범생이 어디 있었을까.

"넌 반성문, 시발."

팀장이 말했고 그거로 상황 종료였다.

퇴근까지 한 시간이 남아 있었고, 난 메신저를 통해 내가 왜 반성문을 쓰게 됐는지 알았다.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사수와 내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둘이서 눈먼 개 300마리를 때려잡았다고.

권총 몇 자루로 웨이브를 막았다는 거다.

그랬나, 나 몇 마리나 죽였지?

그걸 셀 정신은 없었는데.

하여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공식 정보통 요한이 메신저를 통해 말해 줬다.

수습 사원은 징계가 없다. 감봉도, 페널티도 없다.

유일한 페널티라면 퇴사다.

보통 수습 사원이 사고를 쳐 봤자 얼마나 대단한 사고를 치겠나.

그러니 진짜 이 새끼는 못 쓰겠다 싶으면 퇴사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모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1급 사원 김정아, 그러니까 내 사수.

그녀가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

회사 생활이 살벌하긴 하구나.

내가 생각했을 때는 민간인도 구하고 잘한 일인데, 규정을 어겼다고 바로 징계 위원회 소집이라니.

생각해 보면 이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여긴 조직이고, 난 이 조직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하물며 여긴 정부 산하 자회사나 다름없는 곳이다.

규율과 규정을 지키는 일에 더 빡빡한 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여긴 누가 뭐라고 해도 회사다.

회사란 무엇인가, 이익을 좇는 단체다.

그게 아니라면 공공기관이나 사회적 기업이 됐겠지.

반은 공무원이지만, 결론적으로 화림 정보 통신은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물론 거기에는 정부에서 말하는 공공의 이익도 염두에 두지만.

이번 사고에서는 민간인 몇보다 불멸 대원 몇이 훨씬 중요했을 것이다.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는 신입 사원이었고 하나는 재생 능력이 없는 비약 인간.

화림이란 회사의 편에서 보면 당연히 민간인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나와 사수는 그걸 무시하고 행동했다.

메신저 보고 대충 내가 한 일에 대해 머리 굴리는 사이 퇴근 시간이 됐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집 갈 시간은 꼬박꼬박 잘도 챙겨요."

팀장이 말했다.

저 주둥이는 평생 저렇게 말하겠지?

그럼 저 주둥이를 고치는 것보다 내가 한 귀로 듣고 흘리는 게 나을 것이다.

난 효율적인 방법을 택했다.

듣는 척만 하고 대충 답하고 돌아섰다는 말이다.

어느 정도 몸은 회복했지만, 정신적으로 피로한 하루였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 승강기를 타고 회사 밖으로 나갔다.

한결 싸늘해진 공기가 폐부를 훑고 빌딩 숲 사이로 노을을 뿌리는 태양이 지고 있었다.

뷰 죽이네.

개와 늑대의 시간, 노을이 지는, 낮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기점이다.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우두커니 멈춰 있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짚었다.

요한이나 귀태일 거로 생각했다.

고개를 돌렸다.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내일을 위해 30분 먼저 나간 걸 봤는데.

"오늘 잘했다."

상대가 말하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사수, 김정아였다.

"정말 잘했어."

한 번 더 말한 사수와 눈이 마주쳤다. 흰 자 가운데 까만 동공이 날 바라봤다.

나도 눈을 마주쳤다.

사수의 눈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어떤 후회도, 두려움도 없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는 자의 눈이었다.

두근.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잘했다.

정말 잘했다.

고작 두 마디 말일 뿐이었는데.

난 새삼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았다.

난 오늘 사람을 구했다.

그 뿌듯함이 갑자기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사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저건 성격 탓이겠지.

사수는 혀를 놀리는 대신 눈으로 말했다.

그녀가 길게 말하지 않은 내용을 눈치껏 캐치했다.

블랙홀 근처에 있었던 사람은 나로 인해 살았고, 평생 고마워할 거라는 것.

설령 그 작자가 그걸 몰랐다고 해도.

근처 블랙홀에 생긴 변화 따위 몰랐다고 해도, 오늘 내가 한 일이 옳았다는 것.

적어도 자신은 그리 생각한다는 것, 그 모든 걸 봤다.

"내일 보자."

"네."

사수의 말에 나도 인사로 화답했다.

내일 보자,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가슴을 울렸다.

가만있자, 이거 어디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데.

아, 몰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한 일, 아무도 몰라도 단 한 명만은 인정해 줬다.

그 작자가 터벅터벅 걸어 제 갈 길을 가는 게 보였다.

회사에서 제공한 사옥으로 향하는 길일 거다.

나도 몸을 돌렸다.

오늘은 이제 아무 생각 안 하고 씻고 욕조에 몸 좀 담그고 잠들 거다.

물론 삼겹살을 오 인분쯤 해치운 뒤에.

곧바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응, 아들."

"어머니, 소자 몹시 배가 고픕니다."

"오늘 삼겹살하고 항정살."

"뛰어가고 싶네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변신족 아이가 스파이더맨처럼 날아다녔다는 뉴스는 보고 싶지 않다. 아들."

"네, 지하철에 몸을 싣겠나이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5호선으로 한 번에 가니까.

난 지하철을 향해 빨리 걸었고 그대로 몸을 실었다.

집에 도착해서 회사 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피를 보고 싸웠던 일도 배제한 채.

어머니께 같이 지내는 사수가 얼음 나라에서 태어난 감정 없는 얼음덩어리 같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더라는 말을 전했다.

"사진 있니?"

"아뇨. 톡에도 사진을 안 걸더라고요."

"그래?"

"왜요?"

"그 아이가 내 며느리가 될 상인가 궁금했지."

"……회사 동료입니다. 어머니."

"원래 사수가 자기 되고 자기가 여보 되는 거야."

그게 여기서 쓸 말인가요? 맞나요? 뭔가 더럽게 안 맞는 것 같은데.

"다음에 밥이나 먹게 데려와 봐."

"그건 음. 네, 시도는 해 볼게요."

정말 큰 도전일 거다.

솔직히 심리적 거리감이 많이 줄긴 했는데 우리 집 식탁에서 사수와 마주 앉게 되는 건, 뭔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광익아."

"네."

"남자의 매력은 과감함에서 나온다. 먼저 대쉬해."

"아버지한테는 어머니가 먼저 고백하셨다면서요."

"그러니까 넌 엄마 피를 이었으니까. 과감하게, 알았지?"

우리 엄마는 왜 내 연애사에 관심이 많으실까.

아직 손주 볼 나이는 아니신데.

그리고 어머니는 여자가 먼저 과감하게 했으니 그건 왜 그랬냐고 물으려 했는데, 그걸 또 내 쪽으로 돌리시네.

말로 이기는 건 글렀다.

"몰라요. 시도는 해 본다고요. 그리고 제 타입도 아니고요."

그 말에 어머니가 눈썹을 씰룩였다.

"네 타입?"

어머니도 내 이상형은 아신다. 내 여성상은 한결같지.

섹시하고 청순하고 고아하고 귀엽고 지적이며 배려 깊고 같이 놀아 주고 얼굴 예쁘고 몸매 좋고 어우동과 신사임당이 반반씩 섞인 그런 여자.

"없어, 아들."

말도 안 했는데 어머니가 먼저 말했다.

"네, 유토피아는 그러하기에 이상향이지요."

이상형은 그야말로 내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 아닌가.

"에휴, 내 아들도 개밥 쉰내나 내면서 늙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되는구나."

"아니, 결혼은 안 해도 그런 냄새는 안 풍깁니다. 절대로."

"쓰레기통에 휴지 쌓아 놓지 말고."

"아, 안 그래요."

모든 일은 뒤처리가 확실해야 하는 법이다.

난 방에 휴지통을 두지 않는다. 쓰레기는 대부분 거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저 씻어요."

먹었으니 계획대로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졸다가 머리 잘 말리고 들어가 누웠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채로 꿈을 꿨다. 내가 꿈인 걸 알면 자각몽이라고 하든가.

그런 것 같았다.

눈먼 개가 수천 마리가 몰려와 내 몸을 잘근잘근 씹었다.

난 구속된 채로, 꿈이라 그런지 거지 같은 구속구였다.

팀장의 얼굴이 각인된 쇠사슬이었다.

시발, 절로 욕이 나오네.

그 상태 그대로 개들에게 물어 뜯겼다.

아프지만, 또 괜찮았다.

불멸의 재생력은 이대로 날 죽게 하지 않을 테니까.

거기에.

우드득.

꿈속에서 난 사슬을 뜯고 일어났다.

난 변신의 피도 이었으니까.

그렇게 눈을 떴다.

밝은 햇살이 비추는 아침이었다. 구름 한 점 없었다.

꿈도 악몽은 아니었다. 식은땀 한 방울 안 흘렸다.

다시 출근이었다.

그렇게 준비하고 출근하니.

내가 일등이다.

아, 사수는 징계 위원회 갔구나.

어제 들은 얘기로 내가 참고인으로 불려갈 수도 있다는데.

얌전히 기다리자.

그렇게 자리에 앉는데 누가 똑똑하고 내 파티션을 두드렸다.

"안녕."

"네, 신입 사원 유광익."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처음 보는 얼굴이 나에게 대뜸 말했다.

"너 감사팀 안 할래?"

……응?

이건 무슨 상황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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