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경험은 흔적을 남긴다.
각성, 과외, 시험, 오티, 입사.
훈련, 암기, 대련 후 기절.
그동안 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물리적인 시간은 짧았는데 체감하기로는 몇 년쯤 지난 것 같았다.
난 많이 배웠다.
내가 아는 세상을 넓혔고, 그 너머를 바라봤다.
과외 선생에게 배운 건 기본기.
어릴 때부터 익혀 온 일반인 기준의 잡다한 기술.
그리고 회사에 들어와서 배운 건, 불멸의 전투법.
시발 팀장과 붙은 뒤, 난 내가 가진 게 얼마나 투박한지 알았다.
손을 뻗는 각도, 감각을 다루는 기술, 몸을 쓰는 방법.
모든 게 투박했다.
난 팀장과의 대련에서 기술의 세련됨을 엿봤다.
감각의 활용법, 그러니까 새로운 기술의 단면을 보고 익혔다.
그걸 몸에 붙이고 익히려면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래도 어설프게 쓸 순 있었다.
감각의 집중과 함께, 달려드는 눈먼 개의 움직임이 잡혔다.
공격에 페인팅을 섞을 필요는 없었다.
인베이더 중에는 지능이 높아서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대응하는 놈들도 있지만, 이쪽은 본능에 충실한 쪽이다.
크르르!
송곳니, 침, 과격한 몸짓과 빨간 눈.
모든 게 눈에 들어왔다.
달리던 놈의 발이 땅을 찍는 것도 함께 말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과 같은 육감이 놈의 움직임을 읽었다.
내딛는 발에 무게가 실리며 땅이 파이고 달리는 속도가 느려진다. 탁월한 불멸의 동체 시력은 그 순간을 잡아챘다.
뛰어오르기 직전의 움직임, 근육이 수축하는 것도 느꼈다.
나 홀로 앞날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예상한 대로 바닥을 박찬 눈먼 개가 날치처럼 튀어 올랐다.
허리를 뒤로 당겨 스웨이.
딱!
허공을 깨문 놈의 이빨, 벌름거리는 코가 보였다.
운동에너지가 전부 소모되면 몸을 멈추기 마련이다. 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발을 뻗었다.
점프 후 정점에서 멈춘 놈의 옆구리에 내 발이 꽂혔다.
쩡! 우득!
뒤꿈치에 충실한 감각이 느껴졌다.
갈비뼈 몇 개를 부러뜨렸을 거다.
아래에서 위로 뻗은 발에 맞은 놈의 몸이 위로 튕겼다가 내려왔다.
난 놈의 어여쁜 머리통을 한 손으로 잡고 휘둘렀다.
돌려 차는 사이 뒤를 노린 놈이 내가 휘두른 눈먼 개 배트에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깽!
우는 것도 개요, 사냥 습성도 개다.
앞에서 시선을 끌고 뒤를 노린다.
이놈에 대해 배운 것들이, 실전으로 체화되어 몸에 익었다.
모든 경험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곧 기술이 되고 능력이 되며, 실전에서 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내 눈앞에 완벽한 교본이 있기에 더 보고 배울 수도 있었다.
얼음 선배, 무감정 사수 따위로 불렀지만.
지금은 간이 특수종을 따라잡기 위해 만든 비약 인간 그 자체다.
사수는 훌륭한 교본이었다.
뒤로 밟는 스텝 두 번으로 달려드는 눈먼 개 두 마리가 빈 허공을 스친다.
피한 뒤에 다시 다음 놈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갈기고,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나이프를 뽑아 던진다.
퍽하고 머리에 박힌 나이프다.
다시 놈들의 공격을 피하며 뒤로 한 바퀴 굴러서 나이프를 뽑아서 회수.
김정아는 포위되지 않았다.
지금 사수가 하는 건 포지션 싸움이다.
몰리지 않는다. 끊임없이 발을 놀리며 눈먼 개의 움직임을 유도했다.
놀라운 공간 지각 능력이다.
순식간에 변하는 상대와의 거리, 위치를 계산해서 계속 유리한 포지션을 잡는다.
물론 그 안에는 내 희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를 노리는 놈들은 열외로 치는 거다. 내가 동의하진 않았지만, 진짜로 그 작전을 실행 중인 거다.
"저기 맛난 먹이가 있단다. 저거 먹어. 그사이 난 너희 뒤통수를 쪼개 놓을게."
미친 사수가 이렇게 말할 리 없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염병할.
지랄맞은 것과 별개로 그녀가 보이는 건 진짜 훌륭한 기술이다. 비약 인간이니, 불멸처럼 예민할 수 없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활용했다.
지식과 완력, 적의 습성을 이용하는 것까지.
눈으로 보고 배우는 데 집중하는 사이, 빈틈이 생겼다.
첫 실전이다. 실수는 당연한 법이다.
콰득!
한 놈이 달려들어 팔뚝을 물었다.
방검방탄복의 훌륭한 재질은 놈의 이빨에 뚫리지 않았지만, 그 물리적인 충격만은 그대로 팔뚝에 전해졌다.
팅.
물린 순간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았다.
뽑은 나이프를 그대로 놈의 주둥이 틈에 넣고 그었다.
턱 근육이 갈라지면 아무리 대단한 치악력을 갖고 있어도 무의미하다.
끄르르륵.
피거품을 물며 놈이 떨어졌다.
난 떨어지는 놈의 머리통을 발로 걷어찼다.
뻥!
중거리 슛이다. 개새끼야.
다들 진짜 개처럼 생긴 놈들인지라, 이게 욕 같지도 않네.
머리통을 터트리고 나이프를 빙글 돌려 역수로 잡고 다시 파이팅 포즈.
그러면서도 사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일말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욱신거리는 팔의 통증은 금세 사라졌다.
뼈나 근육에 심각한 타격을 준 건 아니다.
난 내가 할 일을 깨달았다.
작전 개요.
하나, 내가 미끼가 된다. 불멸은 쉽게 죽지 않으므로.
개 먹이가 되는 것 같은 트라우마는 나중 문제다.
둘, 그사이 사수는 최대한 적의 숫자를 줄이다. 내가 진짜 개먹이가 되지 않도록 놈들을 죽인다.
셋, 버틴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누가 들어도 미친 작전이지만.
딱히 다른 방법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하나.
시선 끌기다.
팀장과 붙어서 배운 건 두 개였다.
집중해서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
다른 하나는 기척을 퍼트려 속이는 것.
기척 감추기의 반대.
기척 속이기.
감각을 개방하고 몸짓과 공격하려는 자세, 지금 당장 달려들 것 같은 살기.
변신족에게서 배운 야생의 살기가 섞이고.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효과를 발휘했다.
크르르르릉!
그것도 엄청나게 좋은 효과를.
"……잘하네."
미친 사수가 칭찬했다.
지금 저런 칭찬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효과가 엄청 좋구나.
눈이 빨개진 눈먼 개 무리, 최소 오십이 넘는 놈들이 날 향해 달려들었다.
이성을 잃은 놈들의 눈빛을 보니 절로 목청이 트였다.
"사수우우!"
외쳤다.
아무리 내가 날고 기어도 이런 상태에서는 상처 하나 없이 버틸 수는 없다고.
유리한 포지션을 잡는 것도 정도 것이지.
해변에서 몰아치는 파도를 뚫고 소매하나 안 젖길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콰드득!
물린다.
무는 놈의 머리통에 나이프를 박고, 당겼다.
두개골을 부수는 괴력이다.
콰득!
또 물린다.
이번에는 팔꿈치로 머리통을 찍었다.
사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찾기에 내 주변에 달려드는 개가 너무 많았다.
정강이가 물린 채로 로우킥을 날리니, 곧바로 블라인드 독 로우킥이 되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두 배는 넓은 피격 범위의 발차기를 하고.
위험한 부위, 급소와 동맥 부위를 노리는 놈들은 하나같이 턱 근육을 찢어 줬다.
나이프 손잡이로 머리통을 까고.
무릎을 올려 차 턱을 부순다.
숨 돌릴 틈 따위 없었다.
그러니 말할 틈도 없었다.
호흡을 고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난 불멸이다.
고로 죽지 않는다. 아니, 쉬이 죽지 않는다.
고통은 잠시 잊는다. 칼날 구보 때부터 배운 통증 차단이다.
통증 대신 냉정하게.
더없이 차갑게.
불멸은 영원히 싸울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 몸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공격만, 그것만 쳐 내자.
정강이를 무는 놈은 놔두고 허벅지 안쪽을 무는 놈의 머리통을 먼저 깬다.
무릎과 팔꿈치, 관절 부위는 보호대가 버텨 줬다.
압축 가죽이라는 아주 특수한 소재로 만든 부츠는 강철보다 단단했다.
퍽! 아킬레스건을 노리는 놈을 걷어차니, 주둥이에서 이빨이 부러져 날아갔다.
다음은 밑에서 달려드는 놈의 머리통을 밟아 터트리고.
앞에서 알짱대던 놈은 목을 쥐고 당겨서 겨드랑이에 넣고 꺾었다.
놈들의 약점은 명확했다.
머리다. 심장과 뇌가 하나로 이뤄진 특별한 내장 구조라 했다.
머리만 노리면 됐다.
배운 대로. 때리고 치고 후린다.
주먹과 발, 무릎과 팔꿈치.
전신을 이용했다.
그렇게 몇 마리나 후렸을까.
시야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출혈 문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린 놈의 뒤통수를 쳐서 떨궜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시끄러운 개소리 사이.
한줄기 음성이 귀에 꽂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폭음이 귀를 때렸다.
두두두두두두!
화기의 소음.
퍼버버벅!
피륙과 살, 근육과 뼈를 가리지 않고 구멍을 내는 소음.
끼에엥!
눈먼 개의 비명.
"야, 유광익."
그리고 사수의 목소리.
"안 놓쳤습니까?"
내가 물었다. 한 마리도 놓칠 수 없었다.
그럼 바로 민가 피해다. 그걸 막기 위해서 남은 건데 놓쳤다면 세상 이런 뻘짓도 없다.
그럼 기분이 더러울 것 같은데.
"안 놓쳤다."
사수가 말했다. 그리고 난 눈을 감았다.
솔직히 더는 못 버티겠다.
혼자서 사냥개 오십 마리랑 싸우라니, 그럼 나한테 적절한 무기도 주고 장비도 줘야지.
이건 아니다.
암전, 눈앞이 캄캄해지며 내 상태를 직시하게 했다.
졸도다.
* * *
양팔에 개 두 마리가 매달렸고 왼 다리에 하나, 등에 있는 놈은 목을 노리다가 그대로 어부바 자세가 됐다.
전신에 눈먼 개를 매단 채로 졸도.
김정아의 눈에 보이는 신입 유광익의 모습이었다.
너덜너덜한 전신에 붙은 개의 숫자가 그가 한 싸움의 처절함을 알렸다.
‘혼자서 막은 거다.’
자신이 한 일? 숫자를 줄여 준 게 전부다.
쉬이 죽지 않는 불멸이니, 신입을 미끼로 삼고 자신이 숫자를 줄이는 것.
그걸 계획하긴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안에서 자신이 그리 안전할 거로 생각하진 않았다.
생채기, 피륙에 난 상처를 제외하고는 다친 곳이 없다.
팔이나 다리 하나는 감수하고 시작한 건데.
자신에게 남은 건 자잘한 타박상이 전부다.
대신 신입은 싸움이 끝난 순간, 개 여덟 마리를 몸에 달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본사에서 나온 보안 2팀 대리였다.
오늘 외부 출장이라고 들었는데 이 근처였는지 곧바로 이곳에 온 듯했다.
그 뒤로 닭장이라 부르는 경찰 버스 두 대도 보였다.
저들이 화기를 뿜어낸 병력이었다.
급한 김에 경찰력, 불멸이 아닌 훈련 받은 일반인을 데려온 거다.
어차피 민간이 몇 죽은 거, 이쪽 인원을 좀 희생해도 빨리 제압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종료.
그것도 자신이 아닌, 신입 때문에 끝났다.
물론 그걸 전부 지켜본 사람은 자신뿐이다. 잔소리 안 들으려고 통신 송출도 다 꺼 버렸으니까.
고로, 녹화 기록도 없다.
"이거 상황 끝난 거요?"
경찰 간부쯤으로 보이는 작자다. SWAT 복장에 풍성한 머리칼이 돋보였다.
발모제를 과하게 쓴 것처럼 보였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보안 2팀 대리가 말했다.
"아니, 난리 쳐서 2개 중대나 데려왔는데, 그냥 소총 몇 자루 가져 오면 되는 거였네. 유난은."
그 말에 대리도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죽고 또 죽은 눈먼 개의 시신.
이게 몇 마리지? 최소 이백은 넘었다.
보통 웨이브에서 뿜어져 나온 개의 숫자는 이백 이상이니.
도착해서 중화기를 쏟아부어서 죽이 놈들도 꽤 많지만.
‘아니, 진짜 개 또라이들이네.’
개 또라이를 넘어서 이게 말이 되긴 하는 건가?
잘 싸우는 불멸, 격투 능력이 있는 그런 전투원 열이면 웨이브, 주먹으로 막을 만하다.
변신족이면 셋이면 충분하겠지.
아니, 변신 애들은 다치는 걸 더럽게 싫어하니까 그 새끼들도 열은 올 거다.
그럼 여기는?
둘, 거기에 하나는 비약 인간이다.
변신보다 힘이 약하고 불멸의 재생 능력이 없다.
다른 하나는 이게 첫 실전인 햇병아리 불멸이고.
그리고 그 불멸은 지금 바닥에서 빌빌대는 중이다.
당장 긴급 수혈 키트를 가져와 꽂아 줘야 한다. 많이 다쳤다. 하지만 이 정도를 중상이라고 할 수 있나?
팔다리가 날아가는 일도 불멸자에게는 일상다반사인데?
‘이거 시발.’
절로 욕이 나온다.
둘이서 막은 것 자체 그 일만 보자면 이건 진짜…….
대리의 눈이 신입에게 향했다.
솔직히 저런 친구, 탐이 나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꿀꺽.
절로 침이 넘어갔다.
슥, 김정아가 그 앞을 몸으로 막았다.
"뭡니까?"
불멸이랑 부대껴 지낸 게 한 세월이다. 김정아의 눈치는 일반인을 훌쩍 넘어섰다.
"아니, 아니다."
대리는 말하고 함께 온 경찰특공대 간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무마했다.
삐지지 마라, 그래도 너희들이 와서 민간인 피해가 하나도 없는 거다.
조금 늦었으면 불특대에서 피해가 나올 뻔했다. 너희 덕이다.
따위의 말로 말이다.
그걸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김정아는 할 일을 했다. 통신을 다시 연결한 거다.
"유닛 원, 보고. 상황 종료. 사상자 없습니다."
긴장했다. 자신도 신입인 시절이 있었고 그때 자신의 팀장은 지금보다 더 지랄맞았다.
누구나 자신의 상황이 가장 개 같은 법이니까.
그때의 팀장이 더 개자식이라고 김정아는 생각했다.
"……또라이냐?"
팀장이 답했다.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기에 김정아는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말을 아끼고 침묵으로 답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