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회사 생활 별거 없다.
"넘버 육십오."
"휠 나이트."
바퀴 달린 놈, 눈 마주치면 안 되는 인베이더.
줄줄이 읊었다.
팬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한 뒤, 인사 대신한 질문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시발, 좋은 아침은 무슨."
눈이 뻘게진 팀장이 내 인사를 받았다.
어제 밤새 프리미어 리그라도 보셨나. 눈깔 상태가 지나치게 안 좋으시네.
그런데 우리 중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얼음 선배가 안 보였다.
빈자리를 보고 묻자.
"정아 선배는요?"
"수면실."
팬더가 답했다.
어째 이 양반도 피로가 느껴진다. 불멸의 예민한 감각은 집중하면 주변 사람의 컨디션을 파악하는 법이다.
어제 단체로 셋이서 소주라도 까셨나.
내 알 바 아니었다.
어느새 2주다. 이제 나도 어엿한 화림인이었다.
외울 거 대충 다 외웠다는 거다.
그래도 여전히 훈련장에는 자주 방문했다.
이게 또 하다가 안 하면 몸이 찌뿌둥하다.
가서 줄넘기 오천 개쯤 하고 샤워하면 상쾌함이 전신에 흘렀다.
하물며 이 훈련 시간도 엄연히 업무 시간이다.
화림의 모든 사원은 육체 단련에 힘쓰는 편이다
불멸자는 재생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보통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신체 능력을 가졌다.
뭐, 순혈은 특별한 힘을 타고난다고는 하는데 그건 아직 자세히 들은 게 없으니 넘어가고.
외우고 익히고 배울 게 많았다.
간간이 총기 훈련과 나이프 훈련까지 받아야 했다.
수습사원으로서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교육 시간도 꽤 있었다.
그때마다 동기 얼굴을 보긴 했지만, 한가로이 얘기 나눌 시간은 없었다.
나만 바쁜 게 아니었다.
다들 바빴다. 그 말하기 좋아하는 요한 형이.
"나 먼저 간다."
꼬리에 불붙은 송아지처럼 움직이는 걸 봤다.
"나중에 봐."
귀태 형도 마찬가지고.
정기남과 우미호도 봤다. 둘 다 눈인사도 안 했다.
이 싸가지없는 개나리 둘은 언제 사람이 될까.
일하다가 마주칠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회사 생활 별거 있나.
별거 없었다. 시키는 거 잘하고 먹을 때 잘 먹고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면 된다.
가짜 서류 만드는 일도 배우고 팬더 대리가 작성한 옛날 보고서를 보며 보고 양식을 외우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지.
바쁘긴 한데 외울 거 대충 다 외우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창가를 보니 겨울 햇살이 반짝이는 빛을 뿌렸다. 히터를 틀지 않아도 햇살만으로 따끈한 온기를 느끼기 좋은, 거참 놀기 딱 좋은 날이네.
다들 바빠 죽는데 왜 이 팀만 한가할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미 아는 답이다.
그동안 받은 교육이 헛되지 않았다.
구조를 알아서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얼음 프린세스 김정아 사원의 말이 맞았다.
난 그저 톱니바퀴가 아니라, 이 회사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지금 할 일이 없는 이유를 안다.
간단히 말하자면 화림에는 네 개의 본부가 있고 그 밑으로는 팀이 있다.
그중에서 파견 본부 외부 보안팀은 주로 외적으로 도는 일을 맡는다.
기본적으로 이쪽이 하는 일은 세 개다.
하나, 담당 구역 재난 지원.
어렵게 말하면 이렇고 쉽게 말하면.
어스 블랙홀 터지면 출동하는 거다.
당연하게도 담당하는 지역이 있고 그 지역의 어스 블랙홀을 담당한다.
둘, 테러 대응.
이것도 어렵게 말하면 테러지.
쉽게 말하면 불멸, 변신, 초능, 마법이라 나뉘는 네 개의 특수종 중에 사고 치는 새끼 있으면 잡으러 간다는 거다.
이쪽 일은 많지 않다고 들었다.
주로 처리하는 게 보안 2팀 쪽이기도 하고.
경찰 쪽에서도 내부에 불멸특수대와 비슷한 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셋, 지원.
본래 3팀은 이쪽이 주 업무라고 했다.
이쪽 팀 인원이 이렇게 개차반인 것도 그런 이유라고 한다.
순혈 팀장에 혼혈 대리, 비약 인간 선배, 그리고 혼혈 신입.
이제까지 본 바에 의하면 보안 팀은 주로 순혈이 자리를 채웠다.
이유? 하나다.
불멸 순혈의 피가 더 진하고 이 피가 더 진하다는 건 불멸이 가진 힘을 더 잘 쓴다는 거다.
재생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인간과 비슷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근력 따위의 육체적인 힘을 말하는 거고 그 외의 힘은 또 별개다.
감각, 직감, 육감, 거기서 비롯한 특별한 힘.
거기에 혼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재생 속도.
보안팀이 일이 주로 ‘전투’니까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팀이 이상하다는 거지.
순혈에 혼혈에 비약 인간 조합이라니.
그래서 외부 보안 3팀의 주 업무는 지원.
다른 팀에서 일어나는 일에 맞춰 돕는다는 거다.
보통은 한가하다. 이게 정상이었다.
몸이나 풀러 가볼까.
팀장은 아까 나가더니 안 돌아오고 팬더는 묵묵히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와 씨름 중이다.
슬쩍 의자를 빼고 일어나 움직이는 중이었다.
탕비실 쪽에서 팀장과 우미호가 나오는 게 보였다.
붙임성 없는 셜록 홈즈 개나리는 표정이 딱딱했지만.
팀장은 달랐다.
"오, 진짜? 희한하네. 그래서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고? 시발, 니들 속은 거 아니냐?"
저거 웃네. 나한테는 비웃음밖에 보여 주지 않은 팀장이 해맑게 웃는다.
뭐지, 이 기분.
뭘까, 곰곰이 이 기분의 정체를 파악해봤다.
어머니가 날 놔두고 남의 집 자식을 칭찬하는 그런 기분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그냥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쁘다. 불쾌하다. 그만 보고 싶다.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미호의 말투는 여전했다. 필요한 말만 필요한 만큼 했다.
근데 뭘 어떻게 생각하는데?
이곳은 불멸의 사무실이다. 개방된 공간은 어쩔 수 없지만, 탕비실이나 회의실 등 몇몇 공간에는 소음 방지벽을 둘러놨다.
탕비실에서 선임을 욕하는 사원의 자유를 존중해준 거다.
진짜 별걸 다 신경 쓰는 복지다.
"시발, 신입."
제 이름은 유광익입니다. 남의 집 자식을 더 좋아하는 우리 집 팀장님.
"네, 신입사원 유광익."
"운동가냐?"
"훈련 갑니다."
"재밌냐?"
"네, 적당히 그렇습니다."
회사 생활 별거 없다.
상사가 물어보면 적당히 마음에 드는 답을 주면 그만이었다.
"너 학교 다닐 때 일진이었냐?"
……어디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거냐?
설마 우미호가 생각한 게 내가 일진이었다는 건가?
"아닙니다."
"좀 치지 않았어? 다른 신입 애들 말 들어 보니까 딱 사이즈가 나오는데."
나오긴 뭘 나와 이 양반아.
생각해 보니 이 시발 팀장 나만 빼고 다른 신입과는 꽤 친하다.
우미호 뿐 아니라 정기남하고도 인사하고 하물며 귀태와 요한도 전에 나보고 너희 팀장 입이 좀 걸어서 그렇지 괜찮지 않냐고 물었었다.
물론 난 그 인간 안 괜찮다고 오백오십 번 얘기해 줬다.
"우리 학교에는 일진 없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속이 좀 상하고.
"진짜?"
왜 나만 빼고 다른 애들과는 다 친한지 이해가 안 되고.
"네."
팀장 새끼는 굳이 나한테만 왜 만날 이렇게 지랄인지도 궁금했다.
"왜?"
그래서 툭 튀어나오듯 한 마디 뱉었다.
"제가 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뭘?"
"일진이요."
"니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해? 요새 애들 무서운 거 모르네."
무서워도 설마 특수종만큼 무섭겠나.
"네, 제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합니다. 그거 좀 보기 싫었거든요. 애들 삥 뜯고 나대고 그런 거요. 아, 툭하면 욕하는 것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리 신입이 어디서 좀 논 거 맞네."
팀장이 말했다.
분위기가 묘했다.
우미호가 날 빤히 보더니, 바보라고 입 모양을 보여 줬다.
뭐, 내가 뭐.
시비는 저 팀장 나으리가 24시간 내내 걸고 있다고.
"너 이거 좀 치냐?"
팀장이 허공에 주먹질하며 말했다.
쯧.
누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뭔데.
수면실에서 나온 정아 선배가 날 힐끗 보고 자기 자리로 향했다.
저쪽은 이 일에 관심이 일도 없어 보였다.
"조금요."
여기서 물러날 순 없기에 툭 말하니.
"대련 한 판 할래?"
팀장은 미끼를 던졌고.
"콜."
난 그걸 물어 버렸다.
나도 모르게 터진 한 마디.
그래, 솔직히 기대했다. 화림 내에서는 대인 전투훈련도 간간이 한다.
거기서 최고라 꼽히기에 시발 팀장은 S급 대인 전투능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 기회에 경험해 보고 싶다.
더욱이 난, 입으로 터는 시비보다 한 번의 주먹을 선호하는 바이다.
"콜?"
팀장이 웃었다.
난 속으로만 웃었다.
"야, 오후 일없지? 구경 올 사람?"
팀장이 말했다. 일을 크게 만들었다.
뭐, 그러든지.
"오후 3시에 대련장에서 보자, 신입. 그때까지는 오늘 자유 시간이다. 밥도 알아서 챙겨 먹고. 아, 너무 많이 먹지 말고 토할라."
남 걱정하시기 전에 본인 걱정부터 하시죠.
이것도 속으로만 말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심리전도 싸움이다. 일단 말려들면 지는 거다.
어깨를 으쓱하고 답하니.
"미호야 네가 저쪽 세컨 봐줘라."
"시간 낭비 같습니다."
"너 인사고과에 내 평가도 들어가는 건 아니?"
"네, 제가 세컨 보겠습니다."
우미호가 내 세컨이 되었다. 하등 쓸모가 없겠지만.
"난, 정아 네가 봐주고."
"네."
정아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로 대망의 시합이 성사됐다.
처엉코어너!
화림에 들어온 젊은 피, 몸에 변신의 힘을 지녔지만,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기에 숨긴 채로 나서는 유우우우과아아앙이이이익!
호옹코어너!
화림 전통의 강자이자 챔피언, 이번에 이기면 무려 열여덟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는 노련한 개자식, 이이이주주우웅뽀오옹!
아무리 변신의 힘이 있어도 쉽게 이기진 못하겠지.
그래도 불멸 늙다리에게 지진 않을 거다.
점심 먹고 자유시간을 만끽하고자, 화림 사원증이면 모든 게 다 무료인 카페로 향했다.
그린티 프라푸치노에 생크림 잔뜩 올려 먹어도 열량이 부족한 몸이라 행복했다.
특히 입이 행복하다.
"왜 그랬어?"
"뭐가?"
우미호가 다가와 물었다.
세컨이 된 김에 점심을 같이 먹고 여기까지 함께했다.
그리고 방귀태도 눈 밑이 검어진 채로 함께 했고.
"안녕, 꽃사슴."
요새 전략을 바꿔서 복고풍으로 간다고 했다.
아니야, 헛짚었어. 형, 그건 아닌 것 같아.
들은 내가 속이 메슥거렸다.
우미호는 아예 무시했다. 무시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의 귀에 귀태 형의 목소리와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불멸의 감각으로 느껴도 그녀는 완벽하게 귀태라는 인간을 자신의 인지 영역에 두지 않음을 알았다.
형, 안 되겠어. 얘는 진짜 아니야.
호감을 떠나서 성격이 완전 까칠하다고.
"왜 덤비냐고."
우미호가 다시 물었다.
덤비냐니.
난 최근에 깨달은 회사 생활의 진리를 떠올렸다.
"야, 회사 생활 별거 없어."
적당히 거드름을 피우며 입을 열었다.
둘의 시선과 주변에 있는 불멸 몇의 귀가 쫑긋 선 게 보였다.
"시키는 거 잘하고 하지 말라는 거 안 하고."
지금 한 뻔한 말이 용의 몸을 그린 그림이라면 마지막 이 한 마디는 용의 눈이 되리라.
"상사가 원하는 거 딱주면 돼."
"……너희 팀장님이 너랑 대련을 원했다고?"
"정확히는 날 패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확실할걸.
첫날부터 지금까지.
중력 제어 훈련 이후로 암기 지옥, 훈련 지옥을 연 인간이다.
솔직히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 아니냐?
"너 삐졌어?"
우미호가 물었다.
"야, 나 사나이야."
그런 거로 안 삐져.
나 좀 싫어하고 욕한다고 주먹부터 나가고 그러지 않는다고.
대인답게 받아넘기는 그런 남자야. 내가.
"삐졌네."
귀태 형이 말했다. 이 인간 눈썰미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까 영 아니네.
"아닌데."
"맞네."
미호가 말했다.
"아니라고."
내가 다시 말했다.
"그래, 아니라고 치자."
"아니라고 치는 게 아니라, 아니야."
"그래, 아니라고 치는 게 아닌 게 아니라고 치자."
이게 무슨 말이야.
"풉."
그 말에 누군가 웃었다.
난 신입이자, 수습이다. 여기서 누가 웃었다면 선배나 동기겠지.
따져서 뭐 하겠나.
"야, 진짜 안 삐졌다."
그저 내 의견을 관철할 뿐.
난 틀린 의견에 동조하는 그런 비겁한 사람이 아니므로 끝까지 말했다.
"진짜 아니다."
둘은 대답하지 않았고 시간은 금세 지났다.
그러니까 오후 3시.
내가 팀장의 죽탱이를 후려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