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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21화 (21/488)

21. 난 사실 산유국의 왕자다.

"아들, 어땠어?"

첫날 퇴근 후였다.

훅 들어오는 어머니의 물음에 차마 상사 셋의 별명을 말할 순 없었다.

"네, 다들 잘해 주시네요. 깨끗하고 맑고 아름다운 분들이시고요."

하지만 어머니 눈치가 어찌나 좋던지, 단숨에 내 상태를 알아보고 말했다.

"첫날이고 그 사람들 눈에는 네가 마음에 안 찰 수 있어. 그렇다고 뒤에서 상사 욕하진 말고. 다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욕까진 아닌데 이미 뒷담화를 했지요.

"……벌써 했니?"

"욕까진 아니고요."

어머니는 눈치가 귀신이었다.

"아들."

"네."

어머니는 계속해서 심심한 위로를 건네셨다.

"너무 힘들면 관둬. 엄마가 네 일자리 하나 못 만들어 줄까."

화끈, 통쾌.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아니요, 아직 괜찮습니다."

침대에 누운 뒤, 하루를 곱씹고 나니 난 오기가 생겼다.

그 세 명, 나 모르잖아.

모르는데 무시했고 밀쳐냈으며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럼 알게 해주면 된다. 그래도 싫다면? 뭐, 다른 팀으로 옮기면 그만이겠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대범하게.

난 통 크게 생각하기로 했다.

인터넷 세상에서 봤다.

너무 힘들면 스스로 최면을 걸면 된다고.

나한테 회사 생활은 취미다.

난 사실 산유국의 왕자다.

왕자가 서민 체험하러 온 거니까.

그 세 명이 날 미워하든 말든, 귀여울 뿐이다.

나중에 왕자로 돌아간 뒤 만나면 얼마나 웃길 것인가.

하하하하핫!

망상은 곧 수면제였고 난 잠들었다.

* * *

하루하루 출근하고 점심 먹고 퇴근하고 반복하다 보니,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일주일이 지났고.

난 인명부를 다 못 외웠다.

하루 만에 외우는 건 진짜 무리라니까.

그거 때문에 욕을 좀 먹었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면 할 일 없는 내가 먼저 받는 경우가 많았다.

"네, 신입 사원 유광익입니다."

"어, 나 지원 1팀 박광순데, 김정아 좀 바꿔봐."

"네."

"선배님, 지원 1팀 박광순 대리님 전화 왔습니다."

"박광순 아니고 박광수, 대리 아니고 과장."

"……넵."

"머리도 안 좋네."

그걸 들은 팬더가 말하고.

"시발."

팀장은 중얼거렸다.

귀 밝은 불멸이 모인 곳이니 내가 하는 말을 저들도 듣고 저들이 하는 말을 내가 듣는 건 당연했다.

뭐, 그럴 때마다 난 생각했다.

난 사실 산유국의 왕자다.

하하하핫. 귀여운 것들.

"외워."

통화를 끝낸 얼음덩이 김정아가 말했다.

"네."

어떻게 목소리에 이렇게 감정이 없을까.

오롯이 일만 보는 선배다.

박광수 과장, 지원 1팀, 외우자.

그래도 이렇게 지나가고 나면 금세 외우긴 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머리가 좋긴 하니까.

인명부 외우고 전화 받고 전해주고.

식사는 팀원과 하는 게 일상이었다.

각 팀이 밥 먹는 시간도 달랐고.

귀태랑 요한도 언제부터 얼굴이 잘 안 보였다.

그래도 다른 동기들 얼굴은 간간이 보였다.

그중에 이름도 잊은 친구는 몰래 초코바를 주며 말하기도 했다.

"난 다른 지사 발령 났다. 또 보자."

코가 크고 잘생긴 친구였다.

혼혈이었는데 이름은 까먹었다.

"고맙다."

난 수수하게 어깨를 두드려주고 작별했다.

아마도 평생 이름은 기억 못 하겠지.

미안하다. 친구야. 요새 회사 인명부 외우는 데 모든 뇌세포를 쓰고 있단다.

가능하다면 정기남이나 우미호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 둘 대신 인명부의 새로운 이름을 넣고 싶은 심정이란다.

한 달 뒤에 회사 전체 회식이 있다고 했고.

그 외 딱히 큰 변화는 없었다.

아, 우리 팀의 각 세 명에 관해 말해주는 선배가 좀 많았다.

"니가 그거지?"

손날로 목 뒤를 툭툭 치는 시늉을 하며 말하는 보안 2팀 선배가 말했다.

시발 팀장, 팬더 대리, 얼음덩이 선배가 다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어딜 갔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외부 일을 보러 간 틈이다.

"네, 아, 네."

난 선배가 목 뒤를 치는 걸 보고 금세 깨닫고 답했다.

오티 때 동기 목에 넥 슬라이스를 박아 넣은 효과가 여기서도 빛을 발한 거다.

"버티기만 해. 그럼 배우는 거 많을 거다."

혼혈로 보이는 선배는 그리 말하고 콧잔등을 찡긋했다.

다행히 이름을 외운 사람이라.

"네, 감사합니다. 변수근 대리님."

변수근 대리를 통해 난 우리 팀의 이력을 대강 알았다.

일단 팀장, 내가 시발 팀장이라 부르는 이 양반의 이름은 이중봉.

직급 팀장.

우월주의 따위 없는 순혈.

특이점이 있다면 화림 내 격투 레벨 최고라는 것.

그러니까 S클래스 대인 격투 능력의 명실공히 화림 최고의 무투가다.

그리고 팬더, 이름은 이동훈.

직급 대리.

혼혈.

이쪽은 격투 능력이나 사격술이 형편없다고 한다.

그 대신 자기 분야에 특화된 천재라고 하는데 아직 난 모르겠다.

상황 발생 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자신에게 없는 격투 재능은 일찌감치 포기한 뒤, 머리 굴리는 쪽에 전력을 다하는 타입이란다.

실패한 혼혈이라는 둥, 말이 많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대신 항상 새해 목표가 결혼하는 거라는 건 알았다.

애니메이션도 좋아한다고 한다.

TMI다.

하지만 또 이런 정보가 도움이 되긴 했다.

"여자 소개해 주면 너한테 깜빡 넘어갈걸."

변수근 대리가 그리 말했지만, 난 내심 고개를 저었다.

소개팅은 잘 될 때야 효과가 백 배지만, 그 반대가 되면 최악의 한 수가 된다.

그러므로 택하면 안 될 수다.

대망의 마지막, 이름은 김정아.

직급 사원.

비약 인간이다.

화림에는 순혈, 혼혈, 인간 셋이 다 모여 있었다.

다른 지부에 가면 변신족도 좀 있다고 하는데.

하여간 여기에는 저 셋이 전부다.

그리고 인간은 아주 드물었다.

그 드문 인간 중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게 바로 김정아였다.

실제 군부대, 그것도 특수부대 출신이란다.

격투 능력 A클래스.

시발 팀장을 제외하면 손에 꼽히는 재원이란다.

사격술도 보통은 된다고 해서 B클래스.

불멸 사이에 있어서 B클래스지, 사실상 인간으로서는 최고 수준일 거다.

그녀에 관한 정보는 적었다.

"옷에 각을 정말 잘 잡아."

변수근 대리가 그리 말하고 끝냈으니까.

그건 내가 눈으로 봐도 알겠다.

그렇게 정보를 얻고 하릴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전체 회식, 그러니까 사원 전부가 모인 회식을 하고 나면 기숙사라 불리는 개인 숙소도 배정해 준다고 했다.

그날부터는 집에서 나와 사는 거다.

독립이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걱정이 앞서기도 하고 그랬다.

"오늘 훈련이지?"

팬더가 모니터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네, 보안 3팀은 오후 2시부터입니다."

"보나 마나 꼴등이겠지."

난 귀를 쫑긋 세웠다.

시발 팀장이 저리 멀쩡하게 말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뭐가 꼴등인데, 설명 좀 해 줘.

나만 모른다.

슬쩍 얼음덩이 선배를 보자.

선배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나마 이 양반이 있어 다행이지.

"오늘 오후부터 신입도 훈련 코스에 참여한다."

"네."

회사 사람들은 업무 시간 외 대부분 시간을 자기 단련에 힘쓴다.

그만큼 회사 일이 고되다는 거겠지.

그 단련과 훈련 중에 모든 팀이 참여해서 테스트를 보는 것도 있었다.

나름 복지 정책 중 하나다.

줄 세우기까진 아니지만, 여기서 1등 하면 포상금이 나오다 든지, 팀 전체에 혜택이 내려오는 그런 구조란다.

정확히 어떤 훈련을 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가보면 알겠지.

그렇게 오후 2시에 맞춰 보안 3팀, 날 포함한 넷은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갖가지 시설을 갖춘 훈련장이다.

칼날 구보, 완벽한 방음 시설을 갖춘 사격장을 비롯해 다양한 시설이 갖춰진 곳이었다.

"보안 3팀이죠?"

"네. 3팀입니다."

팀장이 대표로 답했다.

승강기에서 내려 한쪽으로 향하니 거기에 큰 원통 형태의 방이 보였다.

두꺼운 전선 다발이 연결된, 모니터 여덟 개가 그 안쪽을 비추는 방이었다.

이건 무슨 용도지?

모니터 위로 전자시계 같은 액정에 2G라는 글씨가 보였다.

뭔가 싶어 보는데, 확대된 모니터 화면에 아는 얼굴이 보였다.

정기남이다.

개싸가지 동기가 그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팔굽혀펴기 중이었다.

저 자식 몸 쓰는 것도 잘했지.

나와 비교하는 건 저 새끼한테 너무 가혹했지만, 어쨌든 쟤도 좀 하는 편인데.

겨우 팔굽혀펴기에 땀을 과하게 흘린다.

"몸 풀었지? 높인다."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관리자가 보였다.

정기남의 팀원으로 보이는 이들과 대강 인사하는 팬더 옆에서 나도 입을 열었다.

"신입 사원 유광익 입니다."

"응. 그래."

기남의 팀장은 실내에도 선글라스를 끼는 사람이었다.

선글라스 성애자인가 보다.

관리자 옆에 선 우리를 안내했던 남자가 말했다.

"이건 중력 제어 장치입니다. 잘 아실 테지만, 게이트 너머에서 찾은 신문물이 들어간 기술로……."

"다 아는 얘기를 해서 뭐해?"

팬더가 말을 끊었다.

둘은 아는 사이로 보였다.

"신입 있잖습니까."

"짧게 해. 짧게. 효율적으로."

다 듣고 싶다. 팬더 새끼야.

"네, 그럼 뭐. 들어가면 중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충 현재 기록으로 보면 최대 9배네요. 테스트는 간단한 기록 몇 개로 합니다. 제자리 뛰기 열 개, 팔굽혀 펴기 열 개, 손을 벽에 대고 달리기 세 바퀴. 어렵지 않죠?"

말하며 살짝 웃는데 이쪽도 보통의 미모는 넘어서는지라, 밖에서 저렇게 웃으면 여자 여럿 실신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화림 안에서 보기에는 일상이다.

"팀장님은 저번 기록 갖고 계시니 넘어간다 치고 이동훈 대리님?"

"기권."

"정아 씨는요?"

"저번 주에 했습니다."

"아, 맞네? 이쪽도 신입만 하면 되겠어."

나만 하면 된단다.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버티네. 4G까지 해봐."

관리자가 말하고.

"우리 기남이 5G도 버틸 거다."

선글라스 팀장이 거들었다.

"그럼 5로 갑니다."

새삼 화림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신문물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올드포스, 세계 정부 연합이 지닌 기술 일부겠지.

신기하긴 했다.

어떤 원리인지 안에 들어가면 중력이 늘어난다니.

모니터를 보자니 노이즈 같은 게 보이는 것 같다.

아지랑이가 여러 겹이 쌓여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그와 함께 기남의 얼굴이 못생겨졌다.

피부가 밑으로 쏠려서 평소의 그 잘난 얼굴 대신 잘못 늙은 기남이 그곳에 있었다.

쭈글쭈글해졌어.

"풉."

나도 모르게 외마디 웃음을 토했다.

"……재밌나 보네."

그걸 들은 얼음덩이 정아 선배가 날 보고 말했다.

그 한 마디가 날 선 칼 같다.

"주둥이 다물고 보자."

"네."

선배의 말에 답하고 앞을 보니.

눈깔을 뒤집는 기남이 보였다.

5G 상태에서 아까 말한 팔벌려뛰기와 푸쉬업, 런닝 등을 소화해야 하는데 하다가 호흡을 놓쳤는지 헐떡이지도 못하고 바닥에 풀썩 쓰러진다.

그러더니 곧 눈깔을 뒤집어 깠다.

기절이다.

침도 흘렸다.

또 웃을 뻔했네.

"실신입니다."

"그러네."

지켜보는 이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장치를 껐다.

불멸, 그것도 순혈 불멸자다.

저 정도로 죽을 리가 없다.

잠깐 정신을 잃었지만, 곧 멀쩡하게 돌아다니겠지.

"네 차례다. 웃는 얼굴 잘 유지하고."

팬더가 내 등을 떠밀었다.

"하, 저 새끼가 우리 팀에 왔어야 했는데."

팀장은 기남을 향해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 나도 그랬으면 했지.

나도 다른 데로 가고 싶었지.

이럴 때마다 난 속으로 되뇌었다.

난 산유국의 왕자다.

나한테 이건 취미 생활이다.

그런데 저 중력 제어는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걸까.

"몸은 가볍게 풀 거고, 들어가면 일단 호흡부터 잡아. 마시고 내쉰다. 가능하면 2초 동안 마시고 2초 동안 내쉬고. 안 되면 1초 단위로 하고 너무 급하게 하면 기절하니까 조심하고."

안내 사항을 다다다 말한 이름 모를 선배인지 대리인지를 뒤로 하고 중력 제어실에 들어갔다.

퓨슉!

문 열리는 소리가 SF 영화에서 많이 들었던 효과음이었다.

들어가니 텅 빈 방처럼 보였다.

밖에서는 안이 보였지만, 안에서는 밖이 보이진 않았다. 카메라 렌즈로 추정되는 검고 작은 점 몇 개가 박혀있는 게 전부인, 온통 하얀 페인트를 칠한 방 같다.

"몸부터 푼다."

머리 위 장착된 스피커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몸에 적절한 압력이 가해졌다.

이런 기분이구나.

누군가 몸을 감싼 채 누르는 것 같았다.

딱히 압박이 강력하다는 기분은 안 들어서 움직였다.

팔 벌려 뛰기부터 기초 코스를 끝냈다.

방 내부로 관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제대로 시작한다. 너무 일찍 끝나면 아쉬우니까 최대한 버티고."

관리자도 큰 기대는 없나 보다.

난 고민했다.

불멸의 육체라면 아까 기남이처럼 훅 가는 게 정상인데.

나도 그래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어디까지 버틸까?

보이진 않지만, 우리 팀원 셋이 날 보고 있을 거다

아무런 기대감도 없이.

그걸 생각하니 또 오기가 솟네.

딱 기남이만 넘자.

아까 시발 팀장이 개싸가지 개나리 정기남을 탐냈잖아?

그럼 내가 걔보다 조금 나아지는 거지.

딱 거기까지만 하자.

그리고 중력 제어 훈련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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