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찍혔다.
여기서 사장이 왜 튀어나와.
나올 거면 연설할 때나 왔어야지.
"다들 앉자. 벌서는 것도 아니고."
경례를 받은 사장이 말했다.
날 포함해 모두 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훈련은 재밌었나?"
"네!"
재미없었다.
어느 누가 제 몸을 잘라내고 회복하는 걸 즐기겠나.
체력의 한계를 보는 걸 누가 좋아하고.
나이프 파이팅이나, 맨손 격투를 배우며 뼈 부러지는 경험을 하는 게 뭐가 신나겠나.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다.
물론 나는 아니다.
난 적당히 즐겼다. 변신족의 육체는 날 맨손 격투의 달인으로 만들어 줬으니까.
나이프 파이팅을 가르친 단발머리 교관은.
"이쪽에 재능 있네."
이리 말하기도 했다.
사장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구라는."
찔끔.
"재미는 뭐가 재밌어. 제 몸 잘라내고 회복하는 거 아프기만 더럽게 아프지."
공감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도 눈치 없게 고개 끄덕이는 놈은…….
요한이 귀태의 팔을 툭 쳤다.
방귀태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우리 귀태 형, 앞으로 회사 생활 고달프겠다.
사장이 그런 귀태 형을 보고 말했다.
"솔직한 친구도 있고 좋네."
그 말에 우리 방귀태 선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열심히 해. 그게 너희 목숨을 구해 줄 거다. 믿어라. 유경험자의 말이니까."
패드에서 본 그의 정보를 떠올렸다.
남명진.
화림 정보 통신의 사장.
1973년생.
군부대에서 약 8년 동안 비상 작전팀에서 근무한 군 유경험자.
맨손 격투의 달인.
1999년의 테러블 이어부터 현재까지 불멸의 역사를 함께한 인간.
1세대 불멸자.
그리고 직접 보니 성격은 장난기가 있어 보였다.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로 사장은 말했다.
"정기남."
"네. 신입 사원 정기남."
상급자가 부를 때는 관등성명을 댄다. 지금 우리는 신입 사원이니, 저리 말하는 게 맞다.
역시 엘리트.
2등의 품격에 맞게 흐트러짐이 없다.
술 몇 잔 한 거 봤는데 얼굴색도 변함이 없고 미모도 변함이 없다.
그래도 싸가지는 여전히 없겠지.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사장이 기남과 손을 맞잡았다.
가벼운 악수다.
"우미호?"
다음은 1등.
우미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맞잡는다.
"신입 사원 우미호."
"기대가 크다."
"감사합니다."
특별 대우는 2등까지다.
사장은 다들 수고했다고 말하고 나머지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근데 왜 왔지.
인사치레로? 1등하고 2등 얼굴 보러?
역시 사장이란 자리는 한가한 걸까?
사장이 가면 난 소맥을 말아서 몇 잔 마실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바비큐도 먹어야지.
흐르는 기름과 함께 쫀득한 지방을 씹어 주리라.
잡생각을 하며 자연스레 감각을 무디게 해 둔 상태였다.
"유광익 사원."
그래서 듣고 인식하는 게 한 박자 늦었다.
"……신입 사원 유광익?"
아 씨, 끝에를 올려 말했네.
앞을 보자, 사장이 날 보고 진득한 미소를 보였다.
"혼혈이네."
사장이 말했다.
이제까지 악수 외에 딱히 개인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 날 보고 말을 건다.
뭐지, 이 어색한 공기는.
"네."
혼혈이죠. 아버지는 불멸, 어머니는 변신, 하지만 비밀.
"흐음. 나쁘지 않아."
사장이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지만, 저 정도로 말하면 옆 방에 있는 놈들도 다 들을 거다.
이곳은 불멸이 모인 훈련장이니까.
"스물?"
"네."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사장의 눈이 내 전신을 훑었다.
가만 있어 보자. 어디서 많이 느껴 본 느낌적인 느낌인데.
불멸 과외 선생이 내 칼날 구보를 봤을 때랑.
변신 과외 선생이 외줄 타기 하는 날 봤을 때.
그리고 지금.
세 가지 장면의 공통점을 찾으시오. (주관식 4점)
정답!
나한테 과한 관심의 눈길을 보인다는 거다.
"좋네. 한창 일할 나이니까."
안 좋습니다. 사실 애인을 만들고 싶거든요.
예쁘고 요염한 현모양처에 글래머인 여자친구가 필요합니다.
"회사에서 봅시다."
사장이 말하며 나한테 눈을 찡긋했다.
남자 윙크는 처음 받아 봤다.
물론 여자의 윙크도 받아 본 적 없다.
사장이 어찌나 잘생겼는지, 우리 잘생긴 개나리 정기남만큼 잘생겼다.
덕분에 윙크가 어색하지 않았다.
난 같이 윙크로 답을 해 줘야 할지, 아니면 손가락 하트로 답을 해 줘야 할지 고민했다.
"그럼 갑니다. 그리고 선물 놓고 가니, 적당히 취하시고."
다행히 내 대답을 딱히 듣지 않고 사장이 떠났다.
두 가지 방법 다 그리 좋은 대응은 아니었겠지.
술이라도 선물해 주나 싶었다.
사장이 나갔다.
"너 뭔데? 혹시 사장의 숨겨진 아들 같은 거야?"
요한이 물었다.
특종을 잡은 기사처럼, 우리 떠벌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처음 보는데."
"그럼 뭔데? 왜 너한테만 말 걸고 윙크하고."
귀태 형이 말을 이었다.
염병, 나야 모르지.
설마 내가 사장님의 취향인 걸까.
"사장님 결혼했지?"
슬쩍 물으니.
"슬하에 딸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요한이 답한다.
우리 요한 형은 이런 정보는 어디서 구하는 걸까.
패드에도 없는 건데.
내가 오티 내내 좀 과하게 행동한 걸까.
내가 이들에게 보여 준 건 친화력과 협동심, 그리고 배려였다.
인기투표로 1위를 뽑았으면 그건 내 자리였을 거다.
딱히 엄청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닌데, 관심이 과하긴 하다.
예상은 했지만, 파랑새를 포함해 모두 날 데려가고 싶은 눈치였고.
거기에 사장의 눈도 붙었다.
이게 좋은 걸까?
"운 좋네. 이번 기수."
파랑새가 말하며 사장의 선물을 방에 넣었다.
"적당히 해라. 내일 아침까지 맛탱이 가 있으면 버리고 갈 거니까."
설마 술 몇 잔에 그럴까.
정 술기운이 과하다 싶으면 피 좀 과하게 흘리면 그만이지.
요한에게 들은 건데, 그게 불멸의 숙취 해소법이란다.
역시 불멸자는 몸을 무식하게 굴린다.
"술 아닌데."
혹 먹을 건 아닌가 기대하던 비만 불멸자 강푸름이 앞으로 나가 박스를 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박스다.
테이프를 잡아 뜯어 꺼내니.
"……와."
귀태가 감탄을 터트렸다.
"한 사람당 하나씩."
파랑새가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박스 안의 물건, 난 처음 보지만, 이미 경험한 사람도 몇 명 있어 보였다.
"마인드 칵테일이다."
요한 형이 말하며 나가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패드를 통해서 받은 교육이 그걸 알아보게 했다.
마인드 칵테일.
일명 향정신성 약물.
보통은 중독이 되며 인체에 큰 데미지를 남기는 물건.
하지만 적정량을 복용한다면 불멸의 육신은 저 약을 완벽하게 해독해 버린다.
고로, 중독 증상도 없다.
그러하기에 술보다 효과가 더 좋은 것.
형태는 대충 세 가지로 나눈다.
액상형, 알약형, 젤리형.
지금 요한 형이 꺼내 흔드는 건 캔 음료 형태로 만들어진 액상형.
상호 하나 없는 밋밋한 은색 캔 위로 한글 정자로 딱 세 글자만 적혀 있었다.
블런트.
종합해서 말하자면, 사장은 우리에게 마약을 선물하고 갔다.
스케일 한번 미치게 화끈하구나.
양주나 오래 묵은 와인도 아니고, 신입 사원 오티 선물로 마약을?
만약 여기에 불멸이 아니라 일반인이 모인 회사였다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겠지만.
다행히도 여기는 불멸자만 있었다.
딱.
기남이 먼저였다.
얼마나 예민한 새끼인지, 밤 중에 누가 몸만 틀어도 잠에서 깨는 것 같더라.
새벽에 오줌 싸러 가는 길에 일부러 슬리퍼 바닥을 질질 끌면서 가니, 그때도 깨더라.
괴롭히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슬리퍼는 본래 끌면서 신으라고 배웠다.
그게 정석 아닌가.
꿀꺽! 꿀꺽!
기남이 음료를 세차게 마신다. 효과는 직빵이었다.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볼이 불그스름해진다. 기남은 그대로 이불로 들어갔다.
"재수 없는 새끼."
응? 근데 왜 자기 직전에 날 똑바로 보고 저렇게 말하지.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기남은 잠들었다.
"치사한 새끼가 치고 빠지네."
내가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
요한 형이 캔 음료 세 개를 쥐고 오면서 말했다.
"그동안 좀 괴롭혔냐? 너 밤중에 매일 화장실 가는 거 일부러 그랬지?"
"내가? 아닌데."
자다가 소변보는 건 훈련소에서 정기남을 보고 생긴 버릇이지.
절대로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웃기시네."
그동안 부쩍 친해진 요한 형이 음료를 건넸다.
딸깍하고 까서 슬쩍 향을 맡으니.
그냥 맹물 향이다.
이게 그렇게 효과가 좋나.
블런트는 어린 불멸이 가장 사랑하는 마약이다.
마시면 감각을 무디게 해 준다고 하니까.
패드에도 나온 물약이다.
블런트 - 액상형.
감각 전체를 무디게 해 주는 효과가 있다.
고통 경감과 함께 몸을 나른하게 풀어 준다.
먹으면 길면 6시간, 짧으면 4시간 동안 몸의 감각이 흐릿해지기에 불멸이 가장 사랑하는 마약이다.
이렇게 말이다.
그러니 저거 먹고 푹 자라는 배려다.
어지간히 먹어도 중독 증상이 없고, 이걸 베이스로 몇 개를 섞어 만드는 마인드 칵테일은 훌륭한 전투 보조 마약이 된다고도 했다.
쉬이 접할 순 있지만, 자주 먹을 순 없다.
중독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더럽게 비싼 약이었다.
순도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지만, 캔 하나당 최소 삼백만 원부터 시작한다.
순도가 좋은 거로 구하면 오백은 가뿐히 넘긴다니.
"난 왜 이게 아깝지."
내가 말하자, 귀태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운데 몰래 팔다 걸리면 알잖아."
불멸을 위한 약이다. 팔다가 걸리면 국물도 없다.
그래, 마시자.
막 입에 대려는 데 우미호가 다가왔다.
우리 싸가지가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그동안 고마웠어."
날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지만, 그동안 지켜본바 심성이 나쁜 친구는 아니다.
그냥 저밖에 모르는 인간일 뿐.
생각해 보니 나쁜 새끼네.
남도 좀 배려하고 살아라.
한마디 해 줄까 하는데.
"이건 보답."
흠칫했다. 보답이라고 하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다.
뽀뽀라도 할 것 같지 않나.
"안 돼.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귀태 형이 옆에서 말했다.
우미호는 그걸 힐끗 보다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받아."
그녀가 손에 쪽지를 쥐여 줬다.
그러곤 돌아서서 블런트를 원샷했다.
술은 안 마시지만, 효과 좋은 마약에는 약한 여자였구나.
"설마. 아니지."
귀태가 날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아니지?"
"형, 포기하라니까."
요한이 옆에서 그를 위로했다.
"아니, 생긴 걸 봐. 내가 포기하게 생겼나."
귀태가 내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새끼가, 제 얼굴 생각 못 하고.
우리 정도면 매우 잘생긴 편이지만, 순혈 사이에서는 보통 수준밖에 안 된다.
우리 둘이 싸워 봤자 도토리 키 재기다.
슬쩍 쪽지를 봤다.
우리 개싸가지 우미호 양은 사실 나 같은 남자가 이상형일까?
아, 이래서 인기 많은 남자는 괴롭지.
우리는 안 어울려.
난 이상형이 있는데 넌 아니란다.
이런 말로 설득해야지.
쪽지 내용은 단순했다.
예상하던 사랑 고백이나 연락처는 없었다.
<남명진 사장, 신입 들어오면 기수에 몇 명 찍어서 계속 지켜보는 버릇이 있다고 했어.
그걸 통과하면 사장 라인을 타지만, 반대로 기대에 못 미치면 꽤 힘든 생활이 된다고 했어. 조심하는 게 좋아.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
정보였다.
남명진 사장의 버릇, 말하는 뉘앙스에서 이것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는 냄새가 풍겼다.
뭐냐,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냐?
친한 선배라도 있는 건가.
어쨌든 이 쪽지를 토대로 보자면, 내가 찍혔다는 거겠지.
사장이 찍은 사람이 나라는 거잖아.
1등, 2등 외에 굳이 날 보고 말을 걸고 갔으니 확실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회사 생활이 아름답지만은 않을 거라는 건가.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맨정신으로 못 듣겠다."
귀태가 말하며 블런트를 원샷으로 넘겼다.
목울대가 꿀렁꿀렁 움직였다.
"아니네."
내가 답했다.
"진짜?"
"응. 진짜."
"그럼 나도 보여 줘."
귀태가 말했다.
난 종이를 쫙쫙 찢어발긴 뒤, 손바닥으로 비벼서 엉망으로 만들었다.
"안 돼!"
이거 아무래도 우리 홈즈 양만 아는 사실 같거든.
"치사한 놈. 아니, 고맙다."
귀태가 눈을 흘기더니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배려 고맙다."
아니, 배려 아니야. 이 양반아.
"진짜 아니다. 방귀태."
진지하게 말했는데.
"남자 새끼."
약에 취한 기태가 말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요한이 타이밍 좋게 받아 침상 위로 슬라이딩시켰다.
익숙한 손놀림이다.
그동안 넥 슬라이스로 처리한 수면 장애자를 다룬 솜씨니까.
그걸 보며 나도 블런트를 마셨다.
쭈우우욱.
미지근한, 시큼한 향이 깃든 음료가 식도를 타고 위장에 당도했다.
그와 함께 몸 전신에 활력이 넘친다.
"후아!"
숨을 토해 내자, 그 숨결이 붉은 연기로 보였다.
뭐야 이거, 끝내주잖아.
이래서 불멸의 삼대 무기라는 말을 하는 거구나.
하나는 감각.
둘은 회복력.
셋은 마약.
감각을 무디게 한다더니, 진짜로 그랬다.
"좋아?"
"좋아."
요한과 내가 서로 마주 보며 말을 주고받았다.
나른함이 몸을 지배한다.
지금 자면 긴장도 전부 풀고 널브러질 수 있을 것 같다.
"자자."
요한도 옆에 누웠고.
블런트의 가장 큰 장점은 감각 둔화.
즉, 불멸 최고의 적인 불면을 잡는 약이었다.
요한, 귀태, 푸름까지.
전부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간다.
아무리 내가 넥 슬라이스를 날려도 블런트만큼 좋을까.
약과 함께 자면 완벽한 숙면을 취하게 된다.
나도 이불을 끌어 올려 몸을 감쌌다. 완전 포근하다.
눈을 감자, 떠난 사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눈빛이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너야? 너구나. 재밌네.
그런 눈빛이었다.
나 왜 찍힌 거지? 배려 좀 했다고?
그건 좀 과한 거 아닌가.
이런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문신남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주변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그런데 사장이 찍은 건 나다.
그래, 뭐, 어차피 할 거 높게 날면 그만이지.
블런트 효과가 전신을 잠식했다.
수마가 찾아온다.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난 눈을 감았고.
공식적으로 화림정보통신 오리엔테이션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