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내 꿈 꿔 볼 테야?
우리가 머무는 곳은 교실을 개조한 숙소였다.
앞뒤 문은 막아 버리고, 가운데 벽을 허물어 커튼을 달아 놨다.
그러니까 가운데 통로가 훤히 뚫린 가로로 긴 숙소란 말이다.
일렬로 놓인 간이용 침대를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을 딱 잡아 주는 고가의 매트리스는 바라지 않아도, 이건 좀 열악하네.
교관이 없는 사이, 한 달 동안 지내려면 몇 가지 규칙이 필요하긴 했다 생리현상 해결만 문제가 아니라 이거다.
일단 남녀가 유별함으로 생기는 트러블이다.
"훔쳐보지 마라."
셜록 홈즈 개나리가 말했다.
얼굴은 어지간한 걸그룹 옆에 세워 놔도 꿀리지 않을 미모지만, 난 이상하게 얘가 얄밉다.
"누가 본다고."
그래서 한마디 툭 던지니.
"이십 대 남자의 욕구를 가지고 눈앞에서 옷 갈아입는 여자를 안 본다는 건 성 기능에 문제가 있는 거다."
그걸 왜 날 빤히 보면서 얘기하냐?
나 문제없거든?
완전 왕성하거든? 거기에 미개봉이거든?
여길 만든 놈이 아까 그 교관 삼 남매인지, 아니면 회사의 다른 놈인지는 모르지만, 아예 생각이 없진 않았나 보다.
내부에 탈의실이 있었다.
‘피팅룸’이라고 예쁘게도 써 놨네.
작진 않았다. 애초에 교실이다. 열 명이 지내기에도 충분히 크다.
탈의실도, 같은 방을 쓰는 여자 셋이 같이 들어가도 충분해 보였다.
난 쓱 하고 룸메이트를 확인했다.
잘생긴 개나리, 셜록 홈즈 개나리, 방귀태, 김요한, 나.
여기까지 다섯이다.
그리고 눈매가 축 처져 강아지상인 미남, 미녀가 눈에 들어왔다.
많이 닮았네.
부부 아니면 남매다.
남자는 곱슬머리라 복슬이, 여자 쪽은 유난히 피부가 하얘서 흰둥이란 별명을 붙였다.
다른 여자 하나는 불멸자치고는 평범했다. 혼혈에 불멸의 피가 옅으면 저리된다고 방귀태가 말해 줬다.
그녀는 말이 없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타입으로 보였다.
요한은 그새 나머지 남자 둘과 말을 텄다.
한 명은 잘생겼는데 눈매가 너무 깊고, 이목구비가 굉장히 진했다.
진해도 너무 진해서 톡 건드리면 기름이 쭉 나올 것 같은 얼굴이었다.
거기에 적당히 까무잡잡한 피부를 보니.
"만수르."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뭐?"
누가 불멸자 아니랄까 봐 작은 목소리도 독수리가 병아리 채가듯 알아듣네.
"풉."
그 말에 흰둥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 이걸 알아들어?
느끼하게 생겨서 얼굴에 기름이 흐른다. 기름이 많으니 석유왕, 거기서 연상된 게 만수르다.
이걸 알아듣다니, 센스가 보통이 아닌데.
"뭐냐? 그게?"
"아니, 만수르 닮았다는 말 안 들어 봤어?"
"안 들어 봤다."
불쾌해 보였다. 더는 신경을 건드리지 않았다.
"응. 그래."
"내가 더 잘생겼지."
만수르가 중얼거렸다.
나름 제 얼굴에 자신감이 충만해 보였다. 그런 만수르도 개싸가지 생태계 파괴자 개나리를 볼 때면 주춤하긴 했다.
저 얼굴은 진짜 탈옥범으로 치면 신창원이요, 복싱 챔피언으로 보자면 메이웨더다.
마지막 한 명은 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한 친구다.
"친구, 숨쉬기 힘들지?"
옆에서 쉭쉭 하며 숨을 몰아쉬는데 굉장히 힘들어 보였다.
어림잡아 120kg의 거구에 아까 선착순에서 당당히 꼴찌, 그것도 압도적 꼴찌를 기록하고 아직도 숨을 고르는 친구다.
"괜찮아."
비만 불멸자라, 더럽게 안 어울리긴 하네.
얘는 어쩌다가 이리 살이 쪘을까.
"환복해."
밖에서 파랑새의 외침이 들렸다. 외침이라기보다는 평소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지만, 다들 불멸자다.
듣는 데 문제는 없다.
"훔쳐보지 마. 자를 거다."
셜록 홈즈가 말했는데, 뭘 자를 건지 주어가 빠졌는데?
여자 셋이 피팅룸에 들어가고 우리도 잽싸게 옷을 벗었다.
아우, 찝찝해.
땀 흘려서 샤워하고 싶은데, 지금 그걸 바라면 사치겠지.
난 금세 녹색의 칙칙한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 나간다."
말수가 적은 여자애다. 귀에 꽂히는 목소리다.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시절이었다면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요.
요즘 시대 말로 하면 음색 깡패다.
얘 목소리 죽여주네.
"와, 너 노래 잘하겠다."
내가 말하자.
"개수작 금지."
셜록 홈즈가 날 향해 입을 열었다.
……넌 나랑 전생에 원수였냐? 개수작은 무슨 개수작이야.
물론 아주 조금, 호의를 얻고자 한 말이긴 하다만.
"고마워."
음색 깡패 친구가 눈웃음과 함께 말하며 지나쳤다.
그래, 내가 응, 이상형이 명확한 사람이야. 절대 개수작이 아니라고.
셜록은 날 무시하고 지나쳤다.
쟤는 진짜 언제 시간 되면, 몰래 뒤통수 한 대 호되게 후려쳐야겠다.
"나와라."
파랑새의 말에 우리는 전부 움직였다.
밖으로 나오니 엉거주춤 서 있는 이들이 보였다. 그 앞에 키가 큰 파랑새 하나가 모자를 눌러 쓴 채 말을 이었다.
"본 교관 기준 좌측, 식당이다. 오전 7시, 정오, 오후 6시. 식사 시간이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음식 섭취가 안 되니 식사 시간 꼭 지키길 바란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밥 먹는 시간도 정해 놓는 거냐.
마침 정오다.
점심때였다. 안 그래도 내 몸 안의 위장님께서 식료품을 주지 않으면 위액으로 내 몸을 불태울 거라고 협박 중이었다.
"각 숙소 열 명이 한 조다. 앞쪽부터 1조, 여기까지 10조다."
이런 부분은 일반 회사 오티랑 비슷하네.
조 짜고 어울리게 하는 거.
"그럼 식당으로 이동. 줄 맞춰서 가. 각 조는 이 열 종대로 움직인다."
군대도 아니고 걸으며 제식 훈련이다.
감각이 탁월할 불멸자를 모아놓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왼발, 오른발까지 맞춰가며 걸었다.
식당에 들어가자, 푸짐한 식사가 우리를 반겼다.
순서대로 자리에 앉자, 그 식사가 상에 놓였다.
수육이었는데 양이 많았다.
불멸은 잘 먹으니까, 이 정도는 줘야지.
다행히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철칙을 교관도 지켰다.
먹고 돌아가려는데, 파랑새 중 하나가 우리 식탁 옆으로 다가왔다.
"3조 조장 정해라."
다들 눈치를 살필 줄 알았는데,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네가 해."
셜록 홈즈 개나리다. 그녀가 가리킨 건 잘생긴 개나리였다.
"왜?"
"네 혈통 그쪽이지?"
이게 무슨 개나리 까먹는 소리인가 지켜보는데.
"그럼 네가 해야겠네."
복슬이도 동의하고, 흰둥이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상관없다는 듯한 음깡과 돼지는 마지막까지 먹기 바쁘고.
귀태와 요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롯이 나만 손을 들어 물었다.
"쟤 성격 나빠 보이는데? 자고로 리더란 모두를 아우르는 포용력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게 너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고, 여기에 피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건 팩트지. 그러니까 네 의견은 무시하는 게 옳아. 조장은 이쪽."
셜록 홈즈는 교통정리를 잘했다.
강남 팔 차로 한복판에 던져 놓고 싶을 정도다.
내 의견은 무시당했다.
이 새끼들.
이제 2시간에서 4시간이 넘어감으로 진한 우정과 연대가 쌓인 귀태 형과 요한 형도 마찬가지다.
"너 자꾸 왜 나서냐?"
아니, 김요한 씨가 내 편은 못 들어줄망정 핀잔을 줬다.
아, 몰라. 그래.
니들 맘대로 해라.
먹고 대강 지킬 수칙을 외웠다.
별 건 없었다.
이곳의 일은 발설 금지고 퇴사는 자유라는 것과.
벌점이 50점 넘으면 경고, 100점 넘으면 자동 퇴사라는 거다.
바로 훈련할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다.
옷에 맞춰 싸구려 워커와 몇 가지 물건을 받아야 했다.
백 명이 우르르 몰려서 보급품을 받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갔다.
씻고 조금 쉰 뒤에, 저녁 먹으니 금세 저녁 시간이었다.
"간단한 교육 후, 취침이다. 각 방에서 모두 화면을 봐라."
숙소에는 전부 40인치 크기의 모니터가 있었다.
그 모니터를 켜니 라떼 대머리 교관이 보였다. 그가 의자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 이름을 모르고 온 놈은 없겠지?"
나 모르는데.
"우리 회사 이름이 뭐야?"
옆자리 귀태에게 묻자, 그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넌 아는 게 뭐냐?"
"내가 쾌남이라는 거?"
"미친 거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미쳐 있는 거야."
개소리에 답하는 대신 귀태는 회사 이름을 말해 줬다.
"화림정보통신."
아, 그래. 이름 한 번 듣기 어렵네.
"너희가 무사히 이 신입 사원 훈련 과정을 끝내면 화림의 정규 직원이 된다."
그 와중에도 라떼 교관은 계속 말했다.
공무원이지만, 정부에서 지원하는 회사의 정규직이란 거다.
철밥통이란 점은 공무원과 같았다.
아버지가 공무원 시험이라고 한 건, 아무래도 어머니 때문에 뿌린 연막 같았다.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거야, 똑같지.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냐? 나 때는 입사하려면 칼날 구보 통과하지 않고는 엄두도 못 냈는데."
그가 중얼거리더니 교육을 이어 나갔다.
아니, 이게 교육은 맞나.
"너희도 다 알면서 왔겠지? 입사해서 뒈지기 싫으면 잘 배워 둬라. 끝."
"그렇게 끝내게요?"
"다 알고 온 애들한테 뭘 더 말해."
"그래도 이건 아니죠."
화면 속에서 단발머리 교관이 나왔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화림의 목적은 명확해요. 여러분이 불멸의 힘을 바르게 쓰게 하는 거죠. 그걸 명심하길 바라요."
네. 알겠습니다.
속으로 답하니, 모니터가 암전됐다.
"다들 취침 준비."
이때까지만 해도 난 내일 하게 될 게 어떤 훈련일지, 기대감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조금도 몰랐다.
그렇게 해가 떨어졌다. 깨끗하게 씻고 누우니 나름 편안했다.
애초에 난 아스팔트 위에서도 잠들 수 있는 위인이다.
그리 누운 채 자려고 하니.
"조용히 좀."
"너 손가락 움직였지?"
"숨 쉬는 소리 어떻게 안 되냐?"
"꼼지락거리지 말라고."
이런 염병할 예민쟁이들.
나야 잘 수 있지만, 한방을 쓰는 놈들이 줄기차게 불만을 터트렸다.
"제발, 숨 좀 쉬지 마."
압권이다. 김요한 이 새끼야.
바로 옆자리에서 그리 부탁을 하다니.
"죽어 주랴?"
"어, 나가서 죽어 줘."
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불멸의 예민함은 불면일 때 극에 달한다고.
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 새끼들은 다들 각성한 지 3년 내외다.
보통 불면을 이겨 내는 데 필요한 시간이 최소 3년이다.
그것도 산에서 면벽 수련 급으로 시간을 보내야 가능한데.
여기서 최고령자는 방귀태(23)다.
"오늘도 못 자겠지."
그는 뜬 눈으로 천장을 보며 반쯤 포기한 채, 말을 뱉는 중이었다.
그동안 잠이 푹 든 적이 몇 번 없을 거다.
"아예 못 자면 생활은 어떻게 하냐?"
내가 묻자, 요한이 질끈 감은 눈을 뜨고 말했다.
"안 되면 최후의 수단을 쓰지."
"목이라도 잘라?"
농담 삼아 말하자.
"비슷해. 쇼크를 일으켜 기절하는 것도 방법이지. 우리야 뭐, 불멸이니까 후유증이 없잖아?"
그래, 기절하든, 뭘 하든, 며칠이면 낫긴 하겠지.
나도 그 비슷한 얘기를 듣고 오긴 했다.
"아들아, 사람들이랑 친해지는 거 쉽다."
"그래요?"
"응. 그냥 이유 없이 잘해 줘. 그럼 돼."
"선물 공세 같은 거?"
"정답. 역시 내 아들."
난 웹툰 미생과 드라마 미생을 전부 완독하고 정주행했다.
거기에서 동기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하던가.
"근데, 이게 쉬운 게 아니야, 힘이 과하면 다음 날까지 데미지가 남아서 이틀 뒤에 깨어난 적도 있어."
요한의 말을 듣고 내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자는 사람?"
"닥쳐라."
묻자마자 조장 개나리가 말했다.
우리 비만 친구까지 잠을 못 자고 헐떡였다.
안 그래도 예민한데 열 명이 한방을 쓴다.
애초에 이걸 노리고 한방에 넣어 둔 걸 거다. 불멸의 훈련 기본 요지는 언제나 같구나.
괴롭힘이다. 과외 선생에게 신물 나게 당해 봤다.
"재워 줘?"
내가 요한에게 묻자, 요한이 눈을 깜빡였다.
"야, 기절 수면도 아무나 하는 게……."
말해 뭐해.
휘릭, 단숨에 요한의 팔을 잡고 당겨 등 뒤에서 안으며 오른 팔뚝을 목 밑으로 집어넣었다. 팔꿈치랑 턱을 일치시켜 목과 팔 사이 공간을 제로로 만든다. 그리고 반대쪽 팔을 걸어서 당겼다.
아름다울 정도로 깨끗하게 들어간 넥 초크다.
"끅!"
요한이 버둥거리려는 걸 양발로 허벅지를 잡아 고정했다.
"잘자, 내 꿈 꿔."
귀에 한마디를 남기자, 요한의 눈이 까뒤집어졌다.
"……미친."
방귀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귀태 형이 놀란 이유? 내가 한 짓이 가학적이라? 아니지.
이들은 불멸이다.
적당한 힘으로 기절해서 잠들 수 있다면 오히려 축복인데.
방금 내가 쓴 그라운드 기술과 완벽한 힘 조절에 놀란 거다.
변신족 훈련받으며 그라운드 기술 배운 보람이 있었다.
무엇보다 변신족 육체를 다루는 나에게 허약한 불멸 기절시키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힘 조절도 마찬가지!
고로, 난 이들에게 안전한 수면제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
"귀태 너도 내 꿈 꿔 볼 테야?"
"오, 완전, 네 꿈 꿀래."
귀태도 꿈나라로 보내고 하는 김에 강아지 남매와 비만 친구, 음깡도 보내고 나니, 둘이 남았다.
자, 잠들 거냐, 아니면 자존심을 세울 거냐?
개나리 둘이 날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