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오리엔테이션은 훈련이다.
오리엔테이션이 뭔가.
쉽게 말하자면 ‘신규 채용자 적응 훈련’쯤 될 거다.
빔프로젝터를 스크린에 쏴서 도표 따위를 보여 주며 역사 좀 소개하고.
그동안 회사가 이룩한 일도 좀 보여 주는 거다.
알지? 우리 회사 이만큼 잘난 거?
요 한마디를 거창하게 준비해서 보여 주는 거다.
그다음에 신입 사원이 알아야 할 회사의 이념과 가치관 따위 배운 뒤, 앞으로 뭘 배우고 어떤 부서에 지원할지 대강 알려 주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아침에 차 오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대강 검색도 해 봤다.
상사 소개도 하고 규정도 알려 주고, 그걸 토대로 쪽지 시험을 하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 모든 예상을 깨 버렸다.
"오열 종대 집합."
단상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다들 우르르 뛰었다.
색색으로 물든 캐리어를 끌며 모인 이들이 어설프게 열을 맞춰 섰다.
와, 이게 몇 명이야?
얼추 백 명은 되지 않으려나?
많이도 뽑았다.
방귀태가 내 오른쪽, 김요한이 내 뒤였다.
둘 다 숨을 헐떡였다.
거, 그거 좀 뛰었다고 이 모양이냐?
"지금 저기서 여기까지 뛴 건데 헐떡이는 거야? 이거 진심이냐?"
단상 위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한 말이었다.
목소리가 귀에 딱딱 박혔다.
구면이다. 선택형 대머리 시험관이었다.
선글라스를 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하는 걸 들어 보니 화사하게 웃고 있진 않을 듯싶다.
나머지 둘도 아는 얼굴이었다.
시험장과 면접장에서 본 귀여운 단발머리 누나.
면접관으로 나한테 이상한 질문만 골라 했던 빨간 머리의 양초남.
셋 다 복장은 비슷했다.
얼룩덜룩한 황토색 카고바지에 진녹색 바람막이, 선글라스와 까만 캡모자다.
누가 봐도 교관이다.
내 바로 옆으로 비슷한 복장에 파란 모자를 쓴 여자가 지나갔다.
얼굴은 예쁜 편이나, 표정이 딱딱한 돌멩이 같았다.
이거, 분위기 진짜 왜 이러는데.
나만 당황했다.
다들 알고 들어온 듯, 태연했다.
아니, 태연한 건 아니고 적당히 긴장했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너희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힘을 써야 하는데, 본 교관은 시작부터 실망이 크다."
대머리가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이따위 체력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뭐라는 거야.
"전원 뒤로 돌아."
확성기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곳에는 혼혈이라고 해도 전부 각성한 불멸자가 모인 곳이었다.
모기처럼 말해도 대충은 듣는 그런 특수종이 모인 곳이었다.
그의 읊조림에 전원 뒤로 돌았다.
제식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대강 뒤로 돌았다.
나도 그랬다.
"삼 형제 나무 보이나?"
보였다. 높이가 다른 나무 세 그루.
"선착순 열다섯."
과외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리 쉽게 상황을 받아들일 순 없었을 거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지만, 이게 뭔지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이름은 오리엔테이션이지만, 이건 훈련이었다.
"뛰어."
파란 모자 보조 교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전부 달리기 시작했다.
파바박.
다들 열심히 달렸다.
방귀태와 요한도 열심이고, 개나리 두 송이도 멀리 있지 않아 볼 수 있었다.
필사적이네.
뛰라는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이 사태를 깨달았으며, 동시에 여유가 생겼다.
뛰란다. 그러니까 달리기를 하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외발로 뛰어도 중간은 갈 거다.
선착순 열다섯이라고 했지?
그럼 열네 번째 쯤으로 들어가면 되겠네.
적당한 속도 조절과 들으라고 해 주는 헉헉 소리도 섞어 줬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어디서든 변신의 일족임을 걸리지 말라고.
"걸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귀찮아."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다.
왜냐, 내가 가는 곳이 진짜 나랏일 심부름꾼을 뽑는 자리가 아니라 불멸 일족이 모인 곳이니까.
그렇다고 설명할 수가 없다는 걸 알아, 그저 일반적인 범주 내에서 물었다.
그래서 들은 한마디다.
"일반 사람이 보기에 변신족의 본능이 뭐로 보이겠니?"
한 번에 이해가 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잠재적 살인마 또는 강간마.
그중에 나름 멀쩡해도, 나체로 활보하며 울부짖는 놈쯤 된다. 걸리면 안 좋다. 퇴사 처리가 될지도 몰랐다.
내 꿈의 직장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건 곤란하지.
그래서 열네 번째, 선착순으로 들어갔다.
"안 되겠다. 너희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기본조차 되지 않았는데 뭘 하겠냐."
그 말에 움찔하는 놈이 몇 명 있었다.
"꼬아? 안 되겠네. 엎드려."
엎드려서 푸쉬업.
하나에 ‘나는’, 둘에 ‘병신이다’.
푸쉬업은 식상했으나, 구호는 신박했다.
"으으, 씨."
내 뒤의 뒷자리, 그러니까 김요한의 뒤다. 대략 스무 개쯤 푸쉬업을 하자, 그곳에서 중얼거린 한마디다.
"전원 정지."
엎드린 채로 멈추자, 탁탁 소리가 들렸다.
내 눈앞으로 황토색 카고바지가 스쳐 갔다.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요새는 훈련 첫날 교관한테 욕을 하네?"
"아닙니다!"
"소리 지르지 마라, 혼혈. 여기 순혈 고막을 다 찢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아니면 인성에 문제가 있어서 다른 동기를 괴롭게 하는 게 목적인가? 하나."
"안 내려가?"
파랑새가 주변을 돌며 하나에 맞는 행동을 요구했다.
"……나는."
타이밍이 조금 어긋났다. 멍하니 듣다가 반 박자 늦었다.
"정신 안 차리냐? 놀러 왔어?"
파란 모자 교관이 돌아다니며 우리를 독려했다. 위로 고맙다.
"소리 지르지 마라. 우리는 전부 조용히 얘기한다. 그게 기본이다."
"네."
"나 때는 바로 퇴교였을 텐데, 요즘은 세상이 좋아졌지. 선택지를 주마."
으그그극.
양옆에서 신음이 들렸다.
불멸의 육체는 허약하기 짝이 없어, 겨우 이 정도에 신음이 흘러나온다.
나? 나는 힘든 척하면서 귀로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구경 중이다.
직접 볼 수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지.
"퇴교할래? 아니면 체벌 감당할래?"
"체벌 받겠습니다."
"후회하지 마라."
"안 합니다."
그 와중에 뻗대기는.
우직.
대머리는 주저가 없었다. 소리만 들렸지만, 알았다. 팔뼈를 부러뜨린 거다.
"끄아……."
텁!
"잘했다. 파랑새."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 하나 자세 그대로 뒤를 힐끗 봤다.
파란 모자 교관이 부러진 팔의 훈련생의 주둥이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대머리 교관은 워커를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소리 지르지 말라니까, 말 안 듣네. 나 때는 안 그랬다."
미친놈이구나.
팔 부러뜨려 놓고 소리를 지르지 말라니.
그게 얼마나 아픈데.
아, 난 잘 참는구나.
통각 조절도 조절인데, 과외받으면서 어디 한두 번 부러졌어야지.
아프긴 해도 사실 저거 참을 만한데.
부러진 팔을 붙잡은 훈련병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딱 거기까지 보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걸리면 안 좋지.
그리 생각하며 슬쩍 전방을 주시하는데, 단상 위에 있던 양초남과 눈이 마주쳤다.
봤을까? 봤겠지.
별말은 없었다. 이건 넘어가나 보다.
"지금부터 말한다. 규정을 어기면 체벌은 골절부터 시작한다. 그러니, 마음껏 어겨도 좋다. 큰 소리를 내면 벌점 1점, 욕설을 뱉으면 벌점 2점, 허가 없이 싸우면 벌점 5점, 그 외 자잘한 건 알아서 체크해라."
자박자박.
대머리가 걸으며 말했다. 그가 내 옆을 지나며 읊조렸다.
"구경하면 재밌나? 훈련생?"
아니요. 재미없습니다. 본 줄 몰랐는데, 다 봤구나.
난 못 들은 척했다.
그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그렇게 다시 단상으로 올라갔다.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지금의 너희는 체력이 형편없다. 일어서. 선착순 열다섯 너희라고 다를 거 없다. 내 이름은 이장모, 현 시간부로 너희는 날 이장모 교관님으로 지칭한다."
말하고 한 걸음 물러나자 단발머리가 나섰다.
"이장모 교관님은 여러분의 기초 체력을 담당할 거예요. 알다시피 불멸의 회복력은 기초 체력과 연관이 깊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과외 선생도 저리 말했었지.
"여러분은 그러니까 아직 햇병아리고 회사 일을 하려면 기본은 해야 해요. 그게 이 오리엔테이션의 목적이고요."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잔잔했고 듣기 좋았다.
귀여운 얼굴과 모자가 그리 어울리진 않았다.
교관끼리 좋은 역과 나쁜 역을 나눴다면 그녀가 좋은 역할임이 분명했다.
"제 이름은 박다람, 전 여러분의 기술 교관입니다."
기술? 무슨 기술?
그 외 설명은 없었다.
양초남이 나섰다.
"내 이름은 김한이다. 너희를 죽일 거다."
쿨해. 쿨하다 못해 냉동고 그 자체잖아.
죽인데, 야, 들었냐? 쟤가 우리 죽인다는데?
눈빛으로 주변 동기에게 물었지만,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박다람이 다시 나섰다.
"오해의 소지가 깊네요. 김한 교관님은 여러분에게 불멸의 육체를 다루는 법을 세밀하게 알려 주실 겁니다."
아니야, 아닌 것 같아요. 누나.
양초남 눈 봐요.
누가 봐도 죽일 것 같은걸.
누가 살인마를 교관으로 쓰는 거야.
이 회사 제대로 돌아가는 거 맞아?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돌아가도 좋다. 너희가 한 명도 안 남고 돌아가는 게 내 기쁨이다."
다시 대머리 교관 이장모가 나서서 말했다.
이장모의 말에 돌아간다는 놈은 없었다.
머리에 총 맞지 않고서야, 아니, 우린 불멸이니까 총알 좀 박힌다고 해서 돌아갈 놈이 있을까 싶다.
한 달만 버티면 젖과 꿀이 흐르는 회사가 우리를 기다리는데, 다 버티겠지.
"훈련생 곁을 지키는 이들이 보일 것이다."
장님이 아닌 이상 잘 보인다. 파란 모자를 쓴 보조 교관이다.
"그들은 파랑새다."
배에 힘을 꽉 줬다.
이름 누가 지었냐? 지은 새끼 턱주가리 날리고 싶다.
파랑새란다. 파랑새.
웃을 뻔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여기저기서 픽 하고 웃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분위기를 잡아도 적응하지 못하는 놈이 있기 마련이었다.
위기감 없는 나도 포함이고.
그래도 난 안 웃었다고.
"웃겨?"
이장모가 물었다. 그럼 이게 안 웃긴가.
파랑새가 뭐냐.
"엎드려."
잠깐의 얼차려 시간이 지났다.
아, 적당히 근육을 풀었더니 시원하다. 마사지 받은 기분이었다.
몇 번 더하지, 괜히 아쉽네.
"다시 말한다. 오늘부터 한 달간 여러분을 도울, 회사에서 파견 나온 선배다. 이름은 파랑새고, 앞으로 시범 또는 기초적인 생활을 도와줄 것이다. 전부 공손하게 인사해라."
엉거주춤 다들 고개를 꾸벅였다.
나도 바로 옆에 있는 키 큰 파랑새를 향해 눈웃음을 보였다.
가슴이 큰 파랑새였다. 여자였고.
"넌 이게 재밌나 보네?"
파랑새가 물었다.
"아닙니다."
난 규정대로 속삭였다.
크게 말하면 벌점이다.
"그래?"
왜지, 찍힌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파랑새는 그리 말하고 몸을 돌렸다.
파랑새는 총 여섯 명이었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햇병아리 신입 사원들."
지옥이라니.
오티에 온 신입 사원에게 할 말이냐?
그 말을 끝으로 교관 셋은 단상에서 내려가 개조한 폐교로 들어갔다.
삼 층짜리 건물은 밤이 되면 사다코와 토시오가 손을 잡고 거닐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호러 영화 무대로 쓰면 딱이겠네.
"훈련복 배정한다."
파랑새가 우리를 인도했고, 우리는 낡은 녹색의 상·하의를 받을 수 있었다.
기왕 주는 거 교관이 입은 게 마음에 들었는데.
이건 누가 봐도 막 굴리려고 입히는 옷이다.
그래도 불멸 과외 때보다는 나았다.
그때는 옷이 의미가 없어서 핫팬츠에 가까운 반바지만 입고 훈련받았다.
옷과 운동화를 받고 들어가니, 교실을 개조한 숙소가 보였다.
"십인 일실이다."
가슴 큰 파랑새가 말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방귀태와 김요한, 개나리 둘이 한 방이다.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니, 우연보다는 필연이겠지.
"지킬 규칙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여기 앞쪽 읽고 숙지해."
그 말을 끝으로 파랑새가 나갔다.
A4용지 크기의 프린트물이 출입구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그걸 읽으려고 하자, 우리 잘생긴 개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모든 생리현상은 밖에서 해결한다. 내 말을 어기면 죽여 버릴 거다."
그 말을 꼭 날 보면서 하는 것 같냐.
싸늘한 공기가 주변을 감쌌다. 첫 마디부터 죽여 버린단다.
하, 새끼야, 그럼 인심을 잃어요.
그리 생각하는데.
"동의."
셜록 홈즈 개나리가 손을 들어 말했다.
"나도."
전부 손을 들었다. 방귀태와 요한도 마찬가지고.
아니, 우리 2시간짜리 우정은 어디다 팔아먹고 여기서 저 새끼 편을 드는 거야? 귀태 형? 요한이 형?
"지켜라. 양치도 잘해라. 청결은 기본이다."
잘생긴 개나리가 말을 덧붙였다.
또다시 여기저기서 동의 합창이 들렸다.
나만 문제야? 나만 쓰레기야?
버스 가스 살포는 그래, 미안하다.
미우나 고우나 한 달간 같이 지낼 놈들이다.
한배를 탄 이상, 어지간히 어울려 줘야 하는 법이 아니겠나.
나도 오른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