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응, 모르고 왔다.
위잉.
머리 위 에어컨 바람이 온도를 식힌다. 덕분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창밖을 볼 수 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길에서 거니는 사람과 차 따위가 보였다.
행복했다.
난 시원하니까, 화창한 날씨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눈앞에 더워 뒈질 것 같아 혀를 쭉 내미는 강아지와 그 강아지의 산책을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나온 주인을 보니 더 행복했다.
난 시원하니까.
날씨 한번 화창해 좋다.
부우웅.
대형 버스가 움직이는 진동에 맞춰 몸이 흔들렸다.
졸리지 않았다. 어제는 너무 푹 잤다.
버스는 꽉꽉 채우지 않았고 반만 간신히 채운 채 출발했다.
인솔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눈이 가늘고 찢어진, 적당히 잘생긴 얼굴이다.
불멸자란 느낌은 아니고, 나처럼 혼혈일 것 같다.
간간이 그런 이들이 보이긴 했다.
순혈은 진짜 연예인 뺨 후려갈길 정도니까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냥 지나다가 봤으면, ‘아, 새끼 잘생겼네, 황소개구리 같은 새끼,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집에서 나오지 않아야 할 새끼’ 정도로 넘어갔겠지만.
이렇게 다 모아 놓고 보니 알겠다.
누구는 순혈이고, 누구는 혼혈인지.
"혼혈?"
"넌?"
"아버지 쪽."
"같이 갈래?"
"그러자."
벌써 친해져서 몇 마디 말을 나눈 녀석들도 보였다.
그들은 금세 자리를 붙여 앉았다.
그걸 보니 어젯밤에 아버지가 한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였다.
"친구는 많이 사귀면 좋지. 첫인상으로 선 그으면서 멀리하지 말고. 살다 보면 영 아니라고 생각했던 놈이 좀 괜찮을 때도 있고, 그 반대도 많다."
"네. 그럴게요."
툭.
아버지는 손을 들어, 내 머리 위에 얹고 마저 말했다.
"많이 컸다. 아들."
"네. 이제 제가 더 크죠"
키는 내가 아버지보다 조금 더 크다.
"몸만 큰 어른처럼 굴지 말고. 그, 잠은 잘 자냐?"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아버지를 보며 난 날 향한 걱정을 느꼈다.
"네. 괜찮아요."
"잘 참네. 아빠는 어릴 때 못 그랬는데."
"어떠셨는데요?"
"불면증이 문제였지. 다른 거 다 괜찮은데 잘 때 옆집에서 나는 소리가 다 들렸으니까. 끔찍했다."
"아."
말하지 않아도 안다. 감각을 개방했을 때, 그 예민함은 어지간히 견딜 수준이 아니다.
"계속 안 잘 수는 없잖아요?"
해결책이 궁금했다.
변신족은 ‘극기’로 본능을 참고 이겨 낸다.
그럼 불멸의 예민함은 어떻게 극복할까? 완전 궁금한데.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귀마개 끼고 안대도 하고, 마이크로파이버 이불이 아니면 몸에 대지도 않았다. 하다 하다 안 되니까 4층짜리 건물을 사서, 한가운데에 방을 만들고 방음벽을 치기도 했지."
……어떻게 보면 효율적이다.
불멸의 예민함은 보통 불면으로 나타난다고 하니.
불멸을 죽이는 두 번째 방법은 ‘불면’이란 말도 있다.
그래서 일단 잠만 푹 자도 견딜 힘이 있다는 거다.
가난한 불멸자는 시도도 못 할 방법이 아버지 입에서 줄줄 나왔다.
난 저러지 않아서 다행이야.
감각을 조율하고 닫는 건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덧붙여 말하자면 변신족의 육체 덕분이다.
변신의 육체는 세밀한 근육까지 조절하게 만든다. 귀를 쫑긋거리거나, 등 근육 일부만 힘을 주는 등.
감각을 조절하는 것도 비슷했다.
본래는 각성 후에 삼 년 동안 산에 처박혀 훈련하든지, 아니면 아버지처럼 사회에 녹아들어 불면을 견디다 보면 터득하는 기술이란다.
그걸 난 각성하는 날 깨달았다.
아버지와 얘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사실 난 천재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다들 예민할 테니, 그걸 대수롭지 않게 넘길 방법을 찾는 것도 좋을 거다."
아버지가 말하는 걸 보니, 아버지는 내가 가는 회사나, 무슨 일을 할지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무원 아버지를 둔 이점이 뭐겠는가.
"공략집 좀 풀어 주시죠."
어떤 게임이든, 알고 하면 쉽다.
회사 생활이라고 다를쏘냐.
난 아버지 치트키를 쓰고자 했고.
"다 알고 가면 재미없다."
치트키가 날 거부했다.
"아버지, 공략을 알고 하는 게임이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시는군요."
설득을 시도했다.
"아닌데, 모른 채로 하는 게 백 배 더 재밌는데."
나와 취향이 다른 아버지는 설득을 거절했다.
나중에는 어머니께도 도움을 청했다.
공략집을 요구하는 날 보며 어머니는 생긋 웃었다.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마라. 양심 없는 아들아."
부드러운 말로 나무랄 때 그만했다.
치사한 부모다.
삐진 척을 하고 방에 들어가 툴툴거리다 저녁 9시에 잠들어 버렸다.
그게 한 달짜리 오리엔테이션 전날이었다.
본의 아니게 푹 자 버렸고 오전 7시 기상 후, 가볍게 줄넘기 이천 개로 몸을 푼 다음 9시에 날 데리러 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게 조금 전 일이었고.
지금은 버스에 탄 지 딱 삼십 분이 지났을 때였다.
난 한 칸 떨어져 통로를 기점으로 안쪽에 앉은 녀석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이다. 시험장과 면접장에서도 봤던, 불멸자의 미모가 참새라면 홀로 독수리처럼 보이는 탁월한 외모의 소유자다.
"세 번째지?"
미간을 찌푸린 녀석이 날 바라본다. 말없이 눈으로 의문을 표했다.
"우리 세 번째 본다는 거다."
녀석은 날 한참 보더니, 고개를 모로 꺾고 말했다.
"나 알아?"
어, 음. 이 새끼가.
야, 이쯤 되면 적당히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하면 되게 없어 보이는데.
반사적으로 설명하긴 했다.
"시험장, 면접장, 그리고 지금."
"난 처음 본다."
아, 그러냐? 주변에 관심 겁나게 없는 새끼구나.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고 버스 쿠션에 머리를 기댄다.
그게 끝이다. 대화도 끝났고 너와 나의 사이도 끝났다.
넌 오늘부터 날 모르고 나도 널 모른다. 이 개새야.
아버지는 첫인상이 모든 걸 결정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새끼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첫 마디를 나눠 보니 알겠어요. 싹수가 아주 노래요. 노랗다 못해 아주 샛노란 개나리 새끼입니다.
아버지, 이 새끼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난 우스운 꼴을 당했지만, 불굴의 사나이였다.
내 바로 뒷자리로 눈을 돌렸다.
"만나서 반갑다."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어서 길게 딴 여자가 보였다.
생김새를 보니 순혈은 아니고 혼혈인 것 같다.
예쁜데, 예쁘긴 예쁜데, 2% 부족하다.
"혼혈이지?"
여자가 대뜸 물었다.
"보면 알지 않나?"
나만 아는 건 아닐 거다. 불멸 각성은 탁월한 오감과 함께 특유의 육감과 직감을 갖게 한다.
고로, 심증이 가면 정답일 확률이 높다.
거기에 순혈과 혼혈을 가르는 기준도 명확하니까.
"아버지 쪽이고 감각이 둔한 편. 부족함 없이 자랐고, 우리가 가는 곳이 뭔지도 모른 채로 조건만 보고 움직였겠지?"
아닌데? 난 조건이 아니라 회사를 향한 창대한 꿈을 안고 입사한 건데.
"철부지."
아버지, 여기 두 번째 개나리를 만났습니다.
거기에 이쪽은 셜록 홈즈 개나리네요. 추리력이 기가 막히네! 아주.
"넌 뭔데?"
"관찰력 제로."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마에 핏대가 섰을 것이다.
넌 지금 제일고 원펀맨의 심기를 건드린 거다. 여자.
눈으로 으르렁거리자, 땋은 머리 개나리가 말했다.
"불멸은 예민해. 다들 창가가 아니라 안쪽에 앉은 건,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거슬리기 때문이고. 지금 말을 나누는 것도 고통일 거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리고 나도 예민한 편. 여기서 속 편하게 과자 까먹고 얘기 나누는 애들, 전부 혼혈이고. 그러니까 좀 닥치고 가자. 관찰력 없고 아둔한 곰아."
한 대 쥐어박아도 될까요?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남녀를 떠나 약자를 구타하지 말라고.
"봐라, 네 엄마같이 여린 사람에게 주먹을 쓰는 건 안 된다는 거다."
예가 무척 조악하고 상황에도 안 맞았지만 말이다.
어머니도 말씀하셨다. 감정에 휩쓸려 쉬이 주먹 쓰지 말라고.
변신의 본능 때문이겠지.
불효자식이 되고 싶었다.
부모님 말씀 따위 다 던져 버리고 이 개나리 셜록 홈즈 싸가지에게 응징을 내려주고 싶었다.
‘천벌이다’ 하면서 때리면 될 것 같다.
"좀 닥치고 가자. 관찰력 없고 아둔한 곰아."
내가 널 땋은 머리 셜록 홈즈 개나리라고 봤을 때, 넌 날 곰이라고 봤구나.
그래, 우린 서로서로 어떻게 상대를 생각하는지 확인했으니, 이제 주먹을 나눠 보련?
그 생각을 끝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그래, 짜증은 나지만, 구구절절 틀린 말은 아니다.
불멸은 예민하고 이 버스에 탄 놈 중, 순혈이 적어도 일곱은 넘는다.
아버지 연애할 때 별명이 예민 보스라고 했던가.
어머니가 그리 말했었다.
이미 각성하고 적응한 뒤에 만났는데 그랬다는 거다.
이 새끼들은 지금 더 괴로울 거라는 것.
잠? 당연히 잘 못 자고.
"야, 조용히 하고 가야겠다."
"그래."
금세 친해져 말을 나눈 혼혈 둘도 입을 다물었다.
저리 떠드는 것도 귀에 거슬릴 거다.
좀 과장하면 귀에다 대고 소리치는 거로 들릴 거니, 그게 좋을 턱이 없다.
그 뒤야, 뻔하지.
즐겁고 행복한 회사 오리엔테이션 버스가 장의차가 됐다.
아가리 닥치고 과자 하나 까먹지 못한 채 갔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와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뒈질 뻔했다.
예민한 새끼들.
사람이 좀 둥글둥글해야지.
이해하면서도 속으로 욕을 하는데, 항문에서 신호가 왔다.
안녕, 광익아. 나 질소, 메테인, 이산화탄소, 수소 따위로 이뤄진 친구인데, 바깥세상에 나가도 될까?
아, 자식이.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아침에 두유 2ℓ가 좀 과했을까?
난 방귀에게 내 뜻을 전했다.
이왕 나올 거면 소리 없이 뒷자리 친구에게 너의 성분과 체취를 전해 주렴.
슈슈슈슉.
예민한 불멸이 탄 버스다. 아무리 소리를 죽였어도 다 들었을 거다.
난 무음의 암살자를 내보내고 곧바로 후각을 차단했다.
불멸은 후각만큼은 그리 예민하지 않은 편인데, 변신은 그 반대다.
"욱."
뒷자리 여자가 헛구역질을 했다. 방심했다가 예민한 후각으로 나의 친구를 받아들인 대가다.
"매너 제로."
그리고 속삭였다.
감미로운 한마디였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서 다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급히 창문을 열었다.
특히 내 옆자리는 경멸의 눈빛, 스컹크도 너보다는 덜할 거라는 그런 눈으로 날 한 번 본 뒤, 창가에 앉아 창문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내 방귀보다 창가 햇볕이 더 견디기 쉬웠나 보다.
하하하, 내 승리.
버스는 몇 시간을 달리다가 멈췄다.
서울은 벗어난 지 한참이었고.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어디 콘도라도 빌렸거니 생각했다.
보통 대기업 오리엔테이션 썰을 보면 무슨 협동 게임도 하고 그렇다고 하던데.
시험도 예상과 다르게 필기였고.
여기도 멀쩡하게 오리엔테이션을 하겠지?
이상형의 여자를 만나서 썸도 타고 싶다.
신입 사원 CC(Company Couple)의 반은 오리엔테이션 중에 눈이 맞는다고 하니.
부푼 기대를 안고 버스에서 내렸다.
이미 버스 몇 대가 와서 한쪽에 가지런히 서 있는 게 보였다.
한쪽을 보니, 오십이 넘는 숫자가 캐리어를 끌고 가는 게 보였다.
나와 우리 버스를 함께 탄 일행도 움직였다.
버스에서 내린 뒤에야 다들 한숨 돌렸는지, 그 친해진 혼혈 둘이 나에게 다가와 번갈아 말했다.
"아침에 뭘 먹고 온 거냐?"
"변비야?"
"생리현상이야."
둘의 말에 답하니, 까무잡잡한 피부에 덧니가 난 친구가 말했다.
"스물하나, 김요한."
그 옆은 어깨가 넓고 머리가 작은 데 키도 같이 작은 친구다.
잘해야 165cm는 되려나.
"스물셋, 방귀태."
아, 이름 듣고 터질 뻔했네.
"방귀는 형이 꼈어야 했네. 스물 유광익."
"미친 거야?"
방귀태가 그 말에 답하고 풉 하고 웃었다.
첫 단추는 개나리 둘에게 꽂았다가 실패했지만, 그래도 적당한 친구 둘이 생긴 셈이다.
나이를 떠나 셋은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여기서 나이 따져서 뭐하게, 어차피 들어가면 다 필요 없는걸."
방귀태가 말했다.
"왜?"
진짜 궁금했다. 아니, 평범한 회사 오티니까 서로 형 동생 하는 게 낫지 않나?
아니면 귀태 씨, 광익 씨, 이게 정상이지.
"너 아무것도 모르고 왔어?"
요한이 말했다.
응. 모르고 왔다.
아버지, 어머니가 공략집도 안 주시고 힌트도 안 주시는 분들이라.
뭐든, 맨몸으로 하는 걸 즐기는 분들인지라.
"여기 훈련소야."
요한이 말했다.
그제야 난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대하던 최소 4성급 콘도 대신, 먼지 풀풀 날리는 운동장과 그 앞에 세워진 단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폐교를 개조한 거로 보이는 건물도.
아무리 봐도, 깨끗하고 훌륭한 숙소로 보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