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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51)화 (151/151)

151화
사랑해

요한은 기나긴 입맞춤으로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어도 보고, 손끝으로 더듬어 보아도 입술을 열지 않고 버티던 리세트는 얼마 안 가 울음을 터트리며 그 사과를 받아들여 주었다.

눈물의 맛이 밴 입맞춤이 못 견디게 달았다.

잠시 입술을 뗀 요한은 어서 침대로 올라오라는 듯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훌쩍이며 고민하는 듯하던 리세트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올라와 그의 곁에 누웠다. 그리고 다시, 숨결이 가까워지고 입술이 닿았다.

편하게 팔을 베고 누우면 되는데, 리세트는 못내 걱정되는지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두 팔로는 침대를 딛고 있었다. 마주 댄 이마에 살며시 힘을 실어 눌러 보았지만 리세트의 고개는 조금도 내려가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뜬 요한은 바르르 떨리는 윗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눈꺼풀이 움찔거렸지만 리세트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그 고집이 대단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로의 숨결을 나누며 요한은 오래도록 리세트를 지켜보았다. 뜰 듯 말 듯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을, 촉촉하게 젖은 눈시울을,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을.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제 아프지 않아?”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분홍빛 뺨에 입 맞추며 요한이 속삭였다.

“내가 해야 하는 말 아니야?”

“궁금해서.”

“난 안 아프지. 요한 너는? 아픈 곳 없어?”

“아직 몸을 움직이기 불편한 것뿐이지 아프지는 않아.”

영 못 믿겠는지 리세트는 흘끔흘끔 그의 몸을 더듬듯이 살펴 나갔다. 상처가 깊었던 부위인지 유독 복부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요한, 솔직히 말해 줘. 너 설마, 정말 죽으려고 했어?”

무엇을 그리 망설이나 했더니. 조심스러운 질문에 요한은 간명한 답을 주었다.

“아니.”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리세트는 모를 것이다. 이런 거짓말쯤이야 요한에게는 조금도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리세트, 너를 위해서라면.

“정말이지?”

“응.”

“그런데 왜 성벽이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었어. 나는 정말…… 네가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을 숨기고 싶은지 리세트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뺨을 타고 흘러간 눈물방울이 턱 끝에 맺혔다. 요한은 눈물이 지나간 자리를 조심스럽게 입술로 매만졌다. 그사이 리세트의 울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마력을 너무 무리해서 운용한 거지? 랑카 성 일대니까 조심했어야지.”

리세트의 말은 요한의 거짓말을 더욱 견고하게 쌓아 주었다. 요한은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

실컷 다 울었는지 리세트는 이불깃을 당겨 눈물을 훔쳐 냈다. 요한은 새빨개진 눈시울을 부드럽게 쓸어 보며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리세트는 여전히 불안한지 그의 팔 아래에 머리를 기댔다. 따듯한 숨결이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내 마력에 조금, 아주 사소한 문제가 생겼어. 예전처럼 치유 계열 마력을 잘 다루질 못해서, 네 상처를 낫게 해 줄 수 없었단 말이야.”

기억을 되짚어 보던 요한은 자신의 가슴 옆에 꼭 붙어 있는 리세트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꼼지락거리는 손끝에 긁히고 찢긴 상처가 있었다. 그의 몸을 뒤덮은 성벽의 잔해를 하나하나 치우느라 생긴 것이었다.

“괜찮은 거, 맞아?”

“연구원님께서 확인해 주셨어. 일시적인 증상인 것 같대.”

“그놈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리세트는 붙잡힌 손을 조심스럽게 빼내어 등 뒤로 감추었다.

시선을 피하듯 눈동자를 굴리는 리세트의 뺨에, 이마에, 오물거리는 입술에 요한은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이 깊어질 것이라는 걸 알리듯 그가 눈을 감고 입술을 머금었을 때 리세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식사!”

“뭐?”

“너 방금 일어났잖아. 어서 식사를 해야지!”

이 시간을 피하고 싶어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세트의 눈동자는 사명감에 찬 사람의 것처럼 보였다. 예쁜 빛으로 물들어 있는 뺨은 그대로인데 눈빛만 다부지게 변했다. 음식을 가져오겠다는 말만 남기고서 리세트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갑작스레 품에서 빠져나간 온기에 헛웃음 짓던 요한은 가만히 귀 기울이며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의외로 길었다.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요한을 미소 짓게 했다.

“요한, 눈이 내려! 벌써 한차례 펑펑 내렸나 봐. 바닥에 눈이 조금 쌓였어.”

그새를 못 참고 밖을 나갔다 온 모양이지. 가져온 음식을 협탁에 내려놓는 리세트의 어깨에 눈송이가 묻어 있었다. 그리 적은 양은 아니었다.

“보러 갈까?”

좋아할 줄 알았는데 리세트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아니.”

“왜?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되지. 눈은 내년에도 내릴 테니까. 지금은 네가 식사를 하는 게 훨씬 중요해. 훨씬!”

상체를 세운 요한은 침대가에 걸터앉는 리세트의 어깨를 털어 주었다. 자력으로 몸을 일으키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편하게 기대앉을 수 있게 리세트가 등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에 갓 구운 빵을 조그맣게 찢어 넣는 리세트의 손을 요한은 고요히 응시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이제 먹을래? 식혀 줄까?”

리세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요한은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체념 어린 한숨이 그의 입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리세트는 곧 목덜미를 감싸 안아 주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 사이에 숨어 있던 눈송이가 요한의 뺨에 닿았다.

차갑고 간지러웠다.

살아 있어 행복했다.

❖ ❖ ❖

며칠 동안 리세트의 감시하에 꼬박꼬박 치유 마법을 받은 덕에 요한은 빠르게 부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수도로 향하는 마차 안은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소리로 채워지고 있었다. 창문을 통과한 맑은 햇빛이 잠이 든 순한 얼굴에 내려앉았다.

밤새 잠을 못 이루는 것 같더니, 리세트는 단잠에 푹 빠져 고개도 가누지 못했다. 피식 웃은 요한은 제 어깨를 리세트에게 내어 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세트는 랑카 성으로 떠나기 전에 카에덴 델피니움에게 수도로 가 있어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고 한다. 공작저로 가면 그 지긋지긋한 얼굴을 보게 될 터였다. 그리고, 아이도.

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요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작은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리세트는 그 마음을 읽은 것인지 차근차근 아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생김새는 그를 쏙 빼닮았다고 한다. 남자아이라고. 비전 마법의 환영 속에서 리세트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보았다고 했는데, 대단한 말썽꾸러기였다고 했다. 우리 아기가 잘 울지 않고 온순한 걸 보면 성격까지 그를 닮은 것 같다며 진지하게 말했지.

단호한 어조며 표정이며 모든 게 사랑스러웠지만 요한은 웃을 수 없었다.

델피니움의 마력을 물려받은 아이.

그가 죽이려 했고, 끝내 리세트가 구해 낸 아이.

그 아이를 곧 보게 될 터였다.

가슴이 답답해져 요한은 리세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삼켰다. 손에 번지는 온기를 놓치기 싫어 힘을 주어 잡았다가도 아플까 싶어 살며시 힘을 풀기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수도에 도착하고 말았다.

익숙한 길을 따라 마차가 달려갔다. 햇살이 비추는 거리는 포근하기만 한데 그의 마음까지 환하게 물들여 주지는 못했다.

공작저가 보였다.

❖ ❖ ❖

요한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선 리세트는 반가운 얼굴들을 보았다. 메이와 카에덴 델피니움, 집사가 저택 앞에 나와 있었다. 귀환한 주인들을 반기며 사용인들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로드니는 어떤 여자와 함께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아기를 안고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마님. 무사히 귀환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인사를 전하는 집사의 목소리가 따스했다.

리세트는 마주 웃어 주며 살며시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눈길이 닿자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리세트를 대신해 자신이 까다롭게 엄선한 유모라며 집사가 소개해 주었다.

아기를 건네받으며 리세트는 슬쩍 요한을 바라보았다. 마차에서 내려선 직후부터 요한의 입술은 굳게 다물린 채였다.

“어서 들어가자.”

리세트가 건넨 손을 붙잡는 요한의 손에는 평소보다 많은 힘이 실려 있었다. 한 손에는 아기를, 다른 손에는 소중한 연인의 손을 잡고서 리세트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았다.

침실로 들어오자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리세트는 부드럽게 힘을 실어 요한의 손을 당겨 보았다. 그제야 허공을 배회하던 요한의 눈동자가 리세트에게 돌아왔다.

“안아 볼래?”

어려운 부탁을 들은 사람처럼 요한은 좀처럼 입술을 떼지 못했다. 리세트는 채근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요한은 조심스럽게 리세트의 손을 놓고 아기를 받아 안았다. 자신도 어설프겠지만 요한은 정말 어설퍼 보여 리세트는 작게 키득거렸다.

“어때?”

“……작아.”

이렇게 작아도 되나 싶게 작았다. 이 작은 몸이 왜 이리 무겁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요한은 방긋 웃고 있는 아이를 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려 주었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도 같았지만 일단 웃었다. 리세트가 곁에서 보고 있어 얼마든지 웃을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웃음으로 적당히 감출 수 있어 더욱 열심히 미소 지어 보았다. 너무 조용한 것 같아 요한은 문득 리세트를 보았다.

“왜 또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우는 것도 예쁘지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 마음을 담아 요한은 가만가만 리세트의 눈시울을 매만졌다. 리세트는 응석을 부리듯 그의 손에 뺨을 비볐다.

“오랜만에 집에 왔잖아.”

나직하게 흘러나온 대답에 저절로 숨을 죽이게 되었다. 요한은 아이를 안은 채로 리세트의 어깨를 감싸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엄마 아빠의 품에 안긴 아이의 웃음소리가 맑았다.

요한은 고개를 돌려 침실을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지만 그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침대 옆에 붙여 놓은 협탁과 테이블 위에는 탐스러운 분홍색 장미를 꽂아 둔 화병이, 그 옆에는 쿠키를 담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새하얀 커튼이 늘어선 창가로 햇살이 스며들어 왔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설레는 리세트의 침실이었다.

천천히 침실을 둘러본 눈길이 리세트에게 닿은 순간, 요한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혼란이 사라졌다.

집에 돌아왔구나.

“리세트.”

그 이름을 담은 입술로 요한은 망설이지 않고 리세트에게 다가갔다. 가벼운 입맞춤에 뜨거운 진심을 담아서.

“사랑해.”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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