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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50)화 (150/151)

150화
너무 미워서

가물거리는 의식 속으로 아름다운 빛이 스며들었다. 그 후의 기억은 희미했다.

천사를 만났다. 리세트 델피니움, 죽어서도 잊지 못할 나의 연인.

이번에도 네가, 나를 찾아와 주었구나.

그런데 왜 울고 있는 거야.

눈물을 닦아 주고 싶은데 손 하나 까딱일 수가 없었다. 소리 내 부르고 싶은데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리세트는 오랜만에 보는 남편도 버려두고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 손바닥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큰 돌을 들어다 나르고 있었다.

왜 저러고 있는 걸까. 저걸로 무얼 하려고. 얼굴 자세히 보고 싶은데, 가만히 좀 있어 주지.

그 마음을 읽었는지 리세트가 가까이 다가왔다.

리세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이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리세트가 무어라 소리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귓가에는 윙윙 이명이 울릴 뿐이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얼마 만에 듣는 목소리인데.

리세트가 그의 곁에 앉아 가슴과 복부를 짚어 나갔다. 귓바퀴를 적시는 눈물이 뜨거웠다. 요한의 것은 아니었다. 그 열기를 느끼고 나서야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리세트의 눈물이 꺼져 가는 정신을 붙잡아 주었다. 소리가, 그토록 현실에서 듣고 싶었던 리세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죽으려고 한 거지? 내가 다 봤어. 너, 성벽이 무너지는 걸 보고서도 피하지 않았어. 눈을 감았어. 일어나기만 해! 가만 안 둘 거야.”

협박하는 것치고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했다. 로브를 벗어 상처 부위를 감싸 압박하면서 리세트가, 그의 리세트가 울고 있었다. 그가 미치도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던 얼굴이 눈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노바르한테 다 들었어. 네가 이런 작전을 세운 거라며. 아무리 내가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바보야? 왜 네 목숨을 소중히 여기질 않아! 내가 다치면 그렇게 아파하면서, 왜 입장 바꿔 생각을 못 해? 너는 정말 바보야. 바보 멍청이야.”

현실 같지 않은데, 도무지 믿기지 않아 꿈만 같은데 리세트의 모습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떠도,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와도 리세트는 여전히 그의 눈앞에 있었다.

눈물을 참지 못하는 얼굴도, 일그러진 표정도, 눈가를 슥슥 문질러 닦는 모습도 예뻤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의 눈에는 예쁘기만 한 리세트의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이 순간에도 피가 울컥울컥 상처 부위를 비집고 나오는지 리세트는 힘을 실어 로브를 조였다.

“노바르가 금방 올 거야. 치유 마법사들 데리고 올 거야. 그러니까 노바르가 올 때까지만, 요한 조금만 참아, 제발. 부탁이야.”

노바르. 노바르. 노바르.

거슬리는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마저 예뻤다.

그 이름 말고, 내 이름을 더 불러 주지.

눈을 떠 리세트를 보고 싶은데 의식을 잡는 게 힘들었다. 그의 얼굴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뜨거웠다. 마음 아프게. 그 눈물을 닦아 주고 싶은데 수면 아래에 잠긴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네 손해야! 나, 요한 델피니움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야. 그걸 보고 싶지 않으면 눈 감지 마. 제발…….”

거짓말쟁이. 지금도 이토록 서럽게 울고 있으면서.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눈만 떠 주면, 내가 네 소원 다 들어줄게.”

눈물이 맺힌 초록빛 눈동자가 겨울빛 속에서도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가 사랑하는 색이었다. 그 아름다운 눈으로 리세트는 오직 그만을 담아 주었다.

“그러니까 죽지 마.”

울고불고 눈물을 쏟아 내던 리세트의 눈동자가 갑자기 그를 떠나갔다.

가지 마. 나를 봐 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술을 움직여 보았다. 리세트. 너의 이름을.

“여기요! 여기예요!”

리세트의 외침이 요한의 속삭임을 압도해 버렸다.

“빨리, 치유 마법사 좀 불러 주세요. 빨리요!”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며 요한은 눈을 감았다. 이 순간에도 못 견디게 리세트가 보고 싶었다.

어서 빨리, 눈을 떴으면 좋겠다.

리세트가 오래 기다리지 않게. 슬퍼하지 않게.

❖ ❖ ❖

흐릿한 시야로 따스한 불빛이 밀려들었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랑카 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였더라. 트라온 백작의 영지였나.

초점을 잡듯 눈을 깜빡이는 요한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침대가에 앉아 있는 리세트가 보였다. 그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침대에 머리만 붙이고 잠들어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불빛을 머금은 은발은 분명 리세트의 것이었다. 반질반질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잠결에 뒤척이다 그의 품에 더 깊이 안겨 올 테니까.

죽은 줄 알았던 리세트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기쁨이 너무 커 거짓을 가져다 나른 노바르 로슈만을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그놈도 리세트가 죽었다 알고 있었을 테니.

대체 내가 없던 시간에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문득 뇌리에 찾아든 의문은 빠르게 지워졌다.

저대로 잠들면 어깨가 아플 텐데.

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썩 잘되지는 않았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따라와 주질 않았다.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쉰 요한은 힘겹게 몸을 돌려 눕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리세트의 얼굴이 보고 싶어 고개를 움직여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래도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뺨에 닿아 기분은 좋아졌다.

요한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그 감촉을 음미했다. 얼마간 그러고 있으니 조금씩 손에 감각이 돌아왔다. 아주 조금 손을 움직이는 것뿐인데도 어깨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요한은 끝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손으로 더듬더듬 리세트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뺨을 문질러 보았다. 실재하는 온기와 부드러움이 가슴 깊이 안온감을 선사했다.

그때였다. 마주 잡고 있는 리세트의 손이 움찔거렸다. 잠에서 깨어나려는 것인지 입술을 오물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요한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 순간이 깨어질까 봐 의도적으로 숨을 죽인 채였다.

천천히 고개를 든 리세트가 눈가를 비볐다. 여전히 한 손은 꼭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가 깨어났다는 걸 모르는지 리세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긴. 원래 그랬지. 그의 아내는 잠에서 깨어나면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해 한참을 눈만 끔뻑거리곤 했으니.

깜빡거리는 속눈썹에 살며시 가려졌다가 이윽고 서서히 드러나는 초록빛 눈동자가 요한의 마음을 살랑거리게 만들었다. 좋았다. 그저 너무 좋았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이 안온함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과 어서 눈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부딪쳤다.

“리세트.”

제 귀에도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는데 리세트가 들으면 오죽할까 싶었다.

깜짝 놀랐는지 동그랗게 커진 리세트의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울 것 같은 눈이었다. 삽시간에 차오르는 눈물을 보다 요한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밝게 웃어 주고 싶은데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목까지 차오른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아 요한은 눈썹을 찡그리며 피식 웃어 버렸다.

“그 말, 진심이었어?”

아랫입술을 꾹 물고만 있는 리세트를 대신해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슨 말?”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은지 리세트는 부릅뜬 눈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나 같은 거 다 잊고, 다른 남자를 만나겠다는 말.”

“너…….”

대꾸하지 않고 숨만 거칠게 몰아쉬는 리세트를 채근하듯 요한은 마주 잡은 손을 살며시 흔들어 보았다.

“리세트. 왜 말을 안 해?”

그를 쏘아보던 리세트가 버럭 외쳤다.

“너는 정말 바보야!”

말을 하면 울 것 같아서 일부러 참고 참고, 눈물을 꾹 누르고 있었는데, 요한의 목소리가 결국 리세트의 노력을 허물어트렸다. 미워 죽겠다. 이 바보 같은 요한 델피니움이 너무 미웠다.

이 상황에서 그런 게 궁금하긴 한가 보다. 너무 미워서 흠씬 때려 주고 싶은데 주먹 쥔 손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애꿎은 이불을 내려치려다가도 그 반동으로 요한이 아플까 싶어 리세트는 주먹 쥔 손을 스르르 풀어야 했다.

그게 너무 억울하고 짜증이 나 리세트는 소리 내 울어 버렸다. 잠투정을 부리는 우리 아기보다도 자신의 목소리가 더 칭얼거리는 것 같아 부끄러운데, 그 소리를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서럽고 밉고 짜증이 나고 고맙고. 급격하게 변하는 감정이 휘몰아쳐 눈물로 쏟아져 내렸다.

일어나면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혼낼 생각이었다. 어떻게 죽을 생각을 할 수 있느냐며 단단히 경고하려고 했다. 다시는 이런 짓 하면 안 된다고, 그럼 절대 용서해 주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요한 네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었다고.

그런 재회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저런 걸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잡고 있는 손이라도 냉정하게 뿌리치고 싶은데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요한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아 그리할 수가 없었다.

“너는, 그런 게 궁금해?”

요한에게 대답할 시간도 주고 싶지 않아 리세트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나였으면 그런 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을 거야. 보고 싶다고 했을 거야. 너무 많이 보고 싶었다고. 그런데 넌, 어떻게 그런 것부터 물어볼 수 있어, 이 바보야! 네가 오늘따라 너무 미워.”

막상 밉다고 말을 하고 나니 후회스러웠다. 리세트는 더 크게 소리 내 울며 말을 바꾸었다.

“아니야. 사실 밉지 않아. 무사히 눈을 떠 줘서 너무 고마워.”

울었다가 화를 냈다가 고맙다고 했다가, 자신이 생각해도 엉망진창인 말에 리세트는 또다시 속상해져 엉엉 울었다. 긴장감에 굳어 있던 마음이 너무 빨리 녹아내려 그런 듯했다. 요한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계속 울 것 같아 리세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손등으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안아 줘.”

끅끅거리며 눈물을 참아 내던 리세트는 그 목소리를 따라 슬쩍 시선을 들었다.

“소원, 들어준다며.”

“싫어!”

“약속은 지키는 거라며.”

이 순간에 소원과 약속을 운운하는 남자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 리세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얼른.”

“…….”

“나 좀 안아 줘.”

너한테 가고 싶은데, 내가 지금은 갈 수가 없어.

그 말까지 듣게 된 리세트는 결국 요한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분하고 서러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세상이 떠나가도록 우는 소리가 밤이 깊어지도록 이어졌다. 장난스럽게 웃음 짓는 음성과 짜증스럽다는 듯 되쏘는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올해의 마지막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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