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49)화 (149/151)

149화
너에게로

델피니움 영지에 발을 들인 후발대원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연달아 들려왔다. 전사한 줄로만 알았던 크리프 후작이 영지에 있다는 것도 기절할 만큼 놀라운데, 뒤에 이어진 말에 비하면 약한 축에 속했다.

델피니움 공작 부인이 후발대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단다.

그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후발대의 참모진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미친 거다. 절대 안 된다. 공작이 영지에 틀어박힌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지 않나. 위중한 아내를 돌보느라 그런 것이라며 강경하게 반대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라며 반기는 이들도 많았다. 리세트 델피니움. 리세트 하리펜이었던 그 여자가 전장에서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가. 게다가 앓던 병을 회복했으니 참전 의사를 밝혔겠지.

남편 뒤에 숨어 얼결에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를 따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리세트 하리펜이 얼마나 유능한지. 단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전력을 보강하는 것이라는 의견에 끝까지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리세트 델피니움의 합류를 맞이해 주었다.

지축을 흔들듯 맹렬한 기세로 달려가는 군마의 행렬이 델피니움 영지를 벗어나 랑카 성으로 이어졌다. 리세트는 선두와 가까운 대열의 중간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델피니움 공작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짙은 푸른빛의 로브가 바람결을 따라 펄럭거렸다. 무슨 정신으로 고삐를 쥐고 있는지 리세트는 알 수가 없었다. 영지에 남겨 두고 온 아기의 얼굴도 서서히 지워졌다.

쿵쿵쿵. 심장 박동인지 말발굽 소리인지 불분명한 울림이 귓가를 때리듯 울려 퍼졌다. 머릿속으로도, 마음 깊숙한 곳으로도.

정면을 주시하던 리세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랑카 성에 당도하려면 조금 더 가야 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 사람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깃발도 보였다. 제논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라는 걸 알아본 후발대는 천천히 속력을 줄였다.

고립되었다고 알려져 많은 이의 걱정을 산 선발대가 랑카 성 밖에 모여 있었다.

“파켄 후! 이게 무슨 일인가?”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네.”

후발대의 총책임자와 임시로 선발대 지휘 권한을 부여받은 파켄 후작이 나누는 대화를 흘려들으며 리세트는 말 등에서 내려왔다.

“리세트!”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리세트를 불렀다. 노바르였다. 그를 발견한 리세트는 고삐를 쥔 채로 빠르게 다가갔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그는 고개를 탈탈 털어 내며 말을 고쳤다.

“아니야.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몸은 괜찮아? 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리세트는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듯 살며시 미소 지었다.

“랑카 성에 고립되었다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여기 다 나와 있는 거야?”

질문하면서도 리세트는 눈으로 요한을 찾아 헤맸다. 그걸 어렵지 않게 간파한 노바르는 조용한 눈짓으로 자신을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리세트는 사람들의 관심이 선발대에 쏠린 틈을 타 그를 뒤쫓아 갔다. 불안감에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노바르는 인근 숲에 다다라서야 멈추어 섰다. 리세트를 돌아보는 그의 눈동자는 기이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가 망설이는 것이 보여 리세트가 막 입술을 뗀 찰나였다.

“이 숲을 통해 랑카 성으로 가.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대체 무슨 일이야? 요한이…… 그곳에 있어?”

“응. 우리는 공작의 명을 받고 모두 빠져나왔어. 방어벽을 쌓아 몬스터들을 랑카 성으로 모는 것까지가 선발대의 마지막 임무야. 공작은 그 성과 함께 몬스터들을 모조리 태워 죽일 계획이고. 알아서 빠져나올 테니 근방에서 대기하라고 했지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어. 공작이 그곳에서 나올 것 같지 않아.”

리세트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곧장 말에 올랐다. 고삐를 쥔 손에 아프도록 힘이 실렸다.

리세트는 지체 없이 달려 나갔다. 자신이 떠난 뒤에 치유 계열 마법사들을 랑카 성으로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서.

❖ ❖ ❖

리세트가 죽었구나.

몇 번이고 되짚어 본 말이었다. 마음속으로도, 머릿속에서도, 수없이.

“리세트가…… 죽었구나.”

소리 내 말하자 현실감이 밀어닥쳤다.

슬픈 건가. 잘 모르겠다.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뜯어 낸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심장이 멈춘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미 그의 심장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요한은 비틀비틀 걸어가 창가에 기대섰다.

바닥이 드문드문 보이는 게 전부일 정도로 성내에 빼곡하게 몬스터들이 모여 있었다.

자기들이 갇힌 걸 알았는지 괴물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방어 마법진으로 유지되는 성벽을 부수려 혈안이었다. 손에 잡히는 것을 모조리 집어 던지고 거대한 발과 주먹으로 연신 쿵쿵 벽을 쳤다.

그 위협적인 진동은 땅을 울리고 성까지 번져 왔다. 유리창이 깨질 것처럼 요동쳤다.

요한은 방어 계열 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전개해 낸 마법진을 살펴보았다. 성의 외곽을 빈틈없이 감싼 그것은 각기 다른 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신성력까지 동원해 그런 것인지 꽤나 휘황찬란했다.

바깥에 남은 괴물들은 더 없는 모양인지 방어 마법진이 일제히 빛을 내며 결합하듯 거대한 돔 형태를 이루어 랑카 성을 덮어 버렸다. 이제 랑카 성은 완전한 고립 상태가 된 것이다.

작전의 시작이었다.

이제 나가서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된다. 장작으로 쓰일 것들이 지천에 널렸으니 불씨는 빠르게 번질 테고, 그 불씨는 랑카 성을 모조리 집어삼켜 흔적도 남기지 않을 터였다. 요한이 바라는 건 그것이었다.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마치 음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창틀을 짚은 손끝이 부드럽게 까딱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마저 멎었을 즈음 요한의 입가에 미소가 찾아왔다.

이 작전에 걱정과 염려를 표하는 이들에게 요한은 다짐하듯 일러 주었다. 알아서 빠져나갈 테니 심려치 말라고. 그는 그 말을 반드시 지킬 생각이었다.

이 지옥 속에서 빠져나가야지.

지옥 속에서 계속 살 자신은 없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몸에 밴 습관처럼 단추를 잠그고 로브를 걸쳤다.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리는 입술이 조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모든 게 번잡스럽게 느껴져 요한의 손이 멈추었다.

이럴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싸울 이유도, 치열하게 살아남을 이유도, 살아갈 이유도, 지켜야 할 무언가도. 요한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거추장스러운 로브를 바닥에 버려두고 문을 열었다.

방을 나선 요한은 느릿하게 걸었다. 햇살이 내려앉은 복도에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요한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창문이 보였다. 그 너머에 하늘이 보였다. 절로 욕설을 뱉을 정도로 잔인하던 날씨는 찾아볼 수도 없게 쾌청한 하늘이었다. 구름이 많은 하늘. 리세트가 사랑했던, 한가한 날에 정원에 누워 함께 보자고 했던 그 하늘.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리세트와 한 약속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광장으로 놀러 가기로 했지. 이플로 상점을 꼭 가기로, 따라만 오면 무엇이든 다 사 준다고 네가 말했지, 리세트. 아이스크림 교환권을 보물 다루듯 여기는 네가 미워서 같은 맛으로 먹으려고 했는데. 아, 여행도 가자고 했지. 너는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걸까. 네가 가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든 좋은데.

너만 있으면 되는데.

입가에 부드럽게 번지던 미소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문득 요한은 생각했다. 내가 만약 지금, 너를 만나면 어떤 걸 가장 하고 싶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너무 꿈만 같아서. 감미로운 꿈이라 그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밖으로 나가자 햇살이 쏟아지듯 내리고 있었다. 눈가에 고인 햇살이 투명하도록 맑았다. 요한은 그 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를 발견한 오우거 하나가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놈을 태워 없애며 요한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 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죽이며 성내의 중앙으로 갔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주춤거리는 몬스터들은 위험을 감지했는지 멈추어 선 채로 얼어 있다가 곧이어 성벽을 가격하기 시작했다. 요한에게 달려오는 놈들은 없었고, 달려들 준비를 마쳤지만 망설이는 놈들은 더러 볼 수 있었다.

요한은 하늘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젖혔다.

“리세트.”

사랑하는 이름을 부르는 입술이 미소를 그려 냈다.

네가 없는 이곳에서, 내가 살아가야 하나.

눈을 감으니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파란 불길이 세상의 빛을 압도하듯 하늘 높이 치솟았다. 괴물들의 비명과 울음이 하늘을 뚫을 듯 드높아졌다. 영주에게 버려지고도 오랜 시간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성벽도 천천히 허물어져 내렸다.

다시 그가 눈을 떴을 때는 하늘이 보였다. 맑고 푸르른 하늘, 찬란한 햇빛이.

속에서 왈칵 치밀어 오른 무언가를 토해 내자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폐와 심장이, 갈비뼈가 으스러진 듯한 통증은 생경했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입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것이 뺨과 목을 흠뻑 적셨다.

시야가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성벽의 잔해가 몸을 짓누르는 감각마저 의식의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곧 너를 만나겠구나.

요한은 기쁜 마음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듯 입술을 움직였다. 곧, 리세트에게 가는구나. 오랫동안 헤매지 않고 너를 만나고 싶었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 그 정도는 감히 바라도 되지 않을까.

의식이 꺼져 간다. 지겹도록 몸에서 떠나가지 않던 마력이 서서히 비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 너를 만나러 가는 거야. 이번에는 내가, 너에게 먼저 갈게. 너를 찾으러 갈게.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 죽음이, 곧 나에게 다가오는구나.

“요한!”

듣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되는데. 이번에는 내가 먼저 너를 찾아내고 싶었는데. 데리러 가고 싶었는데. 그래도 기뻤다. 리세트 네가, 나를 데리러 와 주었구나.

죽음의 문턱 앞에서 요한은 미소 지었다.

“요한 델피니움!”

선명한 목소리가 미소를 한층 짙어지게 했다. 요한은 움직여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떼었다.

“……리세트.”

드디어 너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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