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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48)화 (148/151)

148화
지옥을 벗어날 방법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대로 가만히 있으려고 했다. 당연히 그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경이 너무 쓰여 리세트는 초조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요한은 무사하다고, 다친 곳 없이 멀쩡하다는 소식만 들려 지겨울 정도라며 그가 얘기해 주었지만 불안감은 좀처럼 옅어지지 않았다. 노바르의 일도 마찬가지다. 이곳에 남아 리세트를 살펴야 할 그가 갑자기 후발대에 합류했다니.

이해가 안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카에덴 델피니움의 반응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평소와 똑같긴 한데, 그걸 증명해 보이려는 것처럼 애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찻잔을 쥐는 손동작, 코웃음 치는 소리, 고개를 저으며 타박하는 목소리까지. 자세히 보면 미묘하게 달랐다. 무어라 딱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분명 그랬다.

그를 믿는다. 설마 거짓말로 자신을 속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리세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마저 거슬렸다. 움켜쥐고 있던 포크는 접시 옆에 두었다.

아기를 보면 조금 괜찮아지지 않을까. 요한과 닮은 그 눈을, 요한을 떠올리게 하는 그 얼굴을 보면 소란스러운 모든 것이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그 작은 아이한테 의지하는 제 모습이 한심한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몰래 엿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아기를 보러 나왔다가 메이와 그의 대화를 듣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리세트가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요한이 부상을 입었단다. 랑카 성에 몬스터들이 몰려들었고, 선발대는 성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라고. 대체 어디를 보아야 순조로운 전쟁이라는 소리를 전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를 내용만 길게 이어졌다.

조금 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려던 리세트는 자신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결국 앞으로 나섰다.

“연구원님. 어서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요한이, 정말 제가 죽었다고 알고 있어요?”

입술을 살며시 벌린 채로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짓던 그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어디부터 들었어?”

“처음부터요.”

“그러니까 그 처음이라는 게 어디냐고.”

“메이가 연구원님께 달려왔을 때부터, 다 들었어요.”

리세트는 눈썹을 구기기만 할 뿐 대답을 주지 않는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리세트가 다가간 만큼 그가 뒤로 물러났다. 메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답이 들려오지 않아 리세트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메이가 화들짝 놀라 카에덴 델피니움을 방패로 삼아 몸을 숨겼다.

“메이. 알려 줘.”

리세트는 말을 멈추고 그들을 보았다. 말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으니 참을성 있게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요한에 관한 일인 만큼 리세트도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참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왜,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으세요?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이에요? 뭐라고 말 좀 해 주세요!”

“그때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어렵사리 입을 뗀 그의 말을 막지 않기 위해 리세트는 조용히 입술을 닫았다. 얼마간 허공을 보며 숨을 몰아쉬던 그가 다시 리세트를 보았다.

“그날 너를 보았다면 네가 죽었을 거라는 데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심장이…… 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노바르가 그걸 알리기 위해 랑카 성으로 갔어. 요한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네가 가는 길은 지켜 주어야 하니까.”

카에덴 델피니움은 착잡한 시선으로 리세트를 살폈다.

불안했다. 리세트의 얼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과 결연한 눈동자가 불길한 예감에 한층 더 힘을 실어 주었다.

“후발대에 합류할게요.”

한동안은 듣고도 믿기지 않아 입술이 벌어지지 않았다.

후발대. 합류.

조용히 읊조려 본 그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지다 와락 찌푸려졌다. 이게 정말 미쳤나. 뭐, 어딜 가?

“너 미쳤어?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영지에 있는 게 힘들면 차라리 수도로 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요한은 제가 죽은 줄 알고 있다면서요!”

맹렬하게 되쏘는 걸 보아하니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사고방식이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머리를 뜯어다 관찰해 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노바르도 그렇고 리세트도 죄다 죽지 못해 미친 것들 같았다.

“연구원님께서 제 몸을 살펴보셨잖아요. 그래서 더 잘 아시잖아요. 저, 이제 아픈 곳도 없고 건강해요. 전보다 훨씬 몸도 가볍고요. 그러니까 후발대에 합류해도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방해될 일이야 당연히 없겠지.

후발대는 리세트가 합류하겠다 말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할 터였다. 그걸 알고 있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리세트는 무척 건강하고, 오히려 먼 여정을 떠나온 후발대나 성에 고립된 선발대보다도 실력이 좋고 강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카에덴 델피니움은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거슬려 후, 입김을 불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리세트의 눈빛 때문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가만 보니까 너, 생각 외로 멍청하고 무모하고 맹랑하구나. 가장 중요한 걸 쏙 빼고 말하네? 너 말이야, 정말 혼날래? 네가 걷고 뛸 수 있다고 해서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괜찮다, 괜찮다, 잘한다 해 주니까 진짜 그런 줄 아네.”

말을 이어 나갈수록 그의 목소리는 냉담해졌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리세트의 눈동자가 떨리는 걸 그는 놓치지 않았다.

리세트가 본래 가지고 태어난 마력 중 치유 계열의 마력이 아직까지 발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몸에 지니고 있는 건 확실한데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지금 리세트가 자유로이 쓸 수 있는 건 방어 계열 마력뿐이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그걸 파고들어 리세트의 계획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리세트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마력 하나가 전처럼 돌아오지 못한 것뿐이지 저는 멀쩡해요.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연습해 봤어요. 방어 계열의 마력은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어요. 정 미덥지 않으시면 확인해 보세요.”

“확인?”

“연구원님께서 저를 공격하시면, 제가 다 막아 낼게요.”

고집스러운 목소리에 그는 전의를 상실했다. 받아칠 말이 없기도 하지만 리세트를 막을 자신도 없었다.

“네 마음대로 해!”

버럭 소리치는 그를 뒤로하고 리세트는 방으로 달려갔다. 뒤따라온 메이도 합세해 짐을 꾸리는 걸 도와주었다.

요한이 설마. 그럴 리가. 제 목숨까지 버릴 만큼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다. 왠지 요한이라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저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러다 요한이 죽어 버릴 것만 같아서.

오랜 시간 시달려 온 환영이 떠올라 리세트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요한이 피를 흘린 채로 쓰러지던 모습은 잠시도 멀어지지 않았다. 가방을 꺼내 드는 손등 위로도, 메이의 얼굴 위로도, 바로 눈앞에서도 끊임없이 그 장면이 겹쳐 보였다.

너무 불안해져 리세트는 손안에 마력을 가득 모아 으스러뜨릴 듯이 움켜쥐었다. 파스스 깨어져 허공으로 흩날리는 마력은 선명한 은빛이었다.

리세트는 계속해서 마력을 점검하며 약을 먹고 짐을 챙겼다.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 ❖ ❖

파켄 후작은 심란한 눈으로 공작을 살펴보고 있었다. 한창 회의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랑카 성을 떠나기로 한 날, 한차례 습격이 있었다. 꽤 규모가 커 진압하는 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작전을 지시해야 하는 지휘관이 부상을 입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파켄 후작은 무심결에 상처가 있던 공작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옷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지만 그의 몸은 깨끗할 것이다. 치유 마법사들이 말끔하게 낫게 해 주었으니. 그럼에도 그는 무언가를 찾듯 유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의 공작은 의식을 놓은 사람처럼 무작정 검을 휘두르기만 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검을 처음 잡아 보는 아이라도 된 듯이 공작은 무의미하게 허공을 가르는 짓만 반복했다. 단칼에 적의 몸을 베어 내 소란을 수습하던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어설픈 동작들에 파켄 후작이 당황한 것도 찰나였다. 오우거의 검이 배를 관통한 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공작은 그저 멍한 얼굴로 우뚝 멈추어 서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보았다. 공작이 검을 놓아 버리는 걸. 일부러 그런 것인지, 기력을 소진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직감적으로는 전자에 무게가 실렸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듯 눈을 감는 모습을 코앞에서 목격해 그런 듯했다.

어째서 공작은 그 급박한 상황에서 반격하지 않았을까. 죽기를 작정하지 않고서야 이게 가능한 일인가?

도대체 저 남자가 언제부터 이상해진 건가.

생각은 거슬러 올라가 다시 그날로 돌아갔다. 습격을 당한 날.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노바르 로슈만이 들이닥친 그날로.

부상을 털고 일어난 공작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누군가 공작의 몸을 빼앗아 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건 파켄 후작 혼자만의 견해가 아니었다. 이번 전쟁 때 바로 곁에서 공작을 지켜본 성기사단장과 황실 부기사단장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치를 살피기 일쑤였다.

본래도 작전을 행할 때는 철저하고 냉정했지만 요 며칠 사이 공작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쌓아 놓은 분노를 표출하듯 공작은 잔인하게 몬스터를 죽였다. 한 번에 숨통을 끊었던 지난날들과 달리 넝마가 될 때까지 베어 내며 피를 뒤집어썼다.

대체 왜 저러는 것인가.

파켄 후작의 고민을 예고도 없이 끊어 낸 건 델피니움 공작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믿기지 않아 반문하는 그에게 공작은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 주었다.

“방어벽을 높이 쌓아 올려 몬스터들을 전부 랑카 성으로 몬다. 한 놈도 빠짐없이 제대로 몰아.”

공작의 작전 지시 사항은 간결했다. 이전과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작전지가 랑카 성으로 변경된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몬스터들을 한곳으로 유인해 가둔다. 이곳, 랑카 성으로. 그 후에 전부 태워 없앤다.

거기에 더해 공작은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성 근처에 사람을 두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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