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아니라고 해
속삭임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노바르 로슈만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요한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영지에서 리세트를 지키고 있어야 할 노바르 로슈만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걸.
“네가, 왜 여기에…….”
요한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따라와.”
자신이 머무르는 공간까지 갈 정신이 없어 요한은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갔다. 의무실로 쓰였던 곳이라는 건 코에 스미는 피 냄새로 알아차렸다. 그날의 기억이 요한을 덮쳐 왔다. 아카데미에서 리세트가 쓰러졌던 그날이. 그때의 불안감이. 막연하고 아득하기만 한 두려움까지도.
고약할 정도로 피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째서 그 흔적은 보이지 않는 걸까.
느릿하게 속눈썹이 깜빡거릴 때마다 그가 보고 있는 모습이 바뀌었다. 아카데미의 의무실을 옮겨 놓은 것처럼 온통 피투성이였다가, 이내 새것처럼 정돈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뜨자 비로소 현실이 보였다.
방 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깔끔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러니 피 냄새를 맡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데, 요한을 괴롭히는 그 냄새는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실재하지 않는 죽음의 냄새가 그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낡은 문이 삐거덕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요한은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바짝 붙어 선 노바르 로슈만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거슬리게. 그래서 더 미치게. 이곳까지 찾아와 사람의 마음을 난도질했으면 무어라 지껄이기라도 해야지.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놈이 요한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또 다른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았으면. 그저 지금처럼만 입을 다물고 내 앞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이게 꿈이었으면. 자고 나면 사라질 악몽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단지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받기 위해 요한은 입술을 떼었다.
“무슨 일이야?”
“리세트가…….”
그 이름이 들려온 순간 현실감이 들이닥쳤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요한은 리세트의 이름을 부르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죽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요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창문을 통과해 들어온 햇살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머릿속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생각이 꼬이고 꼬여 복잡해졌다.
리세트가. 그 목소리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은 현실감이 없어 웃기기만 했다. 누가 죽었다는 건가. 대체 누가? 왜? 어째서?
한꺼번에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 수많은 질문을 해결할 방법을 요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입술을 열면 된다. 그리고 물어보면 된다. 대체 누가 죽은 것이냐고. 그 쉬운 길을 두고 요한은 굳이 다른 길을 찾아 헤맸다.
그사이 코를 찌를 듯이 괴롭히는 피 냄새가 진해졌다. 피로 가득 찬 곳에 그 혼자 버려진 것처럼. 리세트의 비명까지 귓가에 선연했다.
해결할 수 없는 물음들이 켜켜이 모여 요한의 분노를 돋웠다.
리세트가, 죽었다?
어떻게 그따위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는 건지. 감히 그런 소리를 내 앞에서 뱉고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지.
왜 하필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남겨 두고 이곳에 있는 건지.
분노로 점철된 생각의 끝은 후회와 환멸이었다. 못 견디게 화가 났다. 나 스스로에게. 리세트를 떠나보낸 두 손에. 너를 담고 품었던 눈과 마음에.
“……델피니움 공?”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 본 노바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까지 오며 수없이 생각했다. 리세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공작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를 낼까. 울지는 않을까. 그럼 난,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하지. 지키겠다고 한 약속을 끝내 저버려 죄송하다 사죄해야 할까.
그 치열한 고민은 전부 쓸모가 없어졌다. 공작은 화를 내지도, 울지도 않았으니까.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아니라고 해.”
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노바르의 죄책감을 불러왔다.
“아니라고, 네가 잘못 안 거라고. 그렇게 얘기해.”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나았겠다. 정말 모르겠다. 지금 저 남자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절박한 목소리와 감정 하나 깃들지 않은 얼굴의 괴리감에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공작이 원하는 대로 대답해 주고 싶었다. 아니라고. 내가 잘못 안 거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노바르는 몇 번이나 소리 내 연습해 본 말을 꺼내기 위해 차분하게 숨을 고른 후 시선을 밑으로 떨어트렸다. 이 말을 전하며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연구원님께는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도 리세트가…… 부인께서 가는 마지막 길은 공께서 지켜보셔야 하니까요. 장례식을…….”
“아아, 장례식.”
하. 참지 못한 실소를 흘린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장례식. 아, 맞아. 죽었다고 했지. 리세트가, 죽었다고.
현실을 짚어 가는 속삭임이 침묵을 깊어지게 했다.
“지휘관님!”
다급한 목소리가 끝이 보이지 않던 침묵을 깨트렸다. 문이 벌컥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편지를 한 손에 움켜쥔 채로 나타난 파켄 후작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랑카 성으로, 우리가 예상한 격전지가 아닌 이곳으로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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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카에덴 델피니움이 치유 계열 마법사를 숨겨 둔 덕분에 리세트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치유 마법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회복 속도가 남다르다며 그가 신기하다는 듯 감탄하기도 했다.
리세트는 혀가 찢길 것처럼 쓰디쓴 약과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비전 마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아기는 건강했다. 제 아빠와 꼭 닮은 머리색과 눈동자를 가진 아기는 델피니움가의 마력까지 물려받았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지긋지긋하다며 혀를 찼지만 리세트는 아무래도 좋았다. 건강하게 세상에 나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아직까지 전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라 한다.
순조로운 전쟁이라니.
선발대가 랑카 성에 고립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만 알았다. 다행히 잘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리세트는 좀처럼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노바르까지 후발대에 합류했다고 하니 쉽게만 볼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여러 소식을 들고 오는 카에덴 델피니움의 노크 소리가 리세트의 정신을 깨워 주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 포크를 문 채로 생각에 잠겼던 리세트는 화들짝 놀라 포크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심심해서 이것저것 다 부수고 싶어?”
리세트가 포크를 줍는 사이 그는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직도 아기 이름 못 정했어?”
재촉과 짜증이 반씩 섞인 목소리에 리세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제도 말씀드렸잖아요. 요한이 돌아오면 함께 의논할 거예요.”
“그럼 그때까지 계속 아가라고 불러? 이러다 아가가 자기 이름을 아가 델피니움이라고 알면 어떡하게?”
“그때는 제가 다시 알려 주어야지요. 사실 너의 이름은 아가가 아니라고요.”
“가만 보면 너는 고집이 너무 세. 요한보다 더한 것 같아.”
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는 그쯤에서 화제를 돌렸다.
“오늘도 몸에 이상은 없고?”
“네. 이대로 전장에 나가도 될 정도예요.”
“뭐 좋은 거라고 예시로 그런 걸 들어?”
질색하는 그의 얼굴이 종이를 구기는 것처럼 와락 찌푸려졌다. 정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으으, 소리 낸 그가 나쁜 걸 쫓듯 한 손을 휘휘 저었다.
“너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일이 생겨서 왔어.”
“이름은 안 돼요. 요한이랑 같이 지을 거예요.”
“네네, 그러세요. 제가 부인께 바라는 건 다른 일이거든요.”
“뭔데요?”
카에덴 델피니움은 리세트의 앞 접시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쿠키 하나를 집어 갔다.
“후발대가 며칠 영지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찾아왔어. 고블린 서식지였던 숲 일대를 정찰하는 조였다고 하는데, 서부 지역으로 가기 전에 이래저래 정비하고 싶은 게 많다고 해서. 약초나 조금 쥐여 주려고. 괜찮지?”
“당연하지요. 얼마나 머문다고 해요?”
“길어 봤자 삼 일. 이틀 내로 떠나겠다고 하던데.”
“제가 가서 맞아 주어야 하는 거지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요.”
“부인께서는 편하게 먹고 자고 아기 구경이나 실컷 하시지요. 안주인 노릇은 제가 잠시 맡아 드릴 테니.”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좀 가만히 있어.”
허락 없이 강탈한 쿠키를 파사삭 깨 먹으며 카에덴 델피니움은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까지 툴툴거리는 리세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부러 듣지 못한 척했다. 후발대로 온 귀족들이 혹시나 리세트를 전장으로 끌어들일까 싶어 안주인 역할을 하겠다는 당연하고 기특한 마음가짐을 중간에서 잘라 버린 것이다.
그는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갔다.
노바르가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지휘관이자 전략관인 남자가 대열을 무단으로 이탈했다는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요한이 다행히 정신 줄을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안주머니에 넣어 둔 편지로 흘끔 시선을 내렸다. 그 안에는 리세트가 아기를 출산하고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후발대에게 이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하면 되겠지. 그걸 위해 귀찮지만 영지를 내준 것이니.
다급하게 달려오는 듯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메이 하핀이 두 눈 크게 뜨고서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왜?”
숨을 고를 시간도 주지 않고 물었는데 하녀는 재빠르게 말을 받아 주었다.
“랑카 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요. 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몬스터들이 전부 그곳에 모여들었대요! 게다가 주인님께서 부상을 입으셔서, 무사히 회복하셨지만 상황이 정말 안 좋았다고 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주인님께서 다치셨다니!”
정신 줄을 제대로 잡고 있을 거라는 건 오판인 듯했다.
그럼 그렇지. 아내에게 단단히 미친놈이 그 소식을 듣고 제정신일 수가 없겠지.
“요한이 설마 따라 죽겠다며 헛짓거리를 하지는 않겠지?”
“따라 죽다니요?”
“그야 리세트가 죽었다고 알고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후발대를 빨리 랑카 성으로 보내야 할 듯싶었다. 그가 막 급하게 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때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 사실을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제가 죽었다고, 요한이 그렇게 알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