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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46)화 (146/151)

146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

불꽃을 삼킨 것처럼 목이 타는 듯이 뜨겁고 갈증이 났다. 리세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천천히 깜빡여 보았다. 꿈을 꾸는 듯 몽롱했던 머릿속이 차츰 맑아지기 시작했다.

여기는 또 어디일까.

기억 속에는 없는 낯선 곳이었지만 누운 채로 천장을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등에 닿는 폭신폭신한 감촉은 이불일 테니까.

투명한 햇살이 보였다. 수면 아래에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선명하게 보이는 그 빛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 만에 바깥세상인지 모르겠다.

리세트는 코와 입으로 번갈아 가며 숨을 쉬어 보았다. 속눈썹을 간질이며 수면 위로 떠 오르던 물방울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정말 물 밖으로 나왔다는 게 실감 났다.

허리 옆에 축 늘어진 손에 따스한 빛이 스며들었다. 고개를 움직일 여력도 없어 리세트는 슬쩍 눈동자만 굴렸다.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커다란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이 찬란해 눈이 부셨다.

창문…….

입술만 움직여 조그맣게 발음해 보자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낯선 공간이 어디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델피니움 영지의 저택, 요한과 함께 머물렀던 침실이었다. 저 창문을 통하면 정원이 보였지.

무척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사실 지금도 꿈만 같았다. 다시 잠들어 버리면 수면 아래에 혼자 있을 것만 같아 눈에 힘을 주어 시야를 잡았다.

리세트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어갔다. 기억은 호수의 밑으로, 환영을 이겨 내고 비전 마법진의 수식을 파훼하려 발버둥 쳤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기억은 생생하기만 해 따로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비전 마법진에 잡아먹히는 듯하다 전세가 뒤집힌 건 울컥 차오른 피를 토해 냈을 때였다. 드디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무언가 자신을 향해 달려왔고, 그걸 피하기 위해 도망갔고, 배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파도에 휩쓸리듯 몸이 정처 없이 흔들려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는 것처럼 온몸이 아프기도 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더라.

리세트는 곰곰이 생각을 더듬어 나갔다. 눈시울 밑으로 번져 나간 속눈썹의 그림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 맞아.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 언뜻 카에덴 델피니움을 본 것도 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로, 처음 듣는 목소리로 거친 욕을 내뱉고 있었지. 사이사이 요한의 이름을 불러 제대로 기억이 난다.

몸이 찢어질 듯 아픈 와중에도 망할 놈이니 나쁜 놈이니 하는 소리에 화가 났지만, 화를 낼 기력도 정신도 없어 까무룩 다시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무척 아팠던 곳이 배 부근이라는 걸 기억해 낸 리세트는 움직이지 않는 손에 가까스로 힘을 주었다. 더듬더듬 배를 만져 보는 리세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배가 조금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확인해 보고 싶은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낑낑거리며 막 옆으로 돌아누운 순간이었다.

“마님!”

오랜만에 듣는 메이의 목소리였다.

“괜찮으세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리세트는 고개를 작게 끄덕여 주었다. 메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리세트의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편하게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다.

“조금씩 드셔 보세요.”

메이가 입가에 대 준 물잔은 따듯했다. 리세트는 조금씩 물을 마셨다. 목소리를 내 보려 목에 힘을 주었지만 아, 아, 끊기듯 흘러나오는 소리가 전부였다. 메이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리세트를 보았다.

“정말 다행이에요, 마님. 저 기억하시지요? 기억은 괜찮으시지요? 숨 쉬는 데 불편하시지는 않아요? 바깥이라 호흡하기 훨씬 편하시지요?”

리세트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의 눈시울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

“델피니움 연구원님께서 숨겨 두셨던 치유 마법사를 데려오셔서 수월했어요. 출혈이 너무 많아서 걱정했는데 아기님도 건강히 태어나셨어요.”

아기 이야기가 나오자 리세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가로 열이 몰려 붉게 달아올랐다. 메이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벌떡 일어났다.

“아기님이 보고 싶으시지요?”

“……응. 너무, 보고 싶어.”

“잠깐만 기다리세요!”

우렁차게 대답한 메이가 잰걸음으로 달려가 문밖으로 나갔다. 급하게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금방 벌컥 열렸다.

“얼마나 순하신지 몰라요.”

목소리를 듣고서야 메이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고 싶은데 시야가 너무 흐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리세트의 뺨은 눈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행히 성격은 마님을 닮으셨나 봐요.”

장난스러운 말에 조금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았지만 리세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어색하고 웃길지. 얼마나 바보 같을지. 웃고 싶은데, 행복한데, 눈물이 나왔다. 어디서 나온 힘인지 모르게 리세트는 팔을 움직여 아기를 받아 안았다.

아기는 눈을 뜨고 있었다.

리세트가 가장 사랑하는 빛. 요한을 닮은 밤하늘 같은 눈이 반짝반짝 예쁘게 빛났다. 흐릿하기만 한 세상 속에서 그 빛은 선명했다.

리세트는 조심스럽게 아기의 뺨과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았다. 제 얼굴에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이상한지 아기가 바르작거렸지만 순한 눈동자는 오롯이 리세트를 향한 채였다.

“우리 아가, 아빠를…… 닮았구나.”

그 말에 화답하듯 아기가 까르르 미소 지었다. 눈물이 맺힌 채로 바르르 떨리던 리세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너무…… 예쁘다.”

❖ ❖ ❖

로비에서 부상병들을 직접 확인하던 파켄 후작은 문득 고개를 틀어 공작이 머무는 방을 올려다보았다.

랑카 성 일대는 이제 몬스터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깨끗했다.

치열했던 새벽, 공작은 그 숲에서 벌어진 소란을 단숨에 제압한 후 랑카 성으로 가 남아 있는 것들을 전부 죽였다. 근방에 있던 몬스터들이 더 몰려와 가세했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바람에 쓸려 가는 낙엽처럼 쓰러질 뿐이었다.

아군을 피해서 적만 분별해 태우던 마력의 빛이 아직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공작의 얼굴까지도. 아군의 검에 마력을 씌워 모조리 제 손아귀에서 주무르던 그 남자의 눈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한두 명도 아니고 자그마치 백 명이 넘는다. 그런데 그 많은 인원의 무기에 마력을 입히고, 또 그것을 완벽하게 제어하다니. 파켄 후작은 땀이 난 손바닥을 맞대어 문질렀다.

선발대는 이틀 뒤에 랑카 성을 떠나기로 했다. 그를 비롯해 마법사들이 제일 멀쩡했다. 소모된 마력이 빠르게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수도를 막 떠나왔을 때와 비슷한 상태였다.

부기사단장과 성기사단장은 자신들의 일행을 돌보며 작전을 하달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후 몸을 돌리는 파켄 후작에게 병사가 달려왔다. 새장 세 개를 손에 든 채였다. 전서구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새의 발목에는 자그마한 것이 묶여 있었다. 손수 하나씩 편지를 푼 파켄 후작은 그걸 가지고 공작의 방으로 갔다.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순서대로 황제 폐하와 후발대, 수색대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요한은 편지를 건네받았다. 인사를 올린 파켄 후작이 물러가고 나서야 요한은 지친 듯이 한숨을 쉬며 봉인을 뜯어냈다.

황제의 전령에는 승전을 축하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죽은 병사들에 대한 애도의 말도 덧붙었다. 곧이어 발발할 마지막 전투도 무사히 마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후발대의 전령도 별다를 건 없었다. 꽤 희망찬 내용이었지만 그걸 보는 요한의 눈길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잠잠하기만 했다. 선발대가 놓친 몬스터가 하나도 없는지 그들은 몬스터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하다고, 선발대의 활약을 추켜세우는 편지 속에서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수색대.

편지지를 든 요한의 손이 얼마간 머뭇거렸다. 요한은 편지지를 쥔 채로 잠시 창문을 돌아보았다.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이라 어둠과 빛이 혼재되어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요한은 신중한 눈길로 수색대에서 보내온 전령을 읽어 내려갔다. 밝아 오는 하늘빛이 스며들어 언뜻 희망으로 빛나는 듯 보이던 눈동자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크리프 후작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로 마무리된 편지를 그만 내려놓았다.

요한은 느릿하게 펜을 쥐었다. 서랍을 열어 깨끗한 종이를 꺼내 올려놓았다. 각각 답신을 쓰던 요한은 습관적으로 쇄골 언저리를 매만졌다.

허전했다.

펜을 쥔 손에 무의식적인 힘이 실렸다. 리세트가 준 금장 단추를 잃어버렸다. 그걸 깨달은 건 전투가 막 끝났을 무렵이었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 생각에 사로잡힌 요한은 당장 숲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생각했다. 그리고 인내했다. 부상당한 인원수를 파악하고 부상의 정도를 확인하고, 무슨 정신으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는지 아직까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새카만 통로로 들어와 바닥을 더듬어 헤집고 있었다. 왔던 길을 차근차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계속 돌아보았다.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성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에서도, 숲으로 가는 길에도, 전투가 벌어졌던 그 숲에서도 찾지 못했다.

요한이 다시 성으로 돌아왔을 때, 부상병들을 손수 돌보던 부기사단장이 놀란 얼굴을 하고 달려왔다.

‘남은 놈들이 더 있던 겁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요한은 제 꼬락서니를 살펴보았다.

눈이 묻어 축축하게 젖은 옷은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눈이 많이 묻은 쪽은 땅으로 꺼질 듯이 늘어져 있고, 흙이 더 많이 묻은 부분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길바닥에서 구르고 온 듯한 모양새였다.

요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손을 풀어 펜을 내려놓았다. 아직 이틀이 남았으니까. 그 안에만 찾으면 된다.

❖ ❖ ❖

떠날 날이 되어서도 단추를 찾지 못해 요한은 심란하고 짜증스러웠다.

그 작은 것 하나 제대로 못 챙긴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가, 그 소중한 걸 굳이 이런 전쟁터까지 가져온 자신의 선택을 비웃기에 이르렀다. 숲을 뒤지다 보니 새벽이 밝아 왔다. 시간을 더 지체해서는 안 된다. 이제 곧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

랑카 성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다. 까먹을 리도 만무하다. 그러니 일을 다 끝내고, 리세트를 만나고, 다시 혼자 와 찾으면 된다.

요한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어렵게 돌렸다. 군마를 모는 손길이 거칠었다. 그가 막 성내에 도착했을 때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요한은 곧 그 이유를 제 눈으로 확인했다.

지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노바르 로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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