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꿈이 아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차갑게 굳어 버린 손끝은 찢어져 피가 맺혀 있었다. 통증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곳, 그와 노바르가 함께 있던 그곳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장작불이 피워져 있었다. 리세트는 그 불빛 속에 묻혀 있었다. 야속한 하늘은 이 가여운 여자의 얼굴과 몸에 눈송이를 뿌려 댔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문득 손을 펼쳐 보았다. 바닥에 꽂혀 있는 꼬챙이를 급하게 뽑느라 손바닥에는 빨간 줄이 군데군데 그어져 있었다.
그냥, 엉망이었다. 모든 게 전부 다.
그는 몸을 돌려 커다란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눈 속에 발이 푹푹 빠지는 우스꽝스러운 소리도 멍해진 의식을 깨워 주지는 못했다. 나무 기둥에 바짝 붙여 둔 짐 가방을 뒤적여 깨끗한 옷을 여러 벌 꺼냈다.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갔다. 발자국이 선명히 남은 바닥 위로 그새 눈송이가 얇게 쌓여 있었다. 절로 욕설이 튀어나올 정도로 매정한 날씨였다.
리세트가 추위를 느낄 리 없는데, 굳이 이곳까지 옮겨 와 불을 피우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래도 추워 보여 노바르의 이불까지 끌어와 겹겹이 둘러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입고 있던 방한복까지 벗어 덮어 주었다.
불이 약해진 것 같아 그는 성냥을 하나 더 꺼내 들려고 했다. 허리 부근을 더듬더듬 짚어 보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입고 있던 옷에, 리세트의 몸을 덮어 주느라 벗어 둔 그 옷의 주머니에 성냥갑을 넣어 두었다는 걸.
굳이 성냥 따위를 쓰지 않아도 불을 피울 수 있다. 그의 마력이 곧 불씨이니. 하지만 선뜻 그리할 수가 없었다.
왜일까.
저 여자를 끝내 죽음으로 내몰고, 지금까지도 그 몸을 칭칭 동여매고 있는 마력이 못 견디게 짜증스러웠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이불을 하나 걷어 냈다. 그 바로 밑에 있는 자신의 옷을 가져가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그런 걸 알기에는 그의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그는 세상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눈길로 죽어 버린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몰고 온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어 있어 낮과 밤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나직하게 흘러나온 한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희뿌얘진 시야 사이로 리세트의 얼굴이 보였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역시 꿈이 아닐까.
뺨을 세게 꼬집어 보았지만 아프지 않았다.
역시. 꿈인가 보다.
그것을 깨닫자 참을 수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킬킬거리며 소리 내 웃던 입술은 오래 지나지 않아 굳게 닫혔다. 호숫가는 다시 정적에 잠겼다.
뺨을 꼬집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현실을 부정하듯 하늘로 높이 쳐들었던 고개도 서서히 내려가 리세트에게로 향했다.
눈과 이불 속에 파묻힌 작은 얼굴과 입술이 전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몸도 그렇겠지. 눈에 담고 있어 부정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리세트를 여기까지 옮겨 왔기에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었다. 리세트가 죽었다는 걸. 그 싸늘한 냉기가 사람의 것일 수는 없으니.
“노바르는 출발했나.”
한숨처럼 흘러나온 말소리는 희미했다.
먹구름 사이로 언뜻 엿보이는 해는 하늘의 중앙에 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밤이 아니구나. 낮이기는 하구나.
“벌써 떠났겠네.”
기나긴 정적이 두려워 혼잣말을 계속했다. 자신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새 벌어진 일이었다.
왜. 어째서?
근본적인 물음이 머릿속을 헝클였다. 평생 홀로 살아왔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토록 막막한 것일까. 정적을 견디기 힘든 걸까. 오히려 시끄러운 것들이 사라져 원래대로 돌아온 것뿐인데.
“일단 네 몸에 붙어 있는 마력부터 없애 줄게.”
리세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선 그의 움직임이 돌연히 멈추었다. 한 뼘의 간격을 남겨 둔 채였다. 이 이상은 무리였다. 리세트를 감싼 냉기가 자신에게까지 전해질까 두려웠다. 괜한 생각을 떨쳐 내듯 카에덴 델피니움은 차근차근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마력부터 거두어야지.
머릿속은 하얗기만 한데 다행히 마력을 조절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저 본능에 이끌려 마법진을 전개했다. 할 수 있는 한 느리게,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마력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리세트의 손목에 묶여 있던 마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리세트 주변의 하얀 눈밭이 파랗게 물들었다. 그의 장화 끝에도 그 차가운 빛이 닿았다.
이게 다 끝나면 뭘 해야 하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간신히 생각이 이어졌다.
저택으로 돌아가고…….
“아, 그 전에 마차를 타야지.”
옅게 번진 하얀 입김이 또다시 시야를 가렸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가. 저택에 가서는…… 리세트가 죽었다고…….
“네가 죽었다고…….”
차츰 잦아든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하고 흩어졌다. 종내에는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였다.
“네가, 리세트 네가 죽었다고…….”
어떻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요한에게는 뭐라고 설명해? 제 손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보낸 그 바보에게는, 대체 어떻게?
카에덴 델피니움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떨림이 잔재하는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널뛰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뻣뻣하게 얼어붙은 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를 악물고 있어 턱에 힘이 실려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마력이 리세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고결하게 반짝이는 그 은빛의 마력이, 리세트의 것이 분명한 그 마력이 주인에게 돌아와 있었다.
❖ ❖ ❖
숲 일대를 깨끗하게 정리한 요한은 말 등에 올랐다.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요한은 말의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 주어 진정시켰다.
“이제 랑카 성으로 돌아간다!”
요한의 날카로운 외침에 화답하듯 군마가 앞발로 거세게 땅을 차며 뛰어나갔다. 암갈색의 갈기가 바람결을 따라 흔들렸다. 일행도 민첩하게 그 뒤를 따라붙었다. 랑카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빠르게 이동했다.
시린 바람과 흩날리는 눈송이가 뺨을 스쳤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일 뿐인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갑게 느껴졌다.
요한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여 뒤를 돌아보았다. 몇 번이고 그랬다. 가슴을 쿵쿵 울리게 하는 불안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의 동요에 동화된 듯 군마가 불안정하게 땅을 박차고 나갔다.
다시 앞을 본 요한은 허벅지에 단단히 힘을 실어 말을 진정시킨 뒤 고삐를 고쳐 쥐었다. 장갑을 낀 손이 피로 축축했다.
통로에 도착하자 일행은 재빠르게 말 등에서 내려왔다. 오직 요한만 내려오지 못하고 뒤를 보고 있었다.
“저, 지휘관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요한은 뒤늦게 말에서 내려왔다.
흙빛으로 말라비틀어진 덩굴줄기가 낡아 부서지기 직전인 벽을 덮고 있었다. 그것을 치우자 통로가 드러났다. 여기저기 깨진 흔적이 남은 외관과 달리 내부는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통로의 그림자에 발을 내딛기 전, 요한은 또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언가를 잊어버린 것처럼, 놓고 온 것처럼, 잃어버린 것처럼.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두고 온 것처럼.
“지휘관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염려스러워하는 듯한 파켄 후작의 목소리가 거듭되는 요한의 상념을 잘랐다.
미안하다는 듯 간결하게 눈짓한 요한은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통로를 메우고 있던 어둠이 내려와 미련이 묻어나는 눈빛을 가려 주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 함성과 비명이, 마력의 파동과 신성력의 파장이 빠르게 가까워져 갔다. 멍청하게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느새 요한은 달려가고 있었다.
리세트.
그 이름을 부르면 마음이 평온해졌던 나날들과 달리 가슴이 불안하게 죄여 들었다. 며칠 전부터 그랬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서, 미치도록 걱정이 되어 그런 것일까. 너를 홀로 그 차가운 호수에 남겨 두어서.
그래도 또다시, 요한은 계속 리세트의 이름을 불렀다. 불안은 덮어 두고서. 자꾸만 돌아보려는 마음을 다잡듯이.
리세트.
금방 갈게.
요한은 빛이 보이는 통로의 끝으로 주저 없이 달려 나갔다.
❖ ❖ ❖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미친 건가 싶어서, 제 눈이 기어코 망상을 그려 낸 건가 싶어 카에덴 델피니움은 눈 주위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리세트의 몸으로 은빛 마력이 스며들고 있었다.
무심코 볼을 꽉 쥐어 비틀었는데,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꿈이 아니구나.
리세트의 이름을 불러 보려던 그는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아 냈다. 혹시나 제 목소리가 방해될까 염려가 된 탓이었다.
장작불이 화르르 피어올라 만들어 낸 빛이 한껏 스며들어도 새파랗기만 하던 자그마한 얼굴이 조금씩 따듯한 빛을 머금는 것처럼 보였다. 온 세상을 은빛으로 물들일 기세로 번져 나갔던 마력이 서서히 옅어졌다. 리세트의 몸에 빨려 들어가듯 흡수되었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숨을 죽인 채로 묵묵히 지켜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리세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작게 벌어진 입술이 무언가를 발음하려는 듯 움직였다.
그는 바로 무릎을 굽혀 앉아 리세트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배가…….”
느릿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배가, 너무…… 아파요…….”
그제야 리세트를 살펴볼 여력이 생긴 그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깨끗하던 이불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리세트의 하반신을 덮은 쪽이었다.
“아, 아니잖아. 아직 아니잖아. 분명히! 네가, 분명 봄에 태어날 거라며. 의사도 그렇게 얘기했잖아!”
정신없이 소리를 내지르던 카에덴 델피니움은 엉망으로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모조리 걷어 냈다. 리세트의 배는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부어 있었다. 다리는 새빨간 피에 젖어 들고 있었다.
“젠장!”
이불로 리세트의 몸을 꼼꼼하게 감싼 후 안아 든 그가 다급히 눈길을 헤쳐 나갔다. 새하얀 눈밭에 남은 그의 발자국을 따라 핏자국이 점점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