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악몽처럼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던 땅은 검붉은 피와 시퍼런 체액으로 물들어 있었다. 신화 속에 나오는 지옥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새로이 내리는 눈송이도 바닥에 닿으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자신이 죽인 것들의 사체를 넘어 요한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표정 하나 없는 얼굴과 달리 산책이라도 나가는 듯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그가 지나가는 길마다 살이 타는 냄새가 풍기고 재가 흩어졌다. 새하얀 눈과 어우러진 새까만 재는 허공으로, 그리고 더 멀리 날아갔다. 구역질이 치미는 악취가 바람결을 타고 흩어졌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사체로 덮여 있던 바닥이 깨끗해지고 나서야 성기사는 신성력을 거두어들였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유백색의 막이 사라지자 바깥의 소리가 바람과 함께 훅 끼쳐 들었다. 코를 찌르던 끔찍한 악취도 멀리 날아가 버렸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천천히 돌려 보며 그가 철퍼덕 주저앉았다. 기사들도 털썩 바닥에 앉아 검에 묻은 피를 손으로 훔쳤다.
검집에 도로 검을 집어넣는 파켄 후작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어 한 남자를 보았다. 내리쬐는 새벽빛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는 그 남자를.
저건 사람이 아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델피니움 공작은 그저 괴물 같아 보였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방대한 마력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표정이, 움직임이, 특히나 무감한 두 눈이 무서웠다. 사람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피가 묻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로 공작은 피와 체액에 절여져 있었다. 그중에 공작 본인의 피도 섞여 있을 터였다. 몸을 아끼지 않고 무작정 덤벼드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저게 정말, 요한 델피니움이 맞나?
수많은 참상을 목격하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던 그 요한 델피니움이 저토록 무모하게, 마치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검을 휘두르다니. 제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지휘관님께서 이번 전쟁을 꼭 승리로 이끌고 싶으신가 봅니다.”
파켄 후작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기사의 말에 눈썹을 구길 뿐이었다.
승리. 좋지. 하지만…….
그토록 강한 위력을 보여 주는 공작을 같은 편으로 두고 있음에도 그는 좀처럼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승리를 점치게 하는 저 남자가 어째서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걸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잠재된 불안이었다.
공작은 감정이 결여된 듯이 침잠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해가 떠오르는 걸 보고 있었다. 파켄 후작은 그에게 다가갔다.
“지휘관님. 정리도 다 되었으니 이제 그만 갈까요?”
요한은 조용히 하라는 듯 한 손을 들어 신호를 주었다.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평소와 달랐다.
곧이어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노바르는 양손을 깍지 낀 상태로 겹친 후 리세트의 가슴 중앙을 압박했다. 울음 섞인 뜨거운 한숨에 입술이 젖어 들었다.
“눈 좀 떠!”
거칠게 소리치는 순간에도 손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노바르는 온몸으로 내리누르듯 힘을 실었다.
“리세트 델피니움! 눈 좀 떠 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눈가로 열이 몰려 시야가 흐릿해졌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점차 늘어났다.
“눈 좀, 떠 보라고!”
간절한 외침과 움직임에도 리세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노바르의 힘에 못 이겨 가녀린 몸이 흔들릴 뿐이었다. 두꺼운 밧줄처럼 리세트의 발목과 허리, 왼쪽 손목을 묶고 있는 마력도 그 움직임을 따라 물결치듯 흔들렸다.
핏기가 가셔 싸늘하기만 한 얼굴과 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미동조차 없는 몸. 새하얀 눈밭에 누운 여자의 얼굴로 스며든 빛은 따사로워 보이는데, 그래서 더욱 죽음을 실감할 수 있게 했다.
산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라는 듯이 흐리기만 했던 하늘이 맑게 개었다. 믿을 수 없게, 마치 꿈인 것처럼.
질끈 감았던 눈을 뜨는 카에덴 델피니움의 주먹 쥔 손이 스르륵 풀렸다. 손의 떨림도, 눈동자의 떨림도 어느새 전부 사라져 있었다. 그는 무의미한 짓을 포기하지 못하는 노바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만해.”
노바르는 눈물 젖은 얼굴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짧은 정적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났을 무렵, 희망을 잃는 듯했던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넘실댔다. 햇살 때문일까. 아니면 미친 걸까.
“연구원님. 부탁이 있습니다.”
절대 지금 나올 수 없는 목소리였다. 희망을 되찾은 듯한 밝은 목소리에 카에덴 델피니움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뭔데? 헛소리하면, 네 입 막아 버릴 수도 있어.”
그는 단단히 경고를 줄 작정으로 윽박지르듯 말했다.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거야.”
노바르는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땀과 눈물에 젖은 얼굴이 어린아이의 것처럼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영지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 몇 명만 저에게 빌려주세요.”
“갑자기, 왜?”
“공작님을 찾아가려고요.”
“……뭐?”
내뱉는 괴상한 말과 달리 노바르의 목소리는 평소와 비슷했다.
노바르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짚고 일어섰다. 물에 푹 젖은 바지에 진흙이 엉망으로 묻어 있었다. 결기가 어린 눈동자를 보아하니 그 말도 안 되는 부탁은 진심인 듯 보였다.
“이유가 뭐야.”
“장례식은…… 마지막 가는 길은 지켜야 하잖아요.”
“고작, 뭐? 장례식?”
“고작이라니요! 말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되지요!”
“전쟁이 애들 장난이야? 요한은 지휘관이자 전략관이야. 전쟁의 핵심축 정도가 아니라 핵심 그 자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는 소리야!”
“그래도 알 건 알아야지요! 언제까지 숨길 수는…….”
하, 가만히 들어 주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가 참지 못하고 빈정거리듯 한숨을 쉬었다.
“요한이 올 때까지 그럼, 리세트를 방치하자는 거야?”
카에덴 델피니움은 자신의 목소리가 고함치듯 커졌다는 것도, 형편없이 갈라져 쇳소리처럼 들린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노바르도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저대로? 이 추운 겨울날, 호수 앞에서, 눈밭에서! 죽은 애를 저대로 둬?”
“이틀, 아니 하루면 돼요. 랑카 성은 수도에서는 꽤 떨어져 있지만 오히려 여기서 가까우니까, 하루만 꼬박 달리면 도착할 수 있어요. 제발 기다려 주세요, 제발.”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열두 시간, 아니, 열 시간만 기다려 주세요! 제발요…….”
카에덴 델피니움은 할 말을 잃었다.
뭐, 열 시간?
불가능한 시간을 잘도 읊어 대는 노바르의 눈빛은 여전히 희망에 차 있었다. 아니. 모르겠다. 저게 희망인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데, 그래서 찾아낸 게 고작 요한을 전쟁터에서 끌어내 여기로 데려오는 것인가. 그거라도 붙잡지 않으면 저 혼자 미쳐 버릴 것 같아 저러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질 않을 것 같았다.
나름 똑똑했던 애가 지금은 덜떨어진 머저리처럼 구는데, 머리통을 후려쳐서라도 정신을 찾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런데…….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내 머리도 어떻게 된 건가.
어차피 요한이 여기에 올 수는 없으니 그냥 노바르 뜻대로 하게 두는 게 나을 듯했다. 머릿속이 복잡해 실랑이하며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바르는 곧장 달려갔다. 겹겹이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져 휘청거리면서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눈을 밟는 소리와 헉헉거리며 거친 숨결을 내뱉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사이 그쳤던 눈이, 어젯밤까지만 해도 잠잠하기만 하던 그 망할 눈송이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고요해지자 카에덴 델피니움은 심란한 눈으로 리세트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그의 마력이 몸을 지탱해 주고 있는, 이미 죽어 버린 작고 가여운 여자를.
모든 게 끝이 났다는 것을 알리듯 불씨가 꺼진 장작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음울하게 울려 퍼졌다. 호수에 감돌던 은빛 마력도, 훈기를 돋워 주던 장작불도 사라졌다.
하얀 눈이 내리는 호수에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 ❖ ❖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몬스터들이 더 몰려왔다. 작정하고 기다렸던지 손에는 그럭저럭 쓸 만한 무기를 하나씩 움켜쥔 채였다. 제 몸뚱이가 가장 강력한 무기인데, 어설프게 인간들을 따라 하려 제일 위력이 좋은 무기를 내다 버린 형국이었다.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빛낸 웨어울프의 긴 울음소리가 그친 후 몬스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들에게서 강탈한 게 분명한 석궁을 든 오우거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 뒤로는 두꺼운 나무를 베어 만든 듯한 막대기를 든 고블린이, 그들을 엄호하듯 둘러싼 웨어울프가 전열을 가다듬었다.
요한은 기쁘게 그놈들을 맞아 주기로 했다.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으므로.
파켄 후작이나 부기사단장이 염려하던 상황이었지만 요한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찾아왔다.
드디어, 전부 다 죽일 수 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병사들에게는 명을 내려 두었다. 언제든 전투에 임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놈들이 눈치를 채면 곧바로 검을 빼 들 수 있게 무장을 해 두라고 일러두었다. 성에 고립되어 있는 지긋지긋한 일도 막을 내릴 때가 된 것이다.
여기 모인 것들만 다 죽이고 가면 성을 지키는 것들의 수는 고작해야 백 마리 남짓. 어차피 죽이지 못해 지금껏 상황을 끌고 온 건 아니었다. 부상병들까지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이제는 정말 거리낄 게 없어졌다.
“내가 한 말, 잊지 않았겠지?”
요한이 따로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일행은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검을 든 기사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파켄 후작은 그들의 검에 마력을 씌우며 자신의 검을 높이 쳐들었다.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요한은 다리가 제일 날랜 기사에게 눈짓했다. 짧게 묵례를 한 뒤 뒤를 돌아본 그 기사는 왔던 길을 내달려 갔다. 그것이 전쟁의 신호가 되어 양쪽 진영이 동시에 서로에게 돌진했다.
침엽수가 우거진 작은 숲에서 시작된 소란은 금세 랑카 성까지 옮겨 번졌다. 우렁찬 함성과 기합 소리, 괴물들의 비명이 척박한 땅을 가르듯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추운 겨울이 시작된 후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열기가 하늘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