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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43)화 (143/151)

143화
숨을 쉬지 않아요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꼭 몸에서 떨어트리지 말라고 어린 리세트가 당부했던 소중한 물건을 움켜쥔 손에 오래도록 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님프들의 장난으로 치부하며 요한은 들리지도 않는 노랫소리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로 랑카 성을 둘러싼 몬스터들이 보였다. 달리 무엇을 할 생각은 없는지 놈들은 며칠이 지나도록 그저 주변을 촘촘히 에워싸고 돌 뿐이었다.

지능을 얻었다고 하더니, 확실히 몇 해 전보다도 똑똑해지긴 했다.

골치 아프게 성장한 몬스터들은 인간들의 행동을 고스란히 따라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순번을 정해 보초를 선다든가 하는 일들을. 꽤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지.

요한은 신이 나 죽겠다는 듯이 거대한 나무 봉을 휘두르는 고블린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옆으로, 또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낯익은 특징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오른쪽 귀가 상대적으로 큰 놈. 손톱이 유난히 긴 놈. 흙이 묻어 딱딱하게 굳은 발가락에 요란한 장신구를 한 놈까지. 종이 같은 몬스터라 할지라도 뚜렷하게 구분이 되는 특징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며칠 동안 관찰해 외워 둔 특징을 활용해 요한은 몇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지능적으로 움직이는 놈들이 여섯 시간마다 교대하는 방식으로 성을 지키고 있다는 것. 대략 그 수를 헤아려 보면 삼천 마리 정도. 고블린과 웨어울프의 비율은 엇비슷하게. 와이번은 보이지 않고 오우거가 드문드문 자리를 지킨다.

축제라도 벌이는 양 저들끼리 무리 지어 놀고 있는 괴물들을 지나서 한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는 침엽수가 빽빽하게 늘어선 곳까지 시선이 흘러갔다.

저기가 괴물들의 본거지일 것이다. 저곳으로 들어가 대략 삼십 분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른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번을 바꾸는 것일 터.

창틀을 짚은 손가락 끝으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휘관님. 들어가겠습니다.”

요한이 말한 시간에 정확히 맞추어서 파켄 후작과 부기사단장이 들어왔다. 그들은 의견을 나누기 위해 테이블 앞으로 모여 앉았다.

요한은 그간 자신의 눈으로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관찰한 내용을 세세하게 일러 주었다. 경청하던 그들은 무식하기만 하던 놈들의 진화에 놀라 감탄하면서도 구겨진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쯤에서 설명을 마무리한 요한은 본격적으로 작전을 지시했다.

“파켄 후작은 나를 따라 놈들을 치러 간다. 성의 지하에 깊은 수로가 있으니 그곳을 통해 나갈 거야. 놈들의 감시를 피해 충분히 거리를 벌릴 수 있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갑작스러운 지시에 놀란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부기사단장은 여기 남아 병사들을 통솔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파켄 후작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눈만 끔뻑거렸다. 명령을 내리는 것에 익숙한 탓에 이런 갑작스러운 작전 지시에 기분이 나쁜 건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놀랍고 조금 두려울 뿐이었다.

전략관이 때에 맞추어 완성한 전략을 발표하면 지휘관이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전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요한이 그 두 역할을 일임했으니 거칠 것이 없어진 셈이고. 그 덕에 속전속결로 일이 끝마쳐졌다.

다소 무리인 듯 보이는 작전일지라도 지휘관을 막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걸 깨달아 말문이 막혀 버린 파켄 후작은 공작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신중하게 고민했다.

짚고 넘어가고 싶은 사항이 많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인원은 다섯으로. 그와 공작, 성기사 한 명, 황실 기사단원 중 두 명. 공작이 말한 이름들은 이번 전쟁뿐만 아니라 숱한 전쟁통에서 구르고도 살아남은 실력자들이었다.

지형적 특성을 고려해 마력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지만 본인이 나서서 검을 쓰겠다고 하다니. 귀족들이 기본적으로 검술을 배우기는 하지만 실전 경험은 전무하니 걱정이 앞섰다. 혹시 본인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잊은 게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불쑥 들었다.

검날에 마력을 집중시켜 놈들의 몸을 관통한다.

공작이 간단하게 말하고 있는 저 작전은 마치 죽기를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마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나. 물론 그는 어느 정도 검을 다뤄 본 적이 있다지만 공작은……. 그가 들어 알고 있기론 전쟁 중 한 번도 검을 쓰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아 입술이 근질거리는데 막상 또 떨어지지는 않았다.

만약 작전이 실패한다면. 해서 지휘관과 유능한 인력을 잃고 결국 여기 있는 모두가 죽으면 어떡할 것이냐고 말하려던 그의 입술이 서서히 굳게 다물렸다.

공작의 눈을 정면에서 마주한 탓이었다.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반드시 살아 돌아간다고, 그 뜻을 전하는 단단한 눈빛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지요.”

❖ ❖ ❖

검을 실전에서 사용할 일이 드물었는데.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요한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한 고블린의 몸에서 검을 빼냈다. 압축되어 있던 피가 순식간에 검이 만든 틈을 비집고 나와 허공으로 솟구쳤다.

혹독한 겨울에도 초록빛을 잃지 않던 숲에서 시작된 소음은 다른 곳으로 조금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전투가 한창인 곳에 성기사가 두껍게 신성력을 둘러 완벽하게 안과 밖을 차단했으니.

검을 휘두르는 손은 망설임이 없었다. 나날이 잔인해졌다.

베고, 또 베고, 달려드는 놈들의 머리를 자르고 몸통을 갈랐다. 불에 탄 사체는 짙은 회색빛을 띤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어쩐지 입술이 말라 요한은 더욱 힘 있게 웨어울프의 등허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강하게 힘을 실어 팔을 아래로 내리자 몸의 절반이 먼저 땅으로 처박혔다. 뒤이어 곤두박질친 몸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러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오늘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신경이 곤두섰다.

잠깐 피곤한 눈을 붙였을 때 리세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가슴이 소란하고 어지러웠다. 꿈을 꾼 것이라면 선명했으면 좋겠는데, 그 희미한 목소리는 그저 그의 이름을 한 번 부르고 사라져 버렸다.

착각이겠지.

안다. 이곳에서는 리세트를 만날 수가 없다. 님프들은 이미 흥미를 잃고 떠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착각이지. 그런데 왜 이리도 불안하게 가슴이 죄어드는 걸까.

이 불안을 잠재우려면 리세트에게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이 간절해지는 만큼 요한의 손 속에는 자비가 사라졌다. 애초에 있지도 않았지만 분풀이를 하는 듯이 움직임이 격렬해지고 급했다. 초반만 해도 체력을 아끼려 움직임을 최소화한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첫날에도, 둘째 날과 셋째 날에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요한의 몸과 마음은 지나가는 시간을 따라 과격해졌다.

요한은 뒤로 허리를 젖히며 오우거가 휘두르는 주먹을 피했다. 지금, 반동을 이기지 못해 잠시 휘청이는 오우거의 허벅지를 검으로 깊이 그어 다리를 절단했다. 다른 한쪽도, 곧이어 쉭쉭대는 거친 숨을 내뿜는 머리까지도.

그사이 땅을 박차고 도약한 웨어울프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요한은 그 입에 그대로 검을 찌르며 손목을 비틀었다. 뾰족하고 큰 송곳니에 팔뚝이 긁혔다. 통증이 느껴지자 오히려 살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에 꿰뚫린 채로 몸부림을 치던 웨어울프의 움직임이 멎었다.

요한은 그만 검을 털었다. 피와 검푸른 체액이, 죽어 버려 시퍼런 안광이 사라진 웨어울프의 몸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위로 이루어져 울퉁불퉁하고 척박한 땅이 갑작스러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조금 흔들리다 잠잠해졌다.

문득 요한은 바닥에 널린 사체를 보던 시선을 틀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밝아 오는 새벽빛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 ❖ ❖

땅을 쪼개기라도 하려는 듯 굉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빛이 폭발하듯 호수가 번쩍거렸다.

잠시 나무에 기대어 눈을 붙이던 카에덴 델피니움과 노바르는 갑작스럽게 잠에서 깨어났다. 추위도 망각한 채 그들은 이불이 밑으로 흘러 내려간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호수로 달려갔다.

아까의 그 소음은 전부 거짓인 듯이 호수는 그저 어제와 같이 평화롭기만 했다.

“노바르, 너도 들었지? 방금 분명 땅이 깨지고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잖아.”

“저는 호수가 번쩍거리는 것도 봤습니다. 잠결이었지만 소리도 똑똑히 들었고요.”

“네 마법진에 뭔가 걸린 건 없어?”

“잠시만요. 지금 확인 중인…….”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노바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카에덴 델피니움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 호수 위로 떠올랐다. 그 자리였다. 요한이 리세트를 떠나보낸 그곳!

사람의 형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자 노바르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자의로 헤엄쳐 나온 것으로는 도저히 보아 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리세트 쟤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떨리는 목소리를 낸 카에덴 델피니움의 질문을 받아 주는 이는 없었다. 노바르는 무거운 겉옷을 벗어 바닥에 내던지고는 차디찬 호수로 뛰어든 후였다.

전부 꿈 같았다. 악몽. 뭐 그런 거.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수면에 떠 있기만 하는 호수 한가운데. 그곳을 향해 헤엄쳐 가는 남자. 자신의 발 옆에 떨어져 있는 두꺼운 옷가지들. 차례대로 훑어본 카에덴 델피니움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해 흔들렸다.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놈이라도 된 듯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그가 정신을 차린 건 노바르가 리세트로 추정되는 것에 막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그들이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현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리세트의 머리색과 꼭 닮은 빛깔의 털을 가진 늑대나 야생 동물을 떠올려 보았지만 전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도 뒤늦게 호수 밑에 발을 디뎠다.

노바르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가 전개한 마법진은 리세트가 호수를 나온 즉시 파훼되었지만 그 마법진을 이루고 있던 마력은 여전히 리세트의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마치 그 몸을 지탱하듯이.

“리세트!”

노바르는 바닥에 주저앉아 리세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 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애원 섞인 노바르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선득하게 스쳐 지나갔다.

“숨을…… 리세트가, 숨을, 숨을 쉬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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