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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42)화 (142/151)

142화
나의 빛

병사들이 모여 생활하는 용도로 쓰이는 홀에는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요한은 뒤에서 쩔쩔매는 병사 하나와 함께 소란이 시작되고 있는 곳으로 갔다. 병사들이 요주의 인물 하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나, 집에 가고 싶어.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 없어!”

짐승의 울음처럼 목을 긁어 내리는 듯한 소리는 도저히 사람의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우리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 병세가 악화되어 죽으면, 나는 너희를 전부 죽일 거야. 내 말, 알아들었어? 알겠냐고!”

악을 쓰던 병사는 이제는 눈물을 쏟는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려다 멈추어 선 요한은 그의 뒷등을 무감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들썩이는 어깨의 움직임을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도 거칠게 요동쳤다.

“제발 나 좀 여기서 나가게 해 줘!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아. 집으로, 우리 엄마한테 가야 해.”

높이 치켜든 검으로 허공을 가르며 위협하는 그 병사의 눈은 시뻘게져 눈물에 젖어 있었다.

간곡한 부탁처럼 들리는 그의 말에 동요된 병사들의 기세가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들도 누군가의 자식이었다. 같은 아픔과 걱정을 공유하는 이들은 정신을 놓은 듯한 동료를 매몰차게 공격할 수가 없었다. 상관의 명이 떨어지지도 않은 탓에 더더욱 그랬다.

미친 듯이 고함치던 보초병의 난동은 금세 제압되었다.

상황을 살피고 있던 기사 한 명은 요한이 눈짓하자 곧장 명을 받들었다. 소리 없이 보초병의 뒤편으로 다가가 뒷덜미를 쳐 기절시키며 이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애원의 말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창에 처박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둥에 묶어.”

온기 하나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내려진 요한의 지시에 따라 기사들이 기절한 보초병의 몸을 밧줄로 칭칭 감아 기둥에 묶었다.

동공이 풀리고 입술은 벌어진 채 침을 줄줄 흘리고 상당히 공격적인 행동을 한다. 인격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마치 짐승이라도 된 양.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노랫소리로 사람을 홀려 정신을 지배하는 님프들이 나타난 건가.

다행스럽게도 사전에 어느 정도 몬스터들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게 해 병사들의 동요가 크지는 않았다. 인간 된 도리로 느끼는 최소한의 동정과 슬픔이 있을 뿐, 그들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님프의 짓이라고 굳게 믿으며 상관의 명을 믿고 따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전쟁의 지휘를 맡은 게 델피니움 공작이 아닌가.

지난 긴 토벌전을 승리로 이끈 선봉장. 잠시나마 제국에 평화를 안겨다 준 요한 델피니움. 다소 냉정하게 느껴지는 명령이긴 했지만 공작의 말은 곧 법이었고, 그들은 그 법을 어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요한은 되살아난 병사들의 눈동자를 하나씩 오래도록 마주해 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저 병사가 일어나는 즉시 내게 데려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내가 직접 올 테니 곧바로 알려.”

곁에 선 병사에게 그 명을 남기고 요한은 그만 몸을 돌렸다.

❖ ❖ ❖

리세트는 비전 마법진 앞에 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비전 마법진을 이루는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누르면 된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여기까지 내가, 어떻게 왔는데.”

별것 아니라는 듯이, 충분히 해낼 수 있다며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걸었다. 리세트는 아기에게 내주고 있는 치유 계열의 마력을 몸 안 깊숙이 밀어 넣고 방어 계열의 마력을 손바닥 위로 쏘아 냈다.

리세트의 마력과 델피니움가의 마력이 충돌했다.

비전 마법진 위로 전개했던 은색의 방어 마법진은 리세트의 코앞까지 밀려났다. 검은빛이 일렁이는 파란 마력이 리세트를 찢어 죽일 것처럼 덤벼들었다. 리세트의 오른쪽 다리가 풀썩 꺾이려다 간신히 펴졌다.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며 리세트는 마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웅크려 때를 노리던 은빛 마력이 릴프랑으로 희석해 놓은 마력을 끌어당겨 제 것으로 만들었다. 한층 위력이 세진 방어 마법진은 천천히 진격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팽팽하게 당겨진 턱 근육을 지나 쇄골로 떨어졌다. 시야가 자꾸만 흐릿해져 리세트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일 때마다 뺨이 뜨거워졌다. 숨결도 그랬다. 심장이 몸 밖으로 뛰쳐나갈 듯이 뛰어 댔다.

이렇게 방대한 양의 마력을 한꺼번에 쏟아 낸 건 처음이었다. 전쟁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한 번 질끈 감았다 뜬 눈에 핏발이 섰다. 시야가 또렷해지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계속 다시 눈을 감았다 떴지만 점점 더 흐릿해질 뿐이었다.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리세트는 찬란하게 빛나는 방어 마법진을 두 손으로 지탱하며 사력을 다해 밀었다. 손가락에 감각은 없는데 파들파들 떨리고 있는 건 보였다. 이를 악물며 힘을 주어도 손끝이 절로 곱아들고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힘에 밀려 잠시 리세트의 마력이 흔들린 사이, 델피니움가의 마력이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다. 물에 젖어 무거운 잠옷의 소매 한쪽이 너덜너덜 뜯겨져 나갔다. 리세트의 팔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불에 타들어 가는 듯이 상처 부위가 쓰라렸다. 어깨가 뜯겨 나간 것처럼 팔이 후들거렸다. 리세트는 힘을 잃어 툭 떨어지려는 손을 반대편 손으로 억지로 붙잡아 들어 올렸다.

어깨부터 시작해 손목으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리세트는 피로 얼룩진 손목을 꽉 움켜쥐며 마법진을 다시 힘껏 받쳤다.

불규칙적으로 흘러나오는 호흡은 이미 리세트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의식이 흐릿해진다.

저 말도 안 되는 힘을 쏟아 내는 마력을 어떻게 해서든 눌러야 한다는 건 아는데, 이 급박한 와중에도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느리게 감겼다 떠지는 눈에 고이는 게 눈물인지 땀인지조차 모르겠다. 분별할 여력 같은 거, 남아 있지 않았다.

리세트가 모든 것을 쏟아 내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우세한 쪽은 델피니움가의 마력이었다. 리세트를 한입에 잡아먹을 듯이 마력은 마치 거대한 동물의 입처럼 모습을 바꾸어 군침을 흘렸다.

온몸의 핏줄이 얇은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전신을 타고 오르는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리세트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마법진은 계속 유지해 내고 있었다.

이제 더 버틸 힘이 없는데.

마력이 빠르게 소모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점차 그러한 감각조차 멀어져 모든 게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복잡한 수식을 거듭 떠올려 외우던 머릿속도, 쿵쿵거리며 뛰던 심장 박동도, 손을 타고 뻗어져 나오는 마력의 빛까지도.

반쯤 감긴 눈으로 보는 세상은 안개가 낀 듯 뿌옇기만 했다. 그 순간 무언가 반짝였다. 리세트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 빛. 요한을 떠올리게 하는 파란빛으로.

요한…….

“요한!”

모든 것이 흐릿하게 지워지고 있는 순간에도 유일하게 빛을 잃지 않는 그 이름을 리세트는 소리 내 외쳤다. 지독하게 녹이 슬어 갈라지고 부서진 듯한 쇳내가 그 외침을 따라 번지는 숨결에 섞여 있었다.

끝내 리세트의 뜻을 꺾지 못하고 물러서 주었던 요한의 얼굴이, 함께 영지로 가자는 말을 해 주었던 요한의 미소가 자신을 집어삼키기 직전까지 다가온 마력의 빛 속에서 떠올랐다.

의식을 잃기 전에 무슨 대화를 나누었지? 내일 아침에는 무얼 먹고 싶다고 얘기해 주었나. 잘 자라고 인사를 했었나.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했나.

같이 아이스크림 먹기로 했는데. 따라오기만 하면 내가, 사 준다고 약속했는데. 여행도 가기로 했는데. 정원에 누워 손을 잡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기로 했는데.

너와 약속한 게 이토록 많은데. 아직 하나도 지키지 못했는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리세트는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마저 흐릿해질 때쯤, 리세트는 피맺힌 울음을 토해 냈다.

“나가고 싶어……. 나, 여기서,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사라져!”

몸이 텅 비워지는 듯한 감각이 몸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갔다. 아…… 이제 마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구나.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언뜻 은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포근했다. 어둠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찬란한 빛 속에서 리세트는 눈을 감았다.

❖ ❖ ❖

요한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방 안으로 정신이 든 보초병이 들었다.

“지, 지휘관님,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요한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괜찮으니 일어나지. 물어야 할 것이 있어 부른 것뿐이야.”

요한은 잔뜩 기가 죽어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보초병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답을 들은 후에는 이만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리자 보초병은 눈에 띄게 안심한 듯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보초병의 대답 몇 가지만 조합해 보면 답은 허무하도록 쉽게 내려졌다.

‘저는, 제가 난동을 부렸다는 걸 믿을 수가 없습니다. 참지 못할 정도로 졸음이 밀려와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갑자기 기둥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여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사람을 홀리는 노랫소리로 타고난 인격마저 정반대로 바꾸어 놓는 몬스터. 그런 짓을 가능케 하는 건 님프뿐이었다.

또 못된 장난질을 치는 것이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요한은 펜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님프들은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작고 하찮아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들이니. 반응이 없으면 금세 관심이 시들해져 자리를 뜰 놈들이라 크게 신경을 기울일 것도 없었다.

그깟 장난질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요한은 성기사들과 마법사, 그리고 황실 기사들을 비롯한 영주들의 사병들을 각각 통솔하는 이들에게 간결하게 명령했다. 앞으로는 성안에서 창문을 통해 몬스터 부대의 동태를 주시할 것. 한 마디로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노랫소리만 듣지 않는다면 님프들의 장난에 넘어갈 일은 없는 셈이니.

로브를 벗어 의자에 걸쳐 두며 요한은 답답한 정복 재킷까지 벗었다.

님프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데 자꾸 목이 타고 입술이 말랐다. 결과적으로 성에 갇히기는 했지만 부상을 회복하고 있어 상황이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고 식량도 충분한데, 그걸 알고 있음에도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창가로 향해 가던 요한은 가슴팍에서 흔들리고 있는 금장 단추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이상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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