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고립
정말이지 미쳤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날씨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짜증 나 죽겠네.”
카에덴 델피니움은 정확히 콧대를 조준한 듯이 내려앉은 눈송이를 입으로 후 불어 날렸다.
추운 건 차치하더라도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내렸다. 잠시 그쳤다가도 만 하루도 채우지 못하고 또 내렸다. 발목까지 쌓인 눈 때문에 걸어갈 때마다 발이 밑으로 푹푹 빠지는 건 다반사였다.
장화는 물에 젖지는 않았지만 보온성이 탁월하지 못해 발가락을 잘라 버릴 기세로 바깥 온도를 고스란히 전했다. 그렇다고 마력으로 불을 피워 발을 따듯하게 할 수는 없으니 동물의 깃털과 두꺼운 솜을 쑤셔 넣어 버텨 낼 수밖에. 달리 추위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호수가 얼면 큰일이니 그가 무리해 마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너무 뜨거우면 또 곤란하니 적당하게 조절해야 했다.
적당히 느긋하게. 적당히 깨끗하게. 그 ‘적당히’를 인생의 목표로 삼은 그는 이제 그 말만 들어도 눈살을 찌푸릴 지경이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추운 거 같아요.”
장작불 옆에서 노바르는 젖은 장갑을 벗으며 꽁꽁 언 손을 녹였다.
이런 혹한의 계절에 전쟁이라니.
출정식을 기점으로 따지자면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겨우 막 한 달이 지났다. 승전보가 전해지려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초조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다 죽어 가는 상태로 나타난 크리프 후작은 다행스럽게도 부상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기는 했지만 길게 대화를 나눌 상태는 아니었다. 사경을 헤매던 며칠 전보다 혈색이 좋아졌지만 안심할 수는 없는 단계였다.
치유 계열 마법사를 한 명이라도 데려올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웬만한 마법사들은 전쟁에 차출되어 얼굴을 구경할 수도 없었다. 노바르 또한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후발대로서 전쟁에 임하고 있을 터였다.
노바르는 오늘은 웬일로 조용한 카에덴 델피니움을 흘깃 살폈다. 차라리 입 좀 다물었으면 싶다가도 막상 그의 입술이 가만히 있으면 괜히 불안해졌다.
그는 요즘 불길한 소리만 했다.
‘아무래도 리세트의 상태가 이상해.’
며칠 전의 저녁, 눈 내리는 호수를 관찰하던 그가 뜬금없이 던진 말이었다.
상황이 그리 좋지는 못한 것 같다며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말했다. 언제는 호수가 조용한 게 좋다더니. 지금은 마법진이 잠잠한 게 영 심상치 않다며 말을 바꾼 것이다.
사실 노바르도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게 있었다.
리세트가 본래 지녔던 마력의 주도권을 완전히 되찾고 비전 마법진을 끊어 내면 호수의 바닥에 띄워 놓은 마법진은 저절로 파훼되는 원리였다. 하지만 없어져야 하는 건 그대로인데, 절대 부서지면 안 되는 것들이 망가지고 있었다.
일이 무탈하게 끝나기까지 카에덴 델피니움의 마력을 단단히 꼬아 만든 밧줄은 리세트의 몸을 지탱해 주어야 하는데, 그게 자꾸만 풀리고 있었다.
최악은 또 따로 있었다.
리세트의 마력이 마치 델피니움가의 마력에 동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은색 마력은 호수를 떠다니는데 특유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노바르의 마법진에 걸리는 건 델피니움가의 마력뿐이었다. 미세하게 느낄 수 있던 리세트의 마력은 희미하다 못해 어딘가로 떠나 버린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노바르가 마력의 농도를 조금 더 올렸을 때였다.
“큰일이에요. 큰일 났어요!”
메이 하핀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선발대가 랑카 성에 고립되었대요!”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노바르는 너무 놀라서 장갑을 놓쳤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말없이 메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법사들에게는 죽음의 땅이라 일컬어지는 그곳에 고립당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세 사람 사이로 새하얀 눈발이 휘몰아쳤다.
* * *
공작저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정원으로 나온 리세트는 막막한 눈을 들어 새하얀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어 그저 백지장 같은 하늘은 여전히 리세트의 머리 위에 있었다. 해도 달도 떠오르지 않아 바닥에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았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래야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시간을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이 무형의 세계는 점점 더 리세트의 숨통을 조여 왔다.
아기에게 말을 걸며 애써 두려움을 떨쳐 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저 적막하기만 한 곳에 홀로 있으니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할 수 있어. 지금까지 잘 버텨 왔잖아.
습관처럼 되뇌던 그 말들도 차마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리세트는 그사이 많이 부푼 것 같은 배를 쓰다듬었다. 최근에는 조금만 움직여도 손과 다리가 붓고 식은땀이 흘렀다. 뙤약볕 아래에 선 것처럼 숨도 가빠졌다.
“단서가 될 만한 걸 생각해 보자.”
익숙해진 혼잣말을 반복하며 리세트는 하염없이 정원을 거닐었다. 다리가 퉁퉁 부어 저릿했지만 잠시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분홍색 장미꽃이 눈에 띄었다. 무어라도 손에 잡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리세트는 무작정 줄기를 꺾었다. 하나씩 손에 쥐는 장미가 늘어날수록 손바닥에는 가시가 박혔다.
아픔이 느껴지면 고통스러워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커다란 꽃다발을 하나 만들 수 있을 만큼 꽃을 모으고 나서야 리세트의 손이 멈추었다.
마지막에 꺾은 장미꽃 줄기를 무심코 와락 쥐자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리세트는 그만 와르르 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멍하니 엉망으로 흩어진 꽃을 보자 그날이 떠올랐다. 요한에게 모든 걸 밝히겠다 결심하고, 함께 둘만의 파티를 가지자고 했던 그날. 침실 바닥에 떨어져 뒤엉킨 꽃과 케이크의 모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두려움에 손이 벌벌 떨려 왔다. 리세트는 억지로 고개를 틀어 2층으로, 자신의 침실 옆에 자리한 요한의 서재를 바라보았다.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 있는 그곳을.
간절한 마음이 두려움을 이겨 냈다. 그것을 자각했을 때 리세트는 배를 감싸 안고서 저택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2층의 계단을 오르고 마침내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책장이 밀리고 문이 생겨났었다. 단숨에 거기까지 달려간 리세트는 낑낑거리며 사력을 다해 책장을 밀어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책을 몽땅 바닥에 내던지고 다시 밀어 보아도 책장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제발, 좀 움직여!”
장미 가시에 찔린 손으로 퍽퍽 책장 옆을 치고 분에 못 이겨 어깨로 힘껏 밀어 보아도 소용없었다. 바닥에 뿌리를 내린 고목처럼 책장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나, 여기서 나가야 한단 말이야!”
남은 힘을 쥐어짜 내 책장을 친 리세트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손목을 삐었는지 통증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헉헉대며 숨을 몰아쉰 리세트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 어느 곳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잘한 상처가 빼곡하게 박힌 손으로 벽면을 짚는 순간에 리세트의 손을 타고 마력이 빠져나왔다. 익숙한 빛이지만 리세트의 것은 아닌, 델피니움가의 마력이.
그 마력이 벽면을 채우자 책장이 밀려났다. 그리고 리세트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각인된 그 문도 모습을 드러냈다.
리세트가 주저 없이 문을 열었을 때 바람이 불어왔다. 장미가 피어 있는 게 거짓인 양 무척 싸늘하고 매서운 바람이 창문으로 들이쳤다. 어디 한번 와 보라는 듯 촛대에 파란 불이 일렁였다.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환하게 비추는 그 빛을 따라 리세트는 걸음을 뗐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리세트가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자 바람이 그치고 불빛이 사라졌다.
리세트가 문에 손을 올렸을 때 은색으로 빛나는 마력이 부드럽게 몸을 감싸 주었다.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진 손이 거대한 문을 열었다.
바닥에 그려진 피처럼 붉은 마법진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 * *
안전하다고 판단된 지역에서 성기사단장이 급습을 당했다. 상처에 맹독이 스며들어 위급한 상태였다. 치유 계열 마법사들이 간신히 몬스터의 독을 빼내 그의 목숨은 건졌지만 문제는 이 직후에 발생했다.
그것만 기다렸다는 듯이 몬스터 부대가 달려들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미처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늑대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졌지만 몸집은 비견하지 못할 정도로 큰 웨어울프가 송곳니로 인간들의 목을 물어뜯어 숨을 앗아 갔다.
선발대를 두 조로 나누어 하필 요한과 부기사단장이 다른 곳으로 정찰을 갔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정찰하러 갔던 일행들이 도착했을 때는 상당수의 병사가 죽음을 면치 못한 후였다.
파켄 후작을 필두로 한 전투 마법사들이 곧바로 반격하지 않았다면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몬스터들의 공격은 급작스러웠고 강했다.
그들은 부상병들을 부축해 가장 가까운 곳, 아주 오래전에 버려진 랑카 성으로 피신했다.
랑카 성은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방치된 곳이었다.
랑카 성 일대는 한때 거대한 바위와 더불어 살아가는 땅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곤 했다. 그 땅의 바위는 구속 제어구의 재료로 쓰일 만큼의 위력을 가졌다. 이 때문에 그 지역에서는 마력이 의도치 않게 억눌러지는 현상이 발생해 마법사들에게는 죽음의 땅이라 불리게 되었고, 결국 영주도 봉토를 버리고 말았다.
바위로 인해 랑카 성 주변에서 마법진을 전개하려면 평소보다 몇 배로 마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마력 소모에 관한 건 요한에게는 하등 해당 사항이 없는 위협이지만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불이 잘못 옮겨붙을 시 원활하게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혹시 모를 가능성을 배제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이럴 때는 마법이 아닌 무력의 힘을 적극 활용해야 하지만 부상병들의 회복이 더뎠다. 상당수의 기사도 갑작스러운 공격에 많이 지쳐 있었다. 마법사들이 마력을 회복하는 데도 난항을 겪고 있어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만 갔다.
단단한 바위로 쌓아 올린 성벽을 몬스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이도 저도 못 하고 꼼짝없이 갇히게 된 신세였다.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요한의 눈매가 구겨졌다. 누군가 허락도 없이 그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지휘관님, 보초를 서던 병사 한 명이 갑자기 성안으로 난입해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덤벼들어 손을 쓸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보여 공격하지 못하고 대치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