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40)화 (140/151)

140화
공작저

카에덴 델피니움은 매서운 바람을 뚫고 힘겹게 걸어가 노바르 곁에 다가섰다. 꽁꽁 싸맨 이불이 바람결에 날아갈 듯 펄럭거렸다.

노바르는 갑자기 나타난 한 사내를 편한 자세로 눕게 하며 맥박을 살피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썩 산 사람의 모습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뭐야, 죽었어?”

“아직 살아 계십니다!”

버럭 소리쳐 대꾸한 노바르는 정체 모를 남자의 뺨을 치며 상처 부위를 살펴 나갔다. 의식을 차리게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아쉽지만 영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만 현실을 일깨워 주려던 그의 입술이 비틀리듯 다물렸다. 이제 어느 정도 타인을 대하는 방법을 안다. 지금 상황에서 희망을 깨부수는 말을 하면 그에게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네가 보면, 뭘 알긴 해? 네가 의사야, 치유 마법사야. 어서 의사한테 보이는 게 낫지 않겠어?”

얼빠진 얼굴로 그를 돌아보는 노바르의 눈동자는 총명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했다.

“어서 저택으로 가라고. 여기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노바르는 그대로 다 죽어 가는 남자를 업고 뛰어갔다. 크리프 선배님. 크리프 후작. 아트반 크리프. 눈 좀 떠 보라는 듯이 연신 그 이름을 부르며.

그제야 시체 같은 몰골로 나타난 남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 그는 느슨하게 열린 이불을 단단히 여미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보고서를 보았을 때만 해도 이미 죽어 버린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이 기쁜 소식을 리세트에게 알려 줄까. 그런데 얘가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있기는 한가.

고민하던 그는 일단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다.

“와아, 죽은 줄 알았던 크리프 후작이 살아 돌아왔다. 아, 리세트는 모르고 있었겠네. 사실 후작이 얼마 전까지 실종 상태였거든.”

❖ ❖ ❖

또다시 환영 속으로 들어왔다.

리세트는 바들거리는 손으로 배를 감싸 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덕에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지만 차라리 앞을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좋은 환영도, 슬픈 환영도 나타나지 않았다.

카에덴 델피니움의 목소리 또한 들을 수가 없었다. 아주 가끔 불규칙적으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가 지치고 힘들어 일부러 말을 안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전보다는 확실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지금까지는 리세트의 반응을 관찰하며 놀아 준 것에 불과하다는 듯이 마력은 무서운 환영을 만들어 냈다.

환영은 똑같은 장면만 계속 보여 주었다. 전쟁터에서 요한이 죽는 광경만 반복되었다.

매일 보아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찬가지겠지.

환영 속에 들어온 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리세트는 곧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건 알았다. 이제 그 소리가 들릴 테니까.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와이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요한이 죽으니까.

거대한 도마뱀의 형상을 한 와이번이 자신의 두 날개를 활짝 펴 날아오는 듯한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상공에서 거세게 날갯짓을 하는지 바람이 훅 끼쳐 왔다. 사방에서 피 냄새가 진동해 구역질이 치솟았다.

귀를 막으면 소리가 멀어지고 코를 막으면 냄새를 피할 수 있겠지만 리세트의 두 손은 여전히 배를 감싸고만 있었다.

마침내 와이번이 날개를 접으며 급속히 하강했다. 여러 번 본 기억이 있어 눈을 감고 있어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괴물의 울음이 동시에 리세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곧 리세트의 뺨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았다.

“리세트.”

꺼질 것처럼 희미한 요한의 목소리였다.

“너는 왜, 나를 보지 않아?”

무너져 내리는 요한의 숨결이 리세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숨결은 뜨거운데, 요한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리세트를 깊이 당겨 안은 요한의 몸은 얼마 안 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모든 게 바뀌었다.

코를 찔렀던 피 냄새도, 죽어 가는 요한의 목소리도, 싸늘한 체온도 사라져 버렸다. 비로소 리세트는 눈을 떴다.

막혀 있던 숨을 내뱉자 목구멍이 따가웠다. 어깨에 닿았던 숨결이, 몸을 덮었던 그 체온이 남긴 감각이 여전히 잔재했다.

환영을 이겨 내도 비전 마법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합하면 벌써 열다섯 번째 그런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리세트를 못살게 괴롭혀 대던 델피니움가의 마력도 보이지 않았다. 리세트는 드넓게 펼쳐진 흙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어딘가로 숨었을 테지. 빨리 찾아야 했다.

어둡기만 하던 통로는 이제 척박한 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통로를 지나가면 또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어느 날은 공작저로, 또 다른 날은 유년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으로, 아카데미로, 광장으로, 호수로. 배경은 불규칙하게 바뀌었다.

마침내 통로의 끝에 다다른 리세트는 잠시 멈추어 섰다.

“아가, 오늘은 어떤 곳일까?”

오랜만에 내 보는 말소리는 리세트가 맨발로 딛고 서 있는 메마른 땅처럼 갈라져 있었다.

“너는 어디로 가고 싶어?”

충동적으로 시작된 물음이었지만 말을 할수록 불안감이 옅어지는 듯했다. 리세트는 버석하게 갈라진 입술을 힘겹게 끌어 올려 웃어 보았다. 방금까지도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억지로라도 웃으니 정말 괜찮아진 듯했다.

리세트. 애달프게, 혹은 애절하게 들리던 그 목소리도 희미해졌다.

“이제 가 볼까?”

리세트는 조심스럽게 통로의 경계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익숙한 곳이 보였다. 수도의 공작저였다.

정원과 저택의 갈림길에 서 있던 리세트는 잠시 고민했다. 지난번에는 정원부터 찾았으니 저택으로 갈까. 아니야. 계속 똑같은 순서로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오랜 고민을 끝낸 후 리세트는 걸음을 돌렸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고 햇빛 하나 없는 풍경은 몇 번을 보아도 생경하기만 했다. 새하얗기만 한 하늘이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는 걸 일러 주는 것 같았다.

델피니움가의 문양이 조각된 육중한 문을 열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저택은 텅 비워진 상태였다. 리세트는 주저 없이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선 주방으로 향했다. 식욕을 돌게 하는 냄새와 특유의 열기를 뽐내던 주방 역시도 리세트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이곳을 채우던 사람들이 없어졌을 뿐이었다.

향신료를 모아 두는 선반과 각종 조리 도구를 보관하는 서랍을 열어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특이점은 찾지 못했다. 사용인들의 휴게실도, 빨랫감을 세탁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층의 어디서도 단서를 발견하지 못해 리세트는 곧장 계단을 올랐다.

1층을 이 잡듯 뒤지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나갈수록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이제 2층. 마지막 계단을 밟은 리세트는 자신에게, 그리고 요한에게 가장 익숙한 그곳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 ❖ ❖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출정한 공작의 분위기는 나날이 형형해졌다.

그런 공작의 뒤편에 서 있는 선발대원들의 얼굴에는 흥분감이 넘실댔다. 제국의 모든 이가 축복이라며 칭송하는 그 고결한 마력이 피워 낸 불꽃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타오르고 있으니까.

습격해 온 몬스터들을 한데 몰아 태워 죽이는 새파란 불꽃은 그 주변을 제외하고는 불씨가 옮겨붙지 않았다. 주인의 명에 따르듯 오직 몬스터들의 육체만 태우고 있었다. 실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감탄하다가도 너무나 무서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일방적인 학살 과정을 보고 있어 그런 듯했다.

며칠 새 몇 번이나 보았지만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델피니움 공작은 땅에 불길을 만들어 몬스터들의 발이 자연스럽게 한곳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 모였을 때, 병사들이 검을 쓸 기회를 주고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성기사들과 황실 기사단은 한발 물러서 엄호하듯 지켜보았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판단하면 공작은 모아 놓은 몬스터들 틈에 불씨를 던져 넣었다.

오늘도 그런 방식을 십분 활용해 습격한 몬스터들을 모조리 태워 죽이고 있었다. 괴로워하며 울부짖던 소리가 그치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맹렬한 기세로 뻗어 나갔다.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성기사들도, 황실 소속의 기사들과 각 지방 영주들의 봉신 기사들까지도.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이 아니라 확신이 자리 잡았다. 가슴이 절로 두근거리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 패배의 그림자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위압적인 힘 앞에 그들은 열의를 불태웠다.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자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속에서 자라났다. 저 남자처럼,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델피니움 공작처럼 강해지면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으므로.

“오늘은 이대로 끝내실 겁니까?”

요한에게 가까이 다가온 성기사단장이 넌지시 질문했다.

“어느 정도 사기를 끌어올렸으니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요한의 말에 동의한 파켄 후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휘관님의 말씀대로 하지요. 이제 눈도 그쳤으니까요.”

요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쏟아지던 게 언제냐는 듯이 화창하고 맑은 하늘빛이었다.

마력의 농도로 끌어 올리자 불꽃은 더욱 새파래졌고 환호성은 드높아졌다.

요한은 빠져나가는 즉시 다시 몸에 채워지는 마력을 느끼며 실소를 흘렸다.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바닥까지 남김없이 긁어다 쓸 기세로 마력을 퍼부어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다니. 다른 마법사들이 이 기적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요한은 문득 궁금해졌다.

괴물. 살인자.

이 뒤에 또 무슨 말이 붙을까.

이번에는 기적이려나. 그것이라면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영원히 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는 힘이라면 기꺼이 이용해 주겠다고 요한은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괴물이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마력을 조절하는 일 따위는 이제 없을 것이라고.

화르르 타오르는 파란 불에 갇힌 고블린과 웨어울프의 형체가 점점 무너져 내렸다. 인간보다 월등히 크고 무력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는 괴물들의 다리가 꺾여 바닥에 주저앉았다.

파란 불꽃이 다 타고 사라진 자리에는 새까만 재만 남았다. 예기치 못하게 맞게 된 몇 번의 전투는 전부 인간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눈이 그친 그날 오후, 선발대는 산을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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