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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139)화 (139/151)

139화
살아 있을까

눈을 떠 확인하면 된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토록 시간을 끌 일은 아니었다.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요한은 오랫동안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 지휘관님, 괜찮으십니까?”

보다 못한 수색대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 없는 공작의 뒤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그녀는 결국 조금 더 물러나서 그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떨리는 손을 말아 쥔 요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래 눈을 감고 있어 그런 것인지 빛이 들어오자 시야가 흐려졌다. 그 빛을 닮은 금발이 보였다. 햇살 아래에 리세트와 나란히 서 있으면 퍽 잘 어울려 부러워했던, 어린 마음에 그것이 너무나 질투가 났던 그 머리카락은 진흙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서서히 밑을 향했다. 수색대원들이 어째서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며 만류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이었지만 더 이상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죽은 자를 요한은 고요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배와 가슴을 잇는 긴 상처를, 뼈가 부러져 뒤틀린 하반신을, 여기저기 찢기고 긁혀 피가 맺혀 있는 발을,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는 걸 증명하는 그 흔적들을. 일렁이는 불빛이 스며든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시야는 또렷해지고 의식은 명료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무수히 많은 시체와 몬스터의 사체를 보고 자라 왔음에도 구역질이 치밀었다. 악취가 풍겼다. 이걸 지금까지 맡지 못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냄새였다.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요한은 찢을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천을 그만 시신 위에 덮을 수 있었다. 눈빛은 본래의 빛을 되찾아 차갑게 얼어붙은 채였다. 마치 이 막사 밖을 휘도는 싸늘한 바람처럼.

요한이 뒤를 돌자 조금 멀찍이서 그를 기다리던 수색대원들이 울음을 삼켜 내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각자 위치로 돌아가.”

그 짧은 명령을 남기고 요한은 막사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여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휘관님!”

길을 터 주려던 보초병들은 깜짝 놀라 공작에게 뛰어갔다. 공작의 고개가 갑작스럽게 내려가 영락없이 쓰러지는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부축하려고 다가가 보았더니 허리를 굽히면서까지 웃고 있었다.

하하하, 도저히 지금 이곳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소리가 공작의 입에서 나왔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터였다.

공작은 자리로 돌아가라는 듯 손짓하며 다시 허리를 바로 세웠다.

엉거주춤 물러난 보초병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지만 금방 물러나 주었다. 아무리 이상해도 상관의 명령이니 따르는 게 도리였다.

자신의 막사를 향해 가는 요한의 입술에는 잔잔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아…….

한숨 같은 탄식이 흘러나온 입술이 부드럽게 다물렸다. 흩날리는 눈송이를 잡아챈 손등에 핏줄이 올라왔다. 녹아 버려 물이 되어 버린 것을 털어 낸 손에 요한은 느긋한 동작으로 장갑을 꼈다.

참을 수 없이 또다시,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그가 돌아왔을 때는 회의를 파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간 뒤라 막사는 텅 비어 있었다.

회의용 간이 테이블에 못 보던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둘둘 말아 가느다란 갈색 줄로 매듭지은 지도와 회의록 옆에 바짝 붙어 선 채로. 오랫동안 눈을 맞아 촉촉해진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 올리며 요한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따듯한 위로의 편지였다.

마음을 잘 추스르기를 바란다고,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라고, 회의 내용은 별다를 것 없이 공작의 뜻에 따르겠다는 말로 끝맺은 편지.

사려 깊은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눈동자에는 이 밤을 닮은 매서운 빛이 감돌았다. 따스하게 방을 데워 주는 장작불과 어둠을 몰아내 주는 촛불도 그 기운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거추장스러운 로브를 테이블 한 귀퉁이에 내려놓은 후 요한은 딱딱한 침상에 몸을 누였다. 손에는 편지를 와락 움켜쥔 채였다.

다시, 구겨진 편지를 펼쳐 찬찬히 읽어 보았다. 글자를 한 자 한 자 음미하며 읽어 가던 눈이 가늘게 접히다 미소를 그렸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막사를 채웠다.

곧이어 모든 소리가 사라지자 고요하게 심지를 태우는 소리만 남게 되었다.

어지럽게 얽힌 감정을 차차 갈무리한 요한이 막 잠에 들기 위해 단추를 끄르고 있을 때였다.

“지휘관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질문에 요한은 허락을 내렸다. 누구인가 했더니 그 수색대원이었다. 시신을 이곳까지 안전하게 가져와 준 그녀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녀가 단단히 문을 닫는 사이 요한은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옷을 가다듬는 동안 장작이 타들어 가며 무너지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지?”

“저희는 그럼 수도로 돌아가는 건가요?”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그 짧은 명령을 이해하지 못해 수색대원들은 지금까지 고민한 모양이었다. 테이블 옆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로 간 요한은 장작을 빼 들며 그녀를 보았다.

“내가 분명 제 위치로 돌아가라 하지 않았나.”

“저희의 위치가 이제는 바뀐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요한은 고개를 까딱였다.

“너희의 임무는 크리프 후작을 찾는 것이지. 그러니 가서, 찾아.”

“……네?”

“그 시신, 크리프 후작이 아니다.”

몇 번이나 제 눈으로 확인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시신이 얼마나 부패했든, 살점이 떨어져 썩어 가고 있든 뼈가 녹아 사라지지 않는 한 타고난 골격을 육안으로도 충분히 어림잡아 볼 수 있었다.

수색대가 이곳까지 운반해 온 금발에 키가 큰 남자. 아트반 크리프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체격이 그보다 더 작고 뼈대도 얇았다.

“하지만 그 로브는 분명 후작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록 부패한 지 오래라 신원을 확인하기 힘들지만 그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을 텐데요.”

요한도 그 점이 가장 의아하긴 했다. 어째서 아트반 크리프가 아닌 이의 몸에 후작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로브가 걸쳐져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또 쓸데없는 호의를 베푼 것이겠지.

죽은 자를 발견하고도 수습해 줄 수 없을 만큼 제 몸이 안 좋아 애도의 뜻으로 로브를 걸쳐 주었을지도. 본인의 안위나 먼저 챙길 것이지, 쓸데없는 오지랖은.

“그 시신이 크리프 후작이 아니라는 건 내가 보증하지. 그러니 어서 돌아가 수색을 재개해.”

❖ ❖ ❖

날씨가 나날이 추워진다며 메이는 두툼한 담요를 더 챙겨 왔다. 음식과 여분의 옷, 장작도 빠짐없이 가방에 욱여넣어 가져왔다.

제일 크게 피워 놓은 장작불을 사이에 두고 세 사람은 둥글게 모여 있었다.

노바르는 무릎을 굽혀 앉은 채로 몸을 녹였고, 카에덴 델피니움은 신중하게 소시지를 굽고 있었다. 메이는 군침이 돌아 슬쩍 곁눈질로 맛있게 익어 가는 소시지를 살폈다. 근처에 둔 여러 개의 장작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어 가는 이상한 약초 냄새도 차츰 희미해졌다.

바람이 훅 끼쳐 들어 메이는 코끝이 시렸다. 아늑한 훈기를 피워 내는 장작불 속으로 장작을 더 집어넣자 불길이 화르륵 타올랐다.

노곤노곤한 표정으로 불빛을 쬐는 노바르를 보며 메이는 흐뭇하게 웃었다.

마님을 성심껏 도와주는 두 사람이 추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 따위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감사한 마음과 뿌듯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혹시 우리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그 남자, 카에덴 델피니움의 말에 메이의 눈이 의문으로 가늘어졌다.

“아니요?”

“우리를 태워 죽이려는 것 같아서.”

장작을 더 넣으려던 메이의 손은 들고 있던 장작 하나를 집어 던지듯 장작더미에 다시 올렸다. 눈이 마주친 노바르는 신경 쓰지 말고 가라는 듯 미소를 지어 주었다. 메이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지저분한 담요를 들고 떠났다.

카에덴 델피니움은 노바르 옆에 얇은 이불을 깔고 털썩 그 위로 앉았다. 따로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보송보송한 새 이불을 몸에 둘둘 말았다.

“오늘도 괜찮은 건가요?”

잘 익은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노바르가 물었다.

“잘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어. 마력이 너무 잠잠해.”

“좋은 징조라고 하셨잖아요.”

“적당히 잠잠해야지. 이건 좀 폭풍 전의 고요 같단 말이야.”

“갑자기 불길하게 왜 그러세요.”

“솔직히 말해 불꽃이 터지듯 여기서 펑, 저기서 팡, 난리가 날 줄 알았거든.”

맛있는 육즙이 흐르는 소시지를 한 입 문 채로 굳어 버린 노바르가 안쓰러워 그는 피식 웃음 지어 주었다.

“너무 걱정은 말고.”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오늘은 한숨 푹 자고 내일 마법진을 처음부터 점검해 볼 거야.”

“지금 해 보면 안 될까요?”

“지금은 무리야. 저 큰 마법진을 다 짚어 보기에는 내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아시다시피 유지하는 데 다량의 마력을 잡아먹히고 있는 중이라서.”

남은 소시지를 입에 욱여넣은 노바르는 빈 꼬챙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어딜 그리 급하게 가나 했더니 약초가 펄펄 끓고 있는 솥으로 달려갔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은데.

그 생각에 부응하듯 노바르는 약초를 끓인 물을 나무 그릇에 가득 퍼 가져왔다. 마시라고 주었으니 매정하게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일을 위해서 먹어 두는 편이 이롭기도 하고.

끈적끈적하고 암갈색으로 거무튀튀한 액체는 한눈에 보아도 생명에 위협적이었다. 인상을 한껏 구기며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목 뒤로 쭉 그 물을 삼켰다.

“어?”

다시 이불을 몸에 감고 앉으려던 노바르가 또 벌떡 일어났다.

“뭐야. 또 왜? 이제 그만 가져와.”

“그게 아니구요. 제 마법진에 뭐가 걸렸어요.”

“또 먹이를 찾아 헤매는 가여운 야생 동물이 지나가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이건…… 사람 같아요.”

“여기에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설마 요한이 그리움에 미쳐 작전지를 벗어났나.”

노바르는 이상한 낌새가 보이는 마법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보이기는 했다. 부랑자 같은 몰골에 절뚝거리는 다리. 복부를 감싼 손. 점점 올라간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금발에 키가 무척 크고…….

“크리프 선배님?”

노바르는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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