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죽은 사람
구름이 몰려와 어둑해진 하늘에서 눈발이 휘날렸다. 혹독한 추위에 얼어붙은 땅을 적신 피를 깨끗이 지우려는 듯이. 마치 온 세상을 그 순결한 빛으로 물들이려는 듯이.
따듯한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 병사 전용 막사 밖으로 나온 한 병사가 눈 위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눈까지 뿌려 주다니. 정말로 야속한 하늘이구나. 그가 순번을 교대하기 위해 막 지정된 위치에 당도했을 때였다. 주린 배를 붙잡고 있는 다른 병사가 보였다. 그와 교대로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어서 저녁 먹으러 가 봐. 맛있더라.”
“벌써 교대할 시간이야?”
“내가 조금 빨리 나왔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 배고프잖아.”
“고마워. 그럼 새벽에 보자고.”
그는 뒤늦게 무언가 생각이 나 만면에 웃음을 띠고 몸을 돌리려던 그 병사를 불러 세웠다.
“혹시 수색대 소식이 전해진 건 없었어?”
“아직 아무것도 없어. 나도 오늘은 오려나 싶어서 내심 기대했는데 조용하기만 해.”
벌써 저만치 멀어진 병사는 그 말을 남기고 막사 안으로 쏙 들어갔다.
동료가 사라지고 나자 주변의 어둠이 짙어진 듯했다. 아마도 턱까지 긴장감이 차올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본래 그는 막사 앞에서 보초 서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거기에 더해 델피니움 공작의 명까지 얹어져 바짝 긴장해야 했다.
수색대에서 연락이 오면, 만약 찾은 사람이 금발에 키 큰 남자면 곧바로 알리러 올 것. 전혀 어려울 것 없는 명령이지만 크리프 후작의 실종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진 상황에서는 가볍게 여길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전서구나 전령이 올까 봐 그는 하늘과 숲 저편을 번갈아 두리번거렸다. 벌써 그렇게 된 지도 나흘째였다.
하긴. 실종된 사람을 벌써 찾았을 리가…….
그가 막 억눌러 놓은 한숨을 내쉰 무렵에 거칠게 달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아니다.
당황스러워 검집을 매만지던 그는 곧 알게 되었다. 이건 말이 땅을 박차고 오는 소리라는 걸. 또다시 몬스터의 습격인 줄 알고 절망했다가 그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은 불안하게 뛰었다.
그는 목을 쭉 옆으로 빼고서 어둑한 수풀 사이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살펴보았다.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크리프 후작을 찾고 있는 수색대의 마차였다.
❖ ❖ ❖
산으로 들어서자마자 혹한의 추위가 덮쳐 오고 눈발이 거세게 몰아쳤다. 순조롭게 진군하던 선발대의 발은 자연의 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묶였다.
지휘관의 막사 안에는 그 막사의 주인인 요한 델피니움 공작과 성기사단장, 파켄 후작, 황실 부기사단장이 모였다. 지도에 몬스터들이 습격한 위치를 표시하며 그들은 대화를 나누었다.
“피해가 크지 않아 다행이지만 언제까지고 이곳에 묶여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조금 멀리 돌아간다 해도 다른 길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요?”
습격의 마지막 지점을 표시한 성기사단장이 고뇌에 찬 목소리로 말문을 텄다.
그의 말처럼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 이대로 버티다 눈의 기세가 약화되면 원래대로 진군할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때였다. 요한은 반대 의견을 표했다.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요. 오히려 기회일 수 있습니다.”
“기회라니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부기사단장이 곧바로 반문했다.
“습격하게 내버려 두자는 겁니다.”
“습격을 하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습격을 당하자는 겁니까?”
“거센 눈발을 뚫고 다른 길을 찾는 위험 부담을 떠안을 필요 없이 우리는 이곳에서 마법진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다 습격해 오는 것들을 사살하면 됩니다. 이제부터는 얼마든지 불을 피워도 된다고 병사들에게 알리세요. 불과 음식 냄새가 그놈들을 유인할 미끼가 될 테니까요.”
거센 눈발 때문에 고립 아닌 고립을 당한 상황에서는 썩 괜찮은 전략 같아 보였다. 만약 심각한 부상자가 있다거나 싸울 인원이 충분하지 않으면 기함하고 무조건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세워야겠지만, 식량도 충분하고 다친 인원은 하나도 없었다.
공작의 의견에 수긍한 성기사단장과 부기사단장은 지도를 보며 몇 가지 사항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델피니움 공작은 그들의 말에 경청하며 손끝으로 지도의 부분 부분을 짚어 자세히 지시를 내렸다.
바로 이전의 전쟁까지 총 세 번의 지휘관을 역임한 파켄 후작은 두려운 눈으로 그런 공작을 지켜보았다.
쏟아지는 눈을 뚫고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나흘째.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의 야영을 했고 그때마다 몬스터의 습격이 있었지만 금세 제압되었다. 단 십 분 만에. 저 남자 요한 델피니움 혼자서. 모두 합쳐 본들 십 분씩이나 소요되기는 할까.
처음 습격당했을 때를 제외하면 사실 시간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붙이기에도 애매했다.
한차례 소규모 전투로 번진 첫 습격은 공작이 일부러 병사들의 합을 맞춰 보려 손을 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걸 제외하면 눈 깜짝할 새 몬스터들의 몸이 여러 갈래로 쪼개져 타들어 가고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경탄스럽기보다 두려움을 몰고 왔다.
그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갑작스럽게 공작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당황해 입술을 열려던 그는 자신에게서 약간 그 시선이 빗겨 나 있다는 걸 알아보았다. 공작은 막사의 입구 쪽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막사 안으로 침투했다.
요한은 의자 옆에 벗어 두었던 로브를 어깨에 걸치며 일어섰다.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고 결계로 세워 둔 마법진에 몬스터가 걸리지도 않았다. 습격은 아니었다.
벌컥 문이 열린 틈으로 찬 바람과 눈송이, 그리고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공작 각하!”
가쁜 숨을 뱉어 낸 자의 모습을 알아본 순간 요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금발에 키가 큰 남자를, 크리프 후작 각하를 발견했다는 소식입니다!”
❖ ❖ ❖
금발에 키가 큰 남자. 아트반 크리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원래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던 분위기가 손쓸 새도 없이 무거워졌다. 애초 이곳에 모인 이들이 말수가 적기도 했지만 이처럼 죽은 듯이 적막하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고 회의를 하던 그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저는 잠시 다녀올 테니 계속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회의를 해산한 요한은 막사를 나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움직임은 더욱 느릿해져 갔다. 마음은 벌써 시신을 옮겨다 두었다는 막사로 가 버렸는데, 발길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일 작정으로 쏟아지는 눈은 마치 꼭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불러왔다.
맞아. 꿈이 아닐까.
결코 꿈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싶은지 매서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눈처럼 새하얀 입김도 그 바람결에 흩날려 자취를 감추었다.
허무한 건가. 이런 감정이 바로 허무인가.
그의 뒤를 따라온 병사가 무어라 말을 했지만 요한의 의식까지 닿지는 못했다.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이 상황, 이 날씨, 이 감정이……. 그저 믿기지 않았다. 정말 악몽이라면, 그래서 깨어날 수만 있다면.
그 바람이 커질수록 뺨을 스치는 공기가 차가워졌다.
‘수색대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텅 비워진 것 같은 머릿속으로 병사의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신체 일부가 훼손되어 심각하게 부패한 상태였다 합니다.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기까지라면 희망을 걸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였다면…….
‘로브에 후작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걸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 악몽 같은 말을 되새기는 사이 요한은 막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막막한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려 하얗게 보이기도, 그저 새까만 밤하늘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하늘의 색이 바뀌었다. 하얗다가 새까맸다가, 마치 정말 꿈처럼.
로브의 어깨선에 하얗게 눈이 쌓이고 나서야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막사의 문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 이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열고, 들어가서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래도록 멈춰 있을 것만 같던 손이 마침내 문을 열었다. 미처 장갑을 끼지 않아 손끝이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어깨에 쌓여 있던 눈이 후드득 떨어져 구두를 적셨다. 안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수록 질퍽거리는 소리가 빨라졌다. 눈과 흙이 고루 섞인 발자국은 시신을 올려놓은 곳까지 이어졌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수색대원 중 하나가 참담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요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어 나가기만 했다.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신은 하얀 천으로 덮어 두었지만 미처 다 가리지 못한 금발이 언뜻 보였다.
왜 저런 걸 덮어 둔 거지?
자신에게 반문하던 요한은 곧 깨달았다.
아, 그래. 죽었다고 했지.
단지 불빛 때문이라고, 이곳을 밝히고 있는 저 불빛이 번져 그런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한참을 텅 빈 시선으로 새하얀 천을 내려다보던 요한은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끌어다 놓았다. 그 천을 잡고서 가만히 있었다.
그사이 손의 떨림은 더욱 커져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두려움. 슬픔.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아픔과 쏟아 낼 대상을 찾지 못한 분노.
어디서 기인한 두려움인가.
‘너, 나랑 친구 할래? 나 리세트의 친구이기도 하거든. 셋이서 친구 하면 진짜 재밌을 것 같은데. 근데 나, 너랑 동갑이야.’
이 천을 들춰내면 네가…… 그런 실없는 말만 하던 아트반 크리프가 있을까.
‘야, 나만 믿어. 너 리세트 좋아하지? 엄청 티 나는데 그걸 눈치 못 채는 리세트도 참 대단하다. 내가 도와줄게. 어때, 당장 나랑 고백하러 갈래?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성공할걸.’
‘요한! 이것 좀 봐. 나 이번에는 점수가 올랐어! 신기한 거 알려 줄까? 그래도 여전히 낙제점이라 리세트랑 같이 수업 들어. 부럽지?’
‘야! 요한 델피니움! 너는 네 몸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어. 조심 좀 해! 이 멍청아! 살자고 싸우는 건데, 자꾸 죽자고 덤벼들래?’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목소리에서 성년이 되어 낮아진 목소리의 변화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딴 걸 회상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 그럴 일도 없었어야 하는 건데, 어째서…….
요한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오직 손의 감각에 의지해 천천히 천을 걷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