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혼자인 것처럼
떠들썩한 파티가 열리던 황궁 중앙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름다운 꽃처럼 치장하던 귀부인과 숙녀들, 연미복을 갖추어 입고 그녀들을 에스코트하던 신사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곳을 채우던 섬세한 선율과 적당히 떠들썩한 대화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곳에 모인 건 전쟁에 참전할 용맹한 전사들뿐이었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은 끓어오르는 피와 약간의 긴장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손에 들고 있는 투구와 검집을 매만졌다. 대신전의 부름을 받은 성기사들은 저들끼리 모여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각 계열의 정복을 입고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마력을 점검했다.
잘해 보자고,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낸 후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자는 인사말이 오고 갔다. 적잖이 서로의 이해에 부딪혀 싸우기도 했던 집단이었지만 그 말을 나누는 순간에는 진심으로 서로의 무운을 빌어 주었다.
선발대로 차출된 인원들은 마음의 준비를 다 끝낸 듯 홀가분한 얼굴이었지만 오히려 남은 사람들, 후발대에 포함된 자들의 얼굴에 더 큰 불안이 들어차 있었다. 선발대가 작전에 실패할 시 타격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넘어오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친구와 먼 친척, 혹은 가족과 떨어져 참전한다는 데 큰 혼란과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도 이들의 사정은 나은 축에 속했다.
남겨져야 하는 사람들의 낯빛이 가장 좋지 않았다. 수도에 남아 가문을 지킬 의무를 짊어진 안주인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 내며 그만 홀에서 퇴장했다. 남편의 손을 잡고 의연하게 기도문을 외워 주던 그녀들은 문밖으로 나설 무렵부터 울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 흐느꼈다.
그 안타까운 소리가 홀에도 전해져 분위기는 한층 더 침울해졌다가 이내 본래대로 돌아왔다.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야 할 명분이 생겼군요. 제가 죽으면 안사람이 따라 죽을까 걱정되어 마음 편하게 눈도 못 감겠습니다.”
한 귀족 인사가 능청스럽게 던진 말에 곳곳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곧 출정식이 거행된다고 합니다. 어서 나오시지요.”
그들에게 소식을 전한 궁인은 정중한 몸짓으로 문을 열었다. 이제 밖으로 나갈 시간이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대리석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던 요한은 제일 먼저 홀을 나섰다. 겨울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햇빛은 찬란하게 대지를 비추었다. 무심한 하늘도 오늘만큼은 눈을 내려 주지 않았다.
만 하루 동안 성내에 머물며 음식을 먹고 사기를 끌어올리는 목적으로 행하던 출정식은 때에 맞게 약소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홀에서 멀어질수록 요한의 귓가를 스치는 울음소리는 잦아들었지만 곧이어 더 큰 외침이, 울음이, 비명 같은 흐느낌이 끼쳐 들었다. 무투회를 개최하는 용도로 쓰이던 거대한 경기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제국의 미래와 평화, 안녕을 위해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닿을 듯이 드높아졌다. 요한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소리는 더욱 서럽게 울려 퍼졌다.
마침내 모든 인원이 경기장에 모여들자 황제가 연단 위에 올라섰다. 연단 바로 아래에 서 있던 귀족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예를 취했다.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던 병사들도 곧 그들을 따랐다.
소란하던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을 때 황제의 입술이 열렸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다시는 제국이 전쟁의 위험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소중한 가족들을 꼭 빠른 시일 안에 품에 돌려보내 주겠다며 황제는 다짐하듯 제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즉위한 지 3년, 선황제가 병마와 싸우다 급작스레 죽은 후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황좌에 오른 그를 향해 제국민들은 황제 폐하,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연호했다.
환호성 같기도 하고, 원망과 비난 같기도 했다.
황제가 한 마디씩 더해 갈수록 그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종내에는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는 애끓는 목소리가 매서운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아가. 여보. 엄마. 아빠. 형. 언니. 오빠. 누나. 내 동생. 나의 친구.
갑옷을 입고 완벽하게 투구까지 갖추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을 텐데,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각자 가족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 곳만 애타게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지 애처롭게 손을 내저으며 울부짖었다.
그 참담한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에도 요한의 얼굴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먼 세상의 이야기처럼, 마치 그 혼자 다른 세계에 내던져진 것처럼. 그러니까 꼭, 혼자인 것처럼.
열성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황제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요한은 징집된 병사들을 살폈다.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검집을 쓸며 무언가를 억누르는 사람도 있고 투구 안에 감추어진 제 눈을 막듯 손으로 시야를 가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두 귀를 막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저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도 요한은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울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새 요한은 쇄골 사이를 매만졌다. 움푹 패어 있어야 할 곳에 무언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만져 보려고 했지만 장갑을 낀 손으로는 여의치 않았다.
요한은 장갑을 벗어 로브 주머니에 넣은 후 성급하게 그것을 꺼내 보았다. 빛바랜 금장 단추가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것에 구멍을 뚫고 그 틈에 실을 엮어 목걸이로 만들어 끼고 있었다. 어젯밤에 충동적으로 손수 만든 것이었다.
울렁거리듯이, 혹은 가슴에 차디찬 바람이 불어닥치는 것만 같았던 느낌이 단숨에 사라졌다. 며칠간의 노력 끝에 간신히 되찾은 평정을 뒤흔들며 질척이던 감정이 빠르게 없어졌다.
요한은 더없이 소중한 것을 대하듯 그것을 손에 꾹 움켜쥐었다.
언제부터 손이 떨렸는지 모르겠다. 지금인가. 아니면 장갑을 벗을 때인가. 그도 아니면 대체 언제부터 그랬을까. 요한이 멍멍한 소리를 떨쳐 내고 정신을 차린 뒤에는 이미 손이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떨림이 싫어 손에 더욱 힘을 주자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어느새 말을 마친 황제를 대신해 대신관이 연단에 올랐다.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이 전부 일어나 정중히 묵례하며 예를 표했다. 울음이 끊이질 않을 것 같던 장내는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대신관이 축성을 내리자 하늘에서 마치 눈이 쏟아지듯 새하얀 빛이 내려왔다. 장엄한 신성이 제국 전역에 내렸다. 그 빛을 목도한 자들은 경탄과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이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온 마음을 다해 울부짖던 이들도,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이들도, 그들의 마음을 외면하며 황제를 바라봐야만 했던 이들까지 모두 손을 모아 가슴에 붙였다.
요한은 반대편 손을 들어 빛바랜 단추를 쥐고 있던 손을 감쌌다. 눈을 감고 처음으로 신을 찾았다.
리세트 델피니움. 나의 구원이자 빛. 너를 향해 온 마음으로 목 놓아 빌고 외쳤다.
다녀올게.
금방 너에게 갈게.
❖ ❖ ❖
어떤 환영 속에서는 어린아이였다가, 또 다른 환영 속에서는 아기가 되었다가, 리세트는 과거의 한때로 돌아가 추억을 경험했다.
환영은 좋은 모습으로만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글씨를 쓰는 게 어려워 몰래 공책을 버리다 엄마에게 들켜 혼난 일, 리세트의 편을 들어 주던 아빠에게 불똥이 튀어 함께 쫄쫄 굶은 일, 접시를 깨트리고서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다가 야단맞은 일까지.
어렸을 때는 너무 속상하던 그 일들이 지금은 과거의 한 추억이 되어 리세트의 마음을 울렸다.
“안녕, 엄마. 안녕, 아빠.”
리세트는 흐릿해지다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하는 그들을 떠나보내듯 손을 흔들었다.
환영이 끝나면 어둠이 찾아온다.
어둠이 끝나면 조금 더 농도가 짙은 새로운 어둠이 리세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무의 공간이라는 것을 예상할 뿐이었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공간.
자그마했던 몸이 다시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두 손을 쫙 펼쳐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나서야 환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리세트는 물에 푹 젖은 잠옷이 무거워 치맛단을 들고 비틀어 물기를 짰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아 춥지는 않지만 등골이 서늘했다. 아마도 어둠이 내뿜는 날카로운 기운이 리세트와는 상성이 안 맞는 듯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자신을 없애려 들어온 여자를 반갑게 맞이해 줄 리는 없으니.
어두운 통로를 지나 마침내 그 끝에 다다라선 리세트는 부러 딴청을 피우듯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물방울이 눈과 코로, 사방으로 튀어 댔지만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예측 불허 한 행동을 불시에 저지르면 비전 마법진을 감싼 마력은 움찔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으니까.
이번에도 그 찰나의 빈틈으로 리세트가 뛰어 들어갔다.
힘을 들이지 않고 비전 마법진에 닿았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현란한 도형과 수식을 한데 모아 주던 테두리가 벗겨져 제 기능을 점점 잃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만 더 하면 마법진이 파훼될 것 같아 리세트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침착하게 하자. 너무 급하게 덤비면 일을 그르치니까. 후우, 후, 길게 호흡한 끝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던 리세트의 발목을 무언가 잡아챘다.
밑을 보지 않아도 그것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었다.
이 못된 마력!
민첩하게 허리를 숙인 리세트는 방해하는 마력을 확 잡아채 마치 끈을 묶은 놀잇감처럼 허공에 빙빙 돌렸다. 어지러운지 마력은 더 이상 꿈틀댈 기운도 없어 보였다. 그것이 다시 덤벼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은색 마력이 비전 마법진의 수식 하나를 끊어 냈다.
그 순간 리세트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시 호수의 수면 아래였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는 입술 새로 자그마한 물방울이 퐁 솟아 수면 위로 떠나갔다.
시도는 성공적이었던지 다리 한쪽이 자유로워져 있었다. 이제 비전 마법진을 이루고 있는 수식은 하나만 남은 셈이었다.
기뻐하던 것도 잠시. 무언가 리세트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처럼 목을 졸랐다. 리세트가 한발 늦게 마력을 끌어냈지만 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손과 팔, 자유로워진 다리에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갑작스럽게 환영이 찾아왔다. 지독하고 무서운 환영이었다.